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내 이야기를 하기전에 확실하게 얘기한다. 이것은 '텍스트 게임'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이유는 이런 이야기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커뮤니티에 잘 어울린다는 적절한 변명과 이곳이라면 이런 글이라도 받아들여줄 것이라는 나지막한 희망에서 기반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안타깝게도 이런 이야기를 할 지인이나 연인, 친구는 나에게 없다.


나는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어떠한 것'을 쫓고있다.

이 '어떠한 것'은 내가 감히 짐작컨데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하나씩 주어진다. 다만 그것은 주어진다는 사실만이 공평할 뿐 실제로 그것을 찾을 방도나 실체를 밝혀내는 데에 걸리는 난이도는 전혀 공평하지 않다. 그 '어떠한 것'은 세상에 둘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연인이 될 수도, 꿈속에서 막연하게 그려진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풍경도, 단순하게는 그저 어떠한 직업이 될 수 있다. 중요한것은 '어떠한 것'이 그 소유자 본인에게는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것'은 단어로 표현하면 '연인', '진로', '꿈', '그림', '글', '행복' 등 무수한 형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물론 부정적인 형태의 '어떠한 것' 또한 존재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어떠한 것'이라고 표현하는게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애매모호하고 정립하기 어려우며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리고 이 '어떠한 것'은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마치 끌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알람시계처럼. 나는 실제로 '어떠한 것'을 한번 잃어버렸다고 느낀적이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찾기를 포기한 순간, 거짓말처럼 그 '어떠한 것'은 나에게 돌아왔다. 그 때 비로소 나는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게 '어떠한 것'이라고 생각했던건 나의 소유욕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과거 나의 '어떠한 것'은 꿈속에서 본 아련하고도 그리운,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하나의 풍경이었다. 그 '어떠한 것'은 나에게 그림이라는 수단을 갈망하게 만들었고, 내가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혼란에 휩싸였다. '어떠한 것'은 더이상 나에게 어떠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떠한 것'을 갈망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그것과 같은 이유로 '어떠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린것은 한참 나중의 일인지라 당시에는 그저 '누구에게나 있는 어린시절의 꿈이 바뀌는 그러한 것'으로 해석하고 결론지었다. 그 다음으로 찾았다고 생각한 '어떠한 것'은 의외로 평범하게 다른이를 울리고 웃기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글은 나 스스로 글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 그만두면서 '어떠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떠한 것'은 분명 '꿈'이나 '진로'를 포함하지만 같은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다음 나에게 '어떠한 것'은 세상에서 단 한명 나를 바라고 나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직시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맞부딛혀 이상한것을 갈망하게 되는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 상황이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것도 역시나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물었을 때를 대비한 '대답'을 만들었다.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좋은일이 생긴다. 

내가 죽으면 누군가 슬퍼한다.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형편 좋은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죽어서 슬퍼하는 사람이 아닌 '자식'이 죽어 슬퍼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다른 대답을 만들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아니면 안되는 [나]를 필요로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니 그 [누군가]를 위해 살자' 라는 망상은 곧 나의 '어떠한 것'이 되었다. 나는 이것을 정말 훌륭한 대답이라고 굳게 믿고있었다.

나는 기적이나 운명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을 말로 표현한다면 기적이나 운명 말고는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 [누군가]는 분명히 있었다. 그녀는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나는 우연찮게도 그녀의 곁에 있어주는게 가능했다. 내가 만들어낸 '대답'을 멋들어지게 증명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나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변명'을 만든것이지 '살아가야할 이유'를 찾은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녀를 위해 살고싶다'는 생각보다 '죽고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고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역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내]가 필요한 이유를 막무가내로 묻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면 안되는 이유를 막무가내로 묻기 시작했다. 나는 질문을 가장해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행동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 '어떠한 것'은 내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변명'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고있는게 분명했다. 내가 만든 '변명'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쓰여진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망상함으로 비로소 세상에 서서 버티는것이 가능했다. 다만 우연찮게도 내가 한 '거짓말'은 '진실'로 나에게 돌아왔고, 분명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한 '거짓말'에 위화감을 품고있는 듯 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그녀'를 [나]는 전혀 필요로 하고있지 않았다. 나에게는 '살아가야 하는 변명'이 필요했던 것이지 '살아가는 이유'가 필요한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것'이 이 당시 나에게는 '살아가야 하는 변명' 이었다. 나에게는 '[내]가 아니면 안되는 그녀'를 배려하는 마음은 단 한 움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깨닫고 그녀를 질책한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나를 '소중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대했다. 그것이 내가 그녀를 공격한 '결정적인 이유' 였다. 그 괴리감을 나는 참을 수 없었다는게 된다. 그렇게 나는 그녀가 나를 싫어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어떠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잃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어떠한 것'을 쫓고있었다.

명절, 고향집에 내려간 나는 '과거의 흔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졸업 앨범, 과거의 내가 행복했던 모습으로 웃고있는 사진, 과거의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 그러던 와중 우연찮게도 나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책을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내가 책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가방에 넣고 가져왔다. 그 책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책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자연스럽게 그 책을 쓴 작가의 다른 책을 마구잡이로 사서 읽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 제목, 당연하겠지만 같을리가 없다. 다만, 거기에는 '내가 보고싶었던, 내가 원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그 작가의 모든 책에는 그것이 존재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해피엔딩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나는 늘 그 '뒷 이야기'가 궁금했다. "공주님과 왕자님은 행복하게 살았더래요."에서 '더래요'의 자세한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입장이었다. 해피엔딩의 막이 내려온 다음의 이야기가 늘 궁금했다. 공주님과 왕자님은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어떠한 기분이었을까, 매일 손을 잡고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며 즐거워 했을까. 그것이 나는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그것이 궁금해서 직접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끝없는 행복을 써내려가는 소설가'가 되는 사람이 언젠가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위인은 아닌지라 '해피엔딩을 싫어하는 아이'가 되는데에 그쳤다. 모든것이 못마땅했다. 고난과 역경을 해쳐나가고 히어로와 히로인이 결혼해 막을 내린 다음의 이야기를 대다수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작가만큼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어쩌면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배드엔딩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이야기는 분명히 '해피엔딩'이었다. 거기서 나는 또다시 '어떠한 것'을 보았다.

나는 지금 '어떠한 것'을 쫓고있다.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써내려간 이야기가 없어 직접 펜을 잡았다고. 그리고 우연찮게도 그 이야기는 나의 마음에도 쏙 들어버린게 된다. 나는 이야기속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을 마주하고, 진심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잿빛이었던 하늘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나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그제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쫓는 '어떠한 것'은 이 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의 써내려간 이야기는 작가의 '어떠한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정말 사랑하는게 가능할 뿐 이다. 나의 '어떠한 것'은 분명 작고 우스울게 분명하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어떠한 것'을 쫓는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은 분명 아름답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지금까지 자기들끼리 보고있었다는게 된다. '어떠한 것'을 쫓는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만이 아름다운것이 아니다. 세상은 원래 아름다웠고, 나는 비로소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인식하는게 가능해졌을 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과거의 나처럼 온세상이 잿빛으로 물들어버린 사람도 있을 것 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발자취를 남기는게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의 내가 쫓던 '어떠한 것'은 나에게 글을 쓰는 방법을,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남겨주었다. 돌이켜보면, '어떠한 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내가 '어떠한 것'을 쫓아간 발자취만이 남았다. 어쩌면 '어떠한 것'은 사실 어떠한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길에서 넘어진 소년의 돌부리를 향한 원망 만큼이나 의미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어떠한 것'을 쫓는 '과정'은 착실하게 나의 뒤에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잿빛이었던 순간에는 보이지 않았던 나의 발자취가,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 뒤에 비로소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이 긴 이야기가 거의 다 끝나간다. 사실, 그렇게 길지 않다. 이는 무의식중에 '긴 글만이 좋은 글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 글은 짧아도 된다.'는 우스운 변명에서 비롯된 현상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멋들어진 엔딩을 쓰는것은 나에게 무척 힘든일이다. 이 세상에 제대로 된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난잡한 문장의 회오리에서 당신에게 도움이 될 문장을 당신 스스로가 집어내는것 또한 쉬운일이 아니다. 당신은 나와 '그녀'의 뒷이야기를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내가 빠져든 '작가'의 이름을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것을 전하기 위해 이 글을 쓴것이 아니다. 이 글은 적어도 당신의 기억 어딘가 한구석에 남게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 글을 읽는것으로 '어떠한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 나는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읽게 하기 위해 써내려 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에게 읽어진다'는 것 만을 목적으로 써내려간 이야기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읽고 어떠한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히 큰 재미로 다가온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는것은 이토록 즐겁고 아름답다. 속았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것도 나에게는 무척 큰 즐거움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특별히 '엔딩' 비스무리한것을 제공하고자 한다. 부디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것'이 있다.

그것은 '꿈'도 '진로'도 '사랑'도 '희망'도 '절망'도 될 수 있다.

또는 어떠한 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떠한 것'을 쫓아감으로써 세상이 아름답다는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당신에게도 그런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