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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바닐라 이야기 이전편과 예쁜 인형 아가씨, 소년의 불꽃 등을 보고 오면 좀 더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님 말고



-일평생 단 한 번 입을 옷-

하루의 휴가를 쓰고 새벽의 도로를 질주해 집에 돌아온 그는 다시 평소처럼 일에 빠진다. 삼안 기획의 말단이라곤 해도 업무의 특성 탓에 생활화 된 2058년 직장인의 흔한 풍경이었다. 얼핏 밖에서 보기엔 평소와 같은 풍경처럼 보인다. 가끔 집안일을 하다가 식사를 준비하고, 주인과 간단한 이야기를 하는 바닐라와, 설렁설렁하듯 하지만 나름의 감각으로 컴퓨터 앞에서 일을 하는 양혼

하지만 집 안의 미묘한 기류가 변한 사실은 두 사람만이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나가자”

느슨한 오후의 햇빛이 흐려져 갈 때쯤 양혼이 방에서 걸어나온다.

또 말입니까?”

음…결혼식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분 정도는 내고 싶어서”

기분 말입니까?”

와보면 알아”

바닐라도 딱히 나가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양혼도 내심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결혼 하면 스드메를 위시한 준비과정을 즐긴다고들 하니까, 그리고 결혼식은 그 클라이맥스가 될 것이고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물론 그가 바이오로이드와의 결혼을 가볍게 여긴다거나, 바이오로이드 자체를 하대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이오로이드와의 결혼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었다. 가난한 자에게던 부자에게던 굳이 사회적으로 눈총받을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매도와 따가운 시선을 견딜만한 멘탈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요란한 사회단체마냥 광고를 뻥뻥 때리면서 바이오로이드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퍼포먼스성 쇼가 되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바닐라를 사랑할 뿐이었다.

뭔가, 엄청난 곳이네요”

평소에 물건을 사러 오는 대형마트나 가끔 기분전환 삼아 나오는 백화점과는 또 다른 기운, 마치 눈에 필터를 하나 더 씌운 것 같은 선명하고 밝은 매장, 웨딩샵이란 곳은 그런 곳이었다.

흰색 천지의 샵에서 유일하게 검은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있는 종업원 한 명이 그들에게 인사한다.

윤양혼으로 예약했는데요”

양혼에게는 살짝 부담되는 곳이긴 했다. 돈이라면야 취직한 그에게는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사회적인 인식이 그에게 하나의 관문처럼 작용한다. 상당한 이 고급 웨딩샵에는 자신 같은 사회초년생 애송이보다는 다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셀럽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럴 것 같아서 아예 예약을 해버렸지만 말이다.

드레스, 보고싶습니다”

어차피 직원은 자신에게 친절할 수 밖에 없기에 지금의 기분이 괜한 긴장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입이 가볍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전시된 드레스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디자이너의 이름과 실제 입었을때의 샘플이 스크린에 표시되고 있었다. 사실 양혼이 보기에는 다 거기서 거기인 예쁜 옷이지만 여자의 감각은 자신과 다를 게 분명했으니, 한 번쯤 찾아와보고 싶었다.

저 한테 잘 맞을지 모르겠네요”

왜?”

다들 예쁜 옷이긴 한데, 전 키가 작으니까 잘 안 어울릴 것 같습니다”

바닐라의 정신은 어른스러운 매력이 있었지만 사실 신체 자체는 엄청나게 성숙한 편은 아니었다. 키는 152cm에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정보는 아니지만 신체나이는 16살을 따왔다는 데이터도 삼안 기획의 말단인 그는 알고 있었다.

물론 포티아가 21살, 그 콘스탄챠가 자신과 같은 25살이라는 것을 보고 신체나이는 개소리라고 단정짓는 그였지만, 그래도 바닐라는 나름은 납득을 가는 신체나이의 설정이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볼 때 마다 보이는 흰 원단의 예술품들은 모두 최소 170cm는 넘을만한 장신의 모델들이 입을 것을 전제로 제작되어있었다.

바이오로이드는 왜 키를 작게 만드는지 모르겠단 말이지…저기 이 사이즈에 맞을 만한 드레스는 없을까요?”

사실 양혼도 주변의 드레스들이 썩 괜찮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갑갑한 걸 싫어하는 그와는 완전히 상극인 정적이고 정통적인 드레스의 디자인은 예쁘기는 하지만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여성분의 프로필과 사진을 저한테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그 분위기에 맞는 드레스를 매칭해드리겠습니다”

네?”

아, 바닐라 A1의 바이오로이드 프로필은 있으니까 미리 입력해둘게요”

자신의 태블릿으로 신체 프로필을 입력한 점원이 싱긋 웃으며 양혼을 바라본다.

요즘은 신부님의 샘플로 바이오로이드를 동행해서 데려오는 손님들이 많지만…코디네이터인 저로써는 역시 그 사람만이 갖고있는 분위기란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단순히 신체사이즈에만 맞춘 드레스를 입는 건…사실 그렇잖아요? 드레스라는 건 일생에 단 한 번 입을 옷인데, 사이즈에만 맞춘 옷을 입는다는 건 신부님에게도 기쁜 일은 아닐테니까요”

어…음”

코디네이터로써 자신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갖고있는 분위기란 게 있어요. 바이오로이드에는 그 분위기란게 없어서 사실 사이즈에만 맞출 수 없죠. 저는 그게 너무 아쉬워요. 모든 사람은 더 어울리는 옷을 입을…”

그만하시죠”

단순한 오해였다. 점원의 직업정신에서 나온 아쉬운듯한 푸념이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닐라를 단순한 마네킹 취급하는 그 모습은 왠지 조금 짜증이 났다.

네?”

얘가, 제 신부님입니다”

적은 사람, 손님과 종업원이라는 입장 차, 반박을 듣기 힘든 이 상황에서 낸 소심한 용기가 몰고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티는 안내지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바닐라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자신의 상식 선을 아득히 넘었기에 일 순간 이해하지 못하는 점원의 표정이 대비된다.

그리고 1초가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양혼의 말을 이해한 점원의 표정이 사색으로 변한다.

죄송합니다!”

2058년, 빈부격차가 커져감에 따라 상점들은 고급화를 택했고, 그만큼 손님들의 접대가 서비스업의 더더욱 큰 숙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 명의 손님이라도 기분나빠할 만한 일이 생긴다면, 그건 업장의 이미지에 큰 타격이 되는 일이었다.

바이오로이드는 그런 점에서도 인간보다 훨씬 큰 메리트가 있었지만 아직까진 인간을 사용하는 고급 업장도 많이 남아있었다.

온갖 고급 가문들의 결혼식을 어드바이스하고 드레스를 코디하던 점원 아가씨로써는 지금의 실수가 가슴에 칼이 박히는 아찔함으로 여겨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

아무것도 모르고 함부로 말을 해서…”

반사적으로 무릎까지 꿇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되려 양혼이 난처해진다. 사실 그도 바닐라도 별종의 커플인 것이 당연한데다, 양혼은 굳이 이런 것으로 사람을 갈굴만큼 자비없는 부유층도 아니었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점원이 곧 어나더 룸에서 몇 벌의 드레스를 챙겨온다. 바깥에서 보는 바닐라의 이미지는 어떨지, 그리고 그 이미지에 맞는 옷은 어떨지, 양혼은 살짝 설레기도 했다.

저는 치마가 좀 짧은 게 좋습니다”

왜?”

그 편이 움직이기도 편하고, 뭔가 너무 큰 옷은 속박되는 것 같아서 별로입니다”

하긴, 나도 저런 옷은 좀 그래”

옷을 기다리는 동안 앉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쇼파에 앉아있는 둘이 주변 옷들을 보며 여러 품평을 한다. 옷의 전문가는 아닌 양혼이 이래저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느낌으로는 조금은 올드한 어른들의 취향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바닐라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뭡니까?”

그 말투는 어떻게 안되는거야?”

사귀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미묘한 목소리, 딱딱 끊어지고 대부분이 ‘다’ 로 끝나는 사무적인 스타일, 거기에 애교라고는 잘 없는 말투까지, 바닐라 A1 모델은 일부러 상위기체인 콘스탄챠 S1이나 개량형인 콘스탄챠 S2의 구매를 유도한 것 아니냐는 극단적인 평가가 나올 정도로 언어 모듈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다. 물론 대중화를 염두해서 가격을 낮추기 위해 다양한 감정을 담을 수 없는 값 싼 언어모듈을 채택한 것이지만, 애초에 바이오로이드를 살 만한 사람이라면 염가형을 살 만큼 가난한 사람이 별로 없단 것이 문제였다.

언어모듈이라곤 해도 사람인 만큼 교육과 생활로써 말투를 변화시킬 수는 있다지만, 바이오로이드는 소모품인데 누가 굳이 그렇게 세팅된 모듈을 바꿔가면서 쓰겠는가

혹시 이 말투가 싫으십니까?”

싫은 건 아닌데, 뭐랄까 우리끼린 상관없지만 딴 사람들이 봤을 땐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인 것 같아서”

바닐라의 차가운 말투가 그녀의 본심까지 대변하진 않는 다는 것쯤, 양혼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점원이 너무도 당연하게 양혼과 바닐라의 관계를 단순한 주인과 도구와의 관계로 봤단 것은, 그녀의 기본 상식의 틀이 그 안에 있기도 했겠지만, 양혼과 바닐라의 관계의 겉모습이 미세한 틈마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양혼은 혼자 생각한다.

뭐…남의 시선 따위 별로 중요하진 않으니까”

옷 준비됐습니다!”

사람의 정석적인 모습을 한꺼풀 벗겨내자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웨딩샵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점원 아가씨가 행거에 여러벌의 드레스를 걸고는 둘 앞에 나타난다.

신부님께서 저 쪽의 피팅룸에서 한 벌씩 입어보시겠어요?”

아, 네”

천천히 입어봐, 네 맘에 가장 드는거로 고르고”

네, 주인님”

밝은 금색으로 칠해진 테두리의 안쪽은 얼핏 보기에는 3면이 모두 거울인 한 방이었다. 흰색의 레이스 커튼을 바닐라가 치자, 점원이 안쪽으로 드레스 행거를 밀어넣어준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죠?”

네, 옷도 여러 벌이고 드레스를 입고 느낌을 보고 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릴거니까요…식사 준비해드릴까요?”

아뇨”

2058년, 요즘은 어느 곳에서나 고급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양혼은 이런 곳에서의 식사를 굳이 선호하지는 않았다. 비싸고, 특히나 지금은 옷을 입고 있을 바닐라에게 냄새나 소리 따위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양혼의 말에 타블렛을 한참 조작하고 있던 점원이 그를 다시 쳐다본다. 순수하지 않은 인간인 자신과는 다르게 어느 면에서던 일반적인 인간에 가까운 점원의 모습을 보며 양혼은 자신의 가슴에 묻어만 두려고 했던 두려운 질문을 꺼낸다.

바이오로이드랑 결혼하는 사람…흔치않죠?”


사실 팬픽을 쓰면서 분량과 호흡을 좀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보통 한 편에 한 장면을 3천자 내외로 쓰고 싶은데

바닐라 이야기는 쓰다보면 재밌어져서 나도 모르게 분량이 늘어나버린다.

바닐라 이야기는 조금 더 길어질 거같음, 글의 주제를 잃지 않고싶은데 일단 쓰는게 재밌어서


문제는 이 이후에 내 글의 주인공을 양혼과 바닐라에서 다른 캐릭터로 옮기려는데 그게 너무 자캐딸 + 긴 호흡으로 갈 거 같아서

여러모로 고민이 되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