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어느 주말 낮,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났다. 침대에 누워 있던 블랙 리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방문객은 허락을 받는 법도 없이 불쑥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야. 스토커. 누가 들어 오래?"


"언젠 허락 받고 들어왔다고."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리리스는 스스럼없이 시저스 리제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둘은 서로가 스토커니 해충이니 하고 불러 대면서도, 심심하면 서로의 숙소에 놀러 가곤 하는 사이였다.


"뭐 해?"


"그냥 쉬었지."


"휴가인가 보네. 주인님 스토킹, 아니, 곁에 안 있고."


리리스는 오르카호 사령관이자 그녀의 주인인 남자의 경호 실장으로서, 남자의 곁을 가장 오래, 자주 지키고는 했다.


"그래. 아무리 나라도 매일 매일 경호하는 건 무리니까. 주인님도 이해해 주신거지."


"이해한 게 아니라 떼어 놓으려는 거 아니야?"


"죽을래?"


리제는 킥 웃으며 쿠키를 내밀었다. 그러자 리리스도 우유병을 꺼내 와서 건네며 곁에 앉았다.


"뭐, 아무리 내가 주인님의 정실 부인이라도, 매번 근처에 있으면 질리실 수도 있고. 동생들한테도 기회를 줘야지."


"뭐? 정신을 실성한 부인이라고?"


"시비 걸려고 왔으면 나가."


깔깔거린 리제는 우유를 한모금 마시더니, 문득 표정을 고치고 노트용 태블릿을 내밀었다.


리리스가 뭐냐는 눈으로 리제를 보았다.


"……."


리제의 능청맞은 태도는 금방 사라져서, 어쩐지 남자 앞에 섰던 때 마냥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뒤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거, 내가 쓴 건데. 좀 읽어 봐."


"어?"


리리스가 태블릿을 켜 보니, 뜻밖에도 화면에 단편 소설이 떠 있었다. 그녀는 다소 놀란 얼굴로 리제를 바라보았다.


리제는 리리스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뭐야…… 그 눈은."


"아니, 스토커 네가 글도 다 쓴다 싶어서."


"아이, 씨. 누굴 바보로 알아?"


"응."


"……아쿠아나 레아 언니한테는 보여줬지만, 역시 제3자가 보면 어떨까 싶어서 가져온 거야. 보기 싫으면 내놔."


리리스는 그제야 수긍하고는 조용히 태블릿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여분 후, 그녀는 글을 읽은 뒤에도 말없이 앉아 턱을 만지고 있었다.


리제가 조바심을 비쳤다.


"어때? 역시 좀 이상하지 않아?"


리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재밌었어."


"어?"


"생각 외로 잘 썼는데? 너 몰래 글쓰는 법 배우기라도 한 거야?"


리제는 눈을 깜박이며 다급히 물었다.


"너,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지금?"


"놀리긴 왜 놀려."


오히려 리제가 더 믿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리리스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진짜 진짜로 안 이상해?"


"안 이상하다니까? 나참.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 옛날엔 천방지축으로 싸움 걸고 살더니만."


리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렇지만. 제대로 쓴 건 이번이 처음이고."


"제대로 쓴 거라고 하는 거 보니 그간 연습 좀 했나 보네…… 아무튼 재밌게 잘 봤어. 옛날 인간들 소설하고 별로 다를 바도 없고. 이건 진담이야."


리리스는 순수하게 감탄한 얼굴로 리제를 보았다. 칭찬을 받으리라 생각도 못한 리제는 기쁨 반 부끄러움 반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던 리리스의 얼굴에 문득 장난기가 어렸다.


"좋아. 그럼 우리 스토커도 이 기회에 문단에 데뷔시켜 줘야겠지?"


리제가 깜짝 놀랐다.


"뭐? 그게 뭔 소리야?"


"네 소설, 오르카호 인트라넷에 올리려고."


"야, 안돼! 이리 줘."


리제는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태블릿을 빼앗으려 들었지만, 리리스의 손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리리스는 총알을 잡아채는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둘은 순발력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이 해충! 역시 날 놀리려고 한 거였어! 잘 썼단 말도 거짓말이지?"


"놀리긴 무슨. 네 실력을 알리고 싶어서 그래."


"됐어!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부끄러우니까."


"그냥 공유하려는 것 뿐이라고."


"이리 달라니까?"


둘은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리제는 약이 오르고 부끄럽기도 해서 필사적으로 달려들었고, 리리스도 계속 피하느라 글을 올릴 수가 없었다.


실랑이 끝에 둘은 결국 두 손들고 타협하기에 이르렀다.


"아휴. 알았어. 그럼 익명으로 올릴게. 그럼 되잖아?"


"익명?"


"응. ㅇㅇ으로 써서 누가 올렸는지 너랑 나만 알면 되는 거지."


그러자, 리제는 생각에 빠져 있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가 쓴 걸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얼씨구. 어느 쪽이야."


이름을 완전히 드러내긴 부끄럽다는 리제의 의견에 따라서, 리리스는 결국 리제의 소설을 '가위'라는 닉네임으로 올렸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다. 리리스는 아침부터 몸 단장을 깔끔히 마친 다음 경호에 나섰다.


"주인님. 좋은 아침이에요."


"으응."


남자는 리리스를 옆에 데리고 오르카호 사령실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과의 시작이었다. 그는 오르카호 부대에 필요한 일을 처리하고, 긴급사안이나 전투가 일어나면 지휘를 맡고, 종종 바이오로이드들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에겐 지구의 마지막 인간으로서 할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오전부터 그는 어딘가 불편한 눈치였다.


"권속- 이번에 짐이 프라모델 자작해 왔는데 한번 보겠느뇨?"


오르카호의 어린이인 LRL이 프라모델을 자랑하러 찾아왔다.


"아. 잘 만들었구나……."


"그렇지? 이것 봐봐. 짐이 여러가지 기믹을 만들었다고. 아자즈가 많이 도와줬노라."


LRL은 신이 나서 떠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확실히 그녀의 자작 프라모델은 불빛도 나고 스스로 걷기도 하는 등 범상치 않은 데가 있었다.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제법 뛰어난 솜씨였다.


그런데 남자는 별로 감흥 없이 프라모델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기, LRL.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야. 나중에 구경 갈게."


"응? ……으응. 알겠노라."


눈치 빠른 LRL은 남자가 어쩐지 시큰둥하단 걸 깨닫고 순순히 물러났다. 무슨 일이 있어선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좋아하는 그를 거슬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리리스도 고개를 갸웃했다. 바쁜 일은 커녕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인데, 평소의 남자와 다른 태도가 아닌가.


남자는 이날 다른 대원들의 일 역시 관심이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인간이 모두 죽어서 일부다처제와 문어발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해도, 그녀들의 구애는 오직 남자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바이오로이드가 그의 명령에 거역할 수 없는 탓이었다.


덕분에 남자에게 추파를 던지러 온 바이오로이드 대원들도 LRL마냥 그의 시원찮은 반응을 보고 무안해서 물러서곤 했다.


"나 참. 오늘은 좀 시원찮으시네요. 설마 발기부전은 아니실 테고…… 재미 없으니 다음에 올 거예요."


"폐하. 레이디를 두고 딴청 피우시는 건 기사도가 아니지요?"


밝히는 앨리스와 샬럿도 남자의 건성인 태도에 불만을 표할 지경이었다.


결국 대원들이 물러가고 사령실이 조용해질 무렵, 단둘이 남은 자리에서 리리스가 말을 꺼냈다. 경호 중에는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지금은 남자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주인님. 혹시 신경 쓰시는 일 있으세요?"


"응? 아니야…… 별로."


누가 보아도 신경이 쓰인다는 표정이어서 리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리리스한테도 알려주세요. 저희끼린 솔직해 지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남자는 말문이 막혀서 리리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독심술도 하는 그녀를 속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리스, 내 취미가 글쓰기잖아?"


"그렇지요."


남자는 익명으로 오르카호의 인트라넷에 소설을 올리는 은밀한 취미가 있었다. 일전에 리리스가 남자의 방을 청소하다 들통난 사실이었다.


그가 주저하며 말을 이어갔다.


"실은 말야, 어제…… 어떤 녀석이 쓴 소설이 내 연재소설보다 더 인기가 많은 걸 봤거든. 그래서……."


남자가 부끄러운 나머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리리스가 대신 받았다.


"질투가 나셨던 건가요?"


"응."


남자는 머리를 긁었다.


리리스가 그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아아. 전 또 뭐라고…… 주인님께서 큰 일이 나신 줄 알고 걱정했다고요."


"그래. 리리스가 보기에도 쪼잔하지?"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그나저나, 주인님껜 그 취미가 차지하시는 비중이 생각보다 크셨던 거네요. 질투심 때문에 계속 화가 나셨을 정도면."


"아, 그게 말이야. 실은 그거 때문이라기보단……나 자신이 미워서 그랬어."


"네?"


"확실히, 그 가위라는 익명이 나보다 잘쓰고 내 인기를 뺏어가서 질투가 났거든, 좀. 그걸 깨닫고 보니 부끄럽지 뭐야."


남자가 미안한 듯이 말했다.


"내가 너무 오만했어. 너희들한테는 무슨 성인이나 포용력 있는 녀석처럼 훈계하고 떠들어 댔으면서, 고작 이런 정도로 남을 시기하고 질투했다는 게 말이야. 그런 나한테 혐오감이 들었던 거지."


"……."


"그 익명 가위가 누군지는 몰라도 어떤 의미로는 좋은 걸 가르쳐준 셈이야. 잊고 있었어. 난 무슨 성숙한 인간도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저 너희를 좋아하는 미숙한 남자일 뿐이란 걸."


남자로선 드물게 사소한 일로 삐진 자신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언제나 바이오로이드한테 둘러싸여서, 그녀들을 명령하고 달래 주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들던 오랜 열등감의 발로일지도 몰랐다.


자기혐오와 씁쓸함을 씹던 남자의 손등에, 문득 리리스의 손길이 겹쳐졌다. 눈을 들어보자 그녀가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주인님."


리리스가 자상하게 말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하는 것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니까. 질투심은 가질 수 있는 법이잖아요? 그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만 않으면 되죠. 전에, 주인님께서 제게 알려주신 것처럼요."


"……응. 그랬지. 나참, 가르쳐 놓고도 이러다니……." 남자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실은, 리리스도 여전히 질투심 같은 건 있다고요. 그래서 그런 거 때문에 자책하기도 하고요."


그녀는 질투심이 많은 편이었지만, 남자를 위해서는 그런 것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 리리스가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것도 알고 있어. 나도 마음을 고쳐 먹어야겠지."


"네. 뭣보다, 원래 주인님께선 소설 쓰기만이 아니더라도 다른 잘하는 게 많으시잖아요? 일테면 전투 지휘가 우리 지휘관들 못지 않으시고요."


남자가 새삼 얼굴을 붉혔다. "그건……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뭣보다, 저희 모두를 사이 좋게 만들고 마음속에서 복종하게 만드는 건 주인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 걸."


리리스가 웃었다.


"후훗. 충분히 대단한 거예요. 사람들을 이끈다는 건 말이에요. ……사실, 주인님께서 부러워한 글을 쓴 아이도, 자기 글 재능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고요."


남자가 눈을 들었다.


"잠깐만. 뭔가 묵과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리리스는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


"리리스. 혹시 그 글을 쓴 사람…… 가위라는 닉네임이 누군지 알아?"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글쓴이가 누구인지 조용히 알려 주었다.


그녀에게서 글을 쓴 익명이 바로 리제라는 것을 알게 된 남자는 입을 벌렸다.


"아니, 리제한테 그런 재능이 있었다고?"


"재능일지도 모르고, 남몰래 노력한 걸지도 몰라요."


남자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리제에게 검술이나 달리기 말고도 그런 자질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자신이 귀엽게 여기는 리제가 그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풀리는 것이었다.


만들어진 인간인 바이오로이드에게도 각자 숨겨진 잠재성이 있으리라 믿었던 그의 생각이 증명되서일까. 


남자가 얼굴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 리리스도 내심 미소지었다.


그 익명이 누군지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남자와 그녀의 친구가 기뻐할 것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승부는 공정해야 하는 법이야.


리리스로서는 큰 양보를 한 셈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흐뭇해졌다.


물론 남자 역시 마음을 고쳐먹고 남은 일과를 즐겁게 끝낼 수 있었다.


이번엔, 그를 달래준 리리스 뿐만 아니라 좋은 글을 써준 리제에게도 보답해 주어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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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니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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