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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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정리글


이 글은 바닐라 이야기 이전편과 예쁜 인형 아가씨를 보고 오면 좀 더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님 말고



-1 + 1 = 1 의 마법-

모처럼의 피자를 차려줬는데, 양혼의 시선은 스마트폰에만 고정되어있다. 평상시에도 자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긴 하지만, 자기는 결혼이란 단어 하나에 아까부터 두근대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던 자신에 비해 너무 무심한 건 아닌가 싶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주인의 옆자리로 가 얼음잔에 콜라를 따라주며 양혼의 액정을 슬쩍 쳐다본다.

반지”

콜라의 미세한 거품들이 유리잔에 볼록하게 솟아오른다. 넋을 잃은 콜라는 결국 컵의 라인을 따라 흐른다

어맛!”

액정의 쥬얼리들에 눈을 뺏긴 바닐라가 하지 않던 실수를 한다. 금방 페트병을 세우지만 밥상에 검은 액체가 부글부글 흐른다.

반지 같은 거, 그냥 디자인은 뭐가 예쁜가 보려고”

바닐라의 실수에 굳이 토를 달지 않는다. 쥬얼리 같은 건 매장에서 직접 봐야 한다지만, 이런데 영 문외한인 그는 보석이나 반지의 모양이라도 미리 봐두고 싶었다.

정말, 2년을 이 남자와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모습에 바닐라는 설렘과 혼란함을 동시에 느낀다.

혼란함, 바닐라의 마음 한 칸에 그런 답답함이 남아있었다. 결혼이란 단어에 계속해서 확인을 바라는 것도, 주인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에 걸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바닐라의 세계는 그리 넓지 않았다. 주인과 함께 이 집에서 모든 세상을 즐기고 느끼던 그녀에게 바깥 세상은 날카롭고 사나운 폭풍 그 자체였다. 물론, 그 폭풍을 자신이 맞는다면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는 다른 사람이 서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가장 불안하게 만들었다.

주인님”

응?”

자기도 자신의 주인을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궁금한 건 못참고, 답답한 건 풀어야하는 직설적이고 단순한 성격. 주인과 함께한 시간이 너무도 오래되었단 사실을 새삼 다시 느끼자 자신의 주인이 할 대답을 왠지 떠올릴 수 있게된다.

하나만 여쭤보아도 됩니까?”

뭐를?”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자세, 평상시에는 저러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는 양혼은 저 모습 자체가 바이오로이드의 뇌 어딘가에 새겨진 무의식 중의 표현이라고 혼자만 생각한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 일종의 루틴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의 바닐라는 무언가 진지하게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자기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바란다는 뜻이었다. 바닐라와 오래 살고보니 저런 것 까지 단박에 눈치를 채게 된다.

그…제가 주인님과 정말 어울리는 존재일까요?”

존재, 바닐라가 말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양혼은 알 수 있었다. 평상시에는 자기가 언제나 바이오로이드라는 걸 인정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그녀가 자신을 존재란 단어로 지칭했다.

세상 어딘가엔, 아니 세상 사람의 대부분은 바이오로이드를 싫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일자리와 가치를 빼앗아버린 존재로, 부유한 사람들은 순수한 인간이 아닌 노예 같은 존재로 바이오로이드를 대하고 있었다.

왜?”

그렇잖습니까, 전 바이오로이드고. 주인님은…”

바닐라가 말을 흐리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없었다.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말끝을 흐리는 저 행동 하나가 바닐라의 마음을 솔직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인간이잖습니까”

너 웃긴다?”

어제의 바닐라가 양혼의 진심을 담은 한마디를 당황스럽게 받아친 것 처럼, 양혼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며 바닐라를 쳐다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공손히 오므린 바닐라의 손이 꼼지락대기 시작한다.

너 평상시에 나보고 맨날 그러잖아”

네? 그…어떤”

나 처럼 행동하는 사람 없을거라고”

분명 바닐라가 늘 하는 말 중에 하나였다. 기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확실히 보통의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 양혼에게 정말 잘 맞는 수식어 중에 하나였다.

남들이 어떻네, 남들이 뭐라고 하네, 그런거 신경 안써, 걱정하지마”

싱긋 웃는 양혼의 모습이 평상시의 철부지 같은 모습에서 왜 인지 어른이 된 것 같은 모습이다.

넌 너고, 난 나야. 그거면 충분해”

아침의 햇살이 양혼의 얼굴을 슥 비춘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닐라는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네 주인님”

이 사람은 진심이다.

 

평상시에 밖에 나가지 않는, 나갈때도 가벼운 옷차림을 선호하는 그가 정말 오랜만에 양복을 꺼낸다. 짙은 청색의 양복은 잘 입지는 않지만 언제나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다. 셔츠에 짙은 청색 양복, 그리고 보라색의 넥타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괴하다고 할 만한 패션센스였다. 그래도 햇빛에 비춰진 양혼의 모습은 꽤나 태가 사는 모습이었다.

옷걸이에서 바닐라의 여성용 양복도 하나 꺼내어준다. 체구가 작은 바닐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며 늘상 입던 연분홍의 후드티와 청바지, 가끔 치마를 입는 것을 선호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입어야했다.

가족을 만나러 가는게 이렇게 무거운 마음이 드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미 결심을 굳힌 양혼이었지만, 그래도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진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왜 결혼하냐고 손가락질 해도 무시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가족이라면 그 마음을 뒤집지는 못 할지라도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두고두고 생각나게 할 만한 아픔 정도는 될 테니 말이다.

괜시리 바닐라와 함께 한참 남은 신혼여행지나 드레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점심을 먹고, 해가 정오의 밝은 분위기에서 오후의 차분한 분위기로 내려올 때 까지 기다렸다.

자신의 부모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닐라의 이야기도 갈 때마다 많이 해두었다. 바이오로이드를 그렇게까지 증오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최소한 그는 정말 좋은 일자리를 얻은 사람이었고, 바이오로이드의 도움을 많이 받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집에 가는 걸 망설였던 이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자신의 부모도 사회와 똑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양혼의 발걸음을 가장 무겁게 만들었다.

친가가 있는 인천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한 시간이면 널널하게 도착할 거리였다. 막상 출발하면 얼마 걸리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참 그 한 걸음을 떼기가 어렵다.

결국 차를 타고 출발을 했을 때는 노을이 질락 말락 한 5시가 되어서였다.

혹시 걱정하시는 겁니까?”

운전석에 앉아 창가에 비치는 한강다리를 보고있는 양혼에게 바닐라가 한 마디 한다.

응?”

그…가족이란 분들이 반대할까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왜, 우리 가족이 반대하면 너한테 헤어지자고 할까봐?”

창문을 열고 달린 탓에 앞머리가 뒤로 휙 넘어간 양혼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차분하게 말한다.

이젠 그런 건 괜찮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믿으니까요”

나도 그래”

괜히 각 잡느라 집에서 나올 때 꽉 조였던 넥타이를 조금 헐겁게 푸른다.

허락 받으러 가는거 아니야, 최소한 자식놈 결혼한다는데 알리긴 해야하니까 가는거지”

그래 허락을 받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는 부모님을 알고 있었으니까, 바닐라가 자신을 믿는 것 처럼, 그도 그의 부모를 믿고 있었다.

해는 참 높이도 떠있다 금방 떨어진다.

여기, 거기입니까?”

아”

외곽순환도로를 내려 인천과 부천의 경계에서 인천으로 넘어 온 순간이었다. 공원을 지나 멀쩡히 서있는 삼안의 바이오로이드 판매소가 보인다.

그래, 낮인데도 비를 뿌리는 먹구름이 겹겹이 깔려 밤처럼 보이던 그 날, 그 장소였다.

길거리에서 누구인지도 모를 남자들에게 윤간당하던 바닐라를 데려온 그 장소였다. 자동주행이라 속도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이 괜히 야속하게 느껴진다.

손 잡아주시겠습니까?”

조수석에 앉아 왼손을 건네는 바닐라의 손을 조용히 잡아준다. 몸은 잊은 그날의 기억을 마음은 잊지 못했는지 마음의 떨림이 느껴진다.

그래봐야 코너 한 칸, 길게 느껴져도 금방 지나간다.

뭔가 따뜻해보이는 동네네요. 오래된 것 같지만”

저기야”

어릴때부터 봐온 정말 오래된 붉은 벽돌의 큰 교회를 지나자 낡은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저 분홍색 건물들 입니까?”

5층 짜리의 낮은 아파트는 무식하게 밝고 연한 분홍색과 살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서울에서 봐왔던 현대적인 모습에 익숙해져있던 그녀는 벌써 구성된지 60년은 되어가는 오래된 도시의 풍경이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그, 예빈 아가씨 집 갔을 때 느낌이네요”

거기보단 그래도 신식이지만”

오십보백보의 풍경이었다. 요즘은 볼 수 없어진 전신주에 전선이 검게 늘어진 풍경, 집 앞에 있던 고물상까지 그대로였다.

잠깐 주차 될 때 까지 안에 있어”

아파트 두 동 사이에 흰 선으로 주차구역을 표시한 칸 아무데나 차를 주차시킨다. 먼저 내린 양혼이 고물상에 들어가 누구와 인사를 하는게 보인다.

야, 때깔 좋아졌다 너”

여긴 그대로네요”

뭐 바뀔게 있어야지”

고물상 주인과 인사를 가볍게 하고 바닐라를 데리러 간다.

낡은 아파트의 초라한 흙밭에 박힌 가로등이 환히 밝혀진다. 돌아보니 고물상쪽은 아직 주황빛인데 하늘은 벌써 남색이다.

가자”

가죠, 주인님”

한 달 전에 왔을때만 해도 층계에 설치된 주황색의 조명이 꽤 어두웠는데, 흰색의 밝은 전구로 바꾼 걸 보니 아버지가 또 뭘 설치한 듯 했다.

짙은색의 계단과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낸 벽을 지나쳐 2층까지

밝은 옥색의 문 앞에 서서 양혼은 잠깐 숨을 몰아쉰다. 바닐라가 그의 팔을 꼭 끌어안는다.

붉은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삐리릭 하는 익숙한 소리가 왜 인지 오늘따라 긴장되게 느껴진다.

나 왔어”

짧은 한마디에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내민다.


바닐라 이야기 5편을 쓰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건

내 느낌을 최대한 살려보자 하는거임

뭔가 극적인 사건은 없는 대신 적당히 평화로운 상황에서 등장인물의 생각과 대사에 집중하려고 함

거기에 내 나름의 달달한 감성을 좀 더 넣어보고싶단거 정도


작 중 나오는 낡은 아파트는 현실에 있는 곳인데


실제론 곧 재개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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