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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정리글


이 글은 바닐라 이야기 이전편과 예쁜 인형 아가씨, 소년의 불꽃 등을 보고 오면 좀 더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님 말고


-주인의 방-

나가”

평소라면 그냥 바닥에서 자라고 할 위인이었지만, 그래도 형이라는 사람이 결혼을 한다며 바이오로이드까지 들고왔으니, 방을 점령하기에도 껄끄러웠다. 양혼의 동생이 베개와 이불을 챙겨들고 거실로 나간다. 침대는 하나 뿐이지만, 그가 이사를 가기 전에 사둔 것이라 사이즈는 넉넉하다.

조금 둘러봐도 됩니까?”

맘대로 해, 내 짐은 딱히 없지만”

양혼의 말대로 이미 그의 짐은 다 빼둔 상태였다. 대부분은 대학 서적, 그나마도 그의 것과 그의 동생 것이 반반이었고 나머지는 그의 동생 옷이 들어찬 옷장 뿐이었다.

양복 괜히 입었나봐”

주인님이 차려입을 스타일은 아니긴 하죠”

갑갑한 양복 겉옷과 목 끝까지 채운 와이셔츠 단추를 푸르고는 컴퓨터 의자에 걸어놓는다. 옷장에 마주보는 작은 서랍장에서 널널한 사이즈의 면티와 면 반바지를 꺼내 입는다. 이제서야 평소의 주인의 모습이 다시 나온다.

여긴 원래 주인님 방이었습니까?”

동생이랑 같이 쓰던거지 뭐, 지금은 저 놈 방이지만”

익숙하게 침대에 드러눕는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 빙그르 돌며 방을 한 바퀴 구경하던 바닐라의 눈에 재미있는 것이 들어온다.

저거 봐도 됩니까?”

응?”

높은 책장 끝에 꽂혀있는 두꺼운 표지의 책들, 다른 책들과는 확연히 달라보이는 겉 표지와 책 등, 금색으로 칠해진 글자는 비범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 졸업앨범?”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앨범은 사셨습니까? 대학교 졸업앨범은 안사셨잖습니까”

대학교를 졸업할 때는 이미 바닐라와 같이 살던 시기였다. 앨범이나 추억에 대한 가치를 잘 모르던 바닐라는 주인이 졸업앨범을 사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를 그때는 잘 알지 못했지만, 날이 지나고 주인과 찍은 사진을 거실 전자액자에 걸어놓은 지금은 나름 추억이 될 만한 앨범을 사지 않은 것을 조금 아까워 하고 있었다.

대학교는 수업 들은 거 말고 한게 없는데…고등학교도 사실 안사도 별 지장은 없었지만”

몇 반 이었습니까?”

“2반”

책상에 자리를 잡고 두꺼운 종이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친구중에 연락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딱히? 아주 없진 않지만 요즘은 못만나지”

그때도 친구 없었습니까?”

대학생 아싸는 고딩때도 찐따일 확률이 높거든…나도 뭐…그런 부류였고”

2반의 인원들을 하나씩 찾아본다. 가나다 순으로 정리된 사진들에서 양혼의 사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보다는 조금 단정해보이는 머리와 조금 앳되보이는 것 빼면 크게 다르지 않다. 묘한 이질감에 바닐라는 피식 하고 웃어버린다.

주인님 인기 없었습니까?”

원래 잘 웃고 다니면 만만하게 보나봐”

주인님은 착한 분이니까요”

그 말도 지긋지긋하게 들었었지”

양혼은 이제와서 굳이 과거를 증오할 생각은 없었다. 바닐라도 별 것 아닌듯 이야기하는 주인의 모습에 그다지 심각함을 느끼지 않는다.

주제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전 주인님의 과거가 어떻든 지금의 주인님이 좋습니다”

오냐”

앨범에서 그다지 재미있는 것을 찾지 못한 바닐라가 앨범을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다.

옷 줄까? 내꺼긴 하지만”

됐습니다”

바닐라가 불을 끄고 속옷만 입은 채로 침대 위로 올라온다. 어두워진 방 안에 주광등의 무드등을 켠다. 주변이 노을색으로 확 밝아진다.

평소에도 같은 침대를 쓰지만, 이사 오기 전 집에서 이렇게 둘이 누워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여행의 작은 모텔방에 들어온 것 같은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다.

여기선 하면 침대 삐그덕 거리는 소리 나서 안된다”

뭘 말입니까?”

섹스”

미쳤습니까?”

낮게 쏘아붙이는 바닐라의 모습을 보며 양혼이 실실 웃는다. 로맨틱한 분위기가 어떻게 하루를 못 가는지, 바닐라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훤히 보인다.

딱 하루만이라도 분위기를 즐길 생각은 안하시는겁니까?”

이게 원래 내 모습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하여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바닐라는 양혼 쪽으로 좀 더 안긴다. 싱글싱글 웃는 양혼이 바닐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주인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

대학교나, 고등학교 때 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까?”

바닐라의 질문에 양혼은 생각을 위한 짧은 시간을 가진다.

뭐 남들은 학창시절로 돌아간다고 하면 좋겠다고 하지만…난 굳이 안 갈거같아”

지금이 더 좋단 말씀입니까?”

응”

그다지 유쾌한 학창시절은 아니었다. 무시당하거나 얕보이고, 대학에 와서는 멀리서는 잘 보이지만 가까이서는 보이지 않는 그런 이상한 존재감을 유지했으니 말이다. 8평짜리 방에 살 때도, 삼안의 직원용 임대 주택에 살 때도 그는 집에 있는 시간을 사랑했다. 집에 있을때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고등학생때는 뭔가…울기도 많이 울고, 세상에 한탄도 많이 하고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안그러잖아?”

바닐라는 자신의 주인이 우는 모습이 상상이 안간다. 아마 오리진더스트로 수술을 받고 자신이 일어났을 때 말고 주인이 운 것은 기억에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무서워서던 슬퍼서던, 주인의 앞에서 운 적이 꽤나 많았다.

주인님이 웁니까?”

그땐 그랬어, 뭔가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고, 아무도 내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고, 나만 피해보는 것 같았지. 사실 그게 맞았고”

바닐라는 조용히 양혼의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의 주인에게서 볼 수 없었던 일면을, 주인은 일부러 숨겼던 걸까, 드러낼 일이 없었던 걸까, 그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대학에서도 뭔가 바뀐건 없었어, 아는 애들은 많았지만 딱 그 수준이었지, 예빈이도 딱 그정도의 수준이었고”

별 일 아니라는 듯 털어놓지만 바닐라는 왜인지 주인이 애틋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면 지금이 더 행복한 이유가…”

양혼의 품에 쏙 안긴 바닐라가 그를 올려다본다. 무드등을 등지고 누운 그녀의 얼굴엔 그림자가 졌지만 표정을 못 볼만큼 어둡지는 않았다. 바닐라는 특유의 무표정과 함께 나지막이 한 마디 속삭인다.

제가 있어서 입니까?”

양혼은 바닐라의 모습을 보고 그녀를 확 끌어안는다. 답답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그럼…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넌 나한테 훨씬 큰 존재야. 무슨 일을 하던 너가 없었으면 내 삶의 가치도 없었겠지. 넌 나한테 그런 존재야. 내 삶의 원동력이고, 이유 그 자체야. 그래서 너가 있어서부터 행복해진거고”

담담히 자신의 속내를 고백하는 모습에 바닐라는 말이 없어진다. 사랑한단 사실을, 굳이 서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이 싫지 않다.

불 끄겠습니다”

굳이 대답을 하지 않고 무드등의 전원을 끈다. 이상한 가구배치에 블라인드를 내릴 수 없게 된 창에서 바깥의 밤빛이 조금 들어온다.

 

눈을 먼저 뜬 것은 바닐라였다. 평소의 잠자리와는 달랐으니까, 눈이 빨리 떠지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직은 어두운 게 아침은 아닌 듯 했다.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새벽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따끈하게 데워진 몸에 한기가 찾아든다. 어깨를 움츠린 바닐라가 다시 이불 안으로 몸을 파고든다. 옆으로 스르르 누운 순간 주인이 눈을 확 뜬다.

아,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몇시지…”

“4시 58분입니다”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 앉은채로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양혼을 보며 바닐라도 자연스레 몸을 다시 일으켜 앉는다. 눈만 몇 번 끔뻑이던 양혼이 대뜸 몸을 일으킨다.

나가자, 옷 입어”

네?”

새벽 다섯시에 대뜸 나가자는 소리를 하는 주인이 이상하게 보이지만, 갑자기 일어나서는 입고 온 양복을 다시 챙겨입는 모습에 바닐라도 일단은 자신의 옷을 챙겨입는다.

거실에서 그의 동생과 모친이 잠을 자고 있었지만 살금살금 걸어나간다.

뭐야…가?”

아, 깼어?”

성인 둘이 걸어나가는데 어지간히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눈치채는 것이 당연했다.

어…이것저것 해야할 것도 많아서, 자 그냥”

또 데리고 와”

아, 그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딱히 인사를 하지는 않는 양혼과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바닐라의 모습이 대비된다. 문을 열자 아직은 쌀쌀한 새벽공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런데, 굳이 새벽에 가야합니까?”

아니, 따라와봐”

주차된 차를 지나쳐 양혼이 어딘가로 걸어간다. 몇 대의 차를 지나쳐, 관리가 안돼 잡초가 무릎 높이까지 자란 놀이터가 보인다. 낡은 놀이기구들이 보이지 않았으면 놀이터인 줄도 몰랐을 것이 분명했다.

어릴땐 이 턱에서 넘어져서 울고 그랬는데”

정강이의 반 밖에 안오는 작은 턱이 있었다. 양혼이 자연스레 그 위에 걸터앉는다.

바닐라도 그의 옆에 앉는다. 마주보고 있는 5층짜리 낡은 아파트가 그녀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한다.

새벽에 여기서 보는 하늘이 진짜 이쁘거든”

양혼이 씩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낮은 아파트 사이로 푸른색의 하늘이 길처럼 열린다. 해가 스멀스멀 뜨기 시작한 부분은 연한 파랑으로 아직 밤이 자리잡은 곳은 짙은 남색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과 아직 빛을 잃지 않은 별이 만드는 하늘길은 괜히 옛 사람들이 은하수를 다리로 표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쁘지?”

양혼이 평소에 이런 감성을 잘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바닐라는 이 작은 이벤트를 온전히 자신을 위해 준비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확실히 이쁘긴 이쁘다. 낡은 아파트 두 동이 명소의 절경이 부럽지 않을 장소로 탈바꿈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사실 지금 반지를 주면 딱 어울릴 것 같긴 한데…아직 반지가 없네”

천천히 받으면 되죠”

새벽에 뜬금없이 깨자마자 이런 스팟을 생각해낸 주인을 굳이 이 시점에서 타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5분정도 풍경을 감상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침이 찾아오는 속도는 야속하리만치 빠르다.



그림을 좀 잘그리면 쟤랑 바닐라랑 같이 있는 그림 같은 걸 그려서 표지로 만들어볼텐데

내 능력 밖이야


근 10년만에 행복한 커플 이야기를 쓰는데

몸속의 배드엔딩 유전자가 막 날뛰는 느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