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o credesse che mia risposta fosse

A persona che mai tornasse al mondo,

Questa fiamma staria senza piu scosse.

Ma perciocchè giammai di questo fondo

Non tornò vivo alcun, s'i'odo il vero,

Senza tema d'infamia ti rispondo.

만약 지상으로 되돌아갈 사람에게

대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이 불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리라.

내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지하에서 살아 돌아간 자 하나도 없으므로

명예 훼손의 염려 없이 그대 물음에 답하리라.































발빠른 양치기 작전 사후강평


작전배경: 정보부는 10월 28일 옛 피연못지옥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 강욕동맹장 토테츠 유마(이하 도철)가 파괴되고 다음날 후속대가 도철을 회수하였으나 일종의 착란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통신 내용을 감청함. 또한 정보부가 11월 2일 점령된 석형시에서 취득한 강욕동맹 내부망으로부터 일부 복구한 문서들에 따르면 한 차례 파괴를 겪은 이후 도철은 기존에 흡수한 욕망, 축적한 능력, 과거의 기억이 초기화되어 강욕동맹장으로서의 직무수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이로 인해 강욕동맹이 진행 중이던 사업 대부분을 잠정 중단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비정기 간부회의가 11월 15일 갈애시에서 소집되었다고 확인함. 상기된 정보가 높은 신빙성을 가진다고 판단한 사령부는 도철의 공백을 통해 갈애시를 함락시키고 강욕동맹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한 작전을 제안하였으며 이를 심의회에서 승인함.


작전계획: 갈애시는 강욕동맹 제일의 핵심거점으로 강욕동맹 전선 개전 이래 최대 접전지가 되어옴. 갈애시 교외에 축조된 9개의 요새가 형성하는 탄막포화와 방공망에 하니와 병사의 진군은 번번이 돈좌당함. 이를 타개하기 위해 화력전에서 적을 제압하기 위한 신병기와 절대적인 전력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압도적인 병력이 동원됨. 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도철의 확보와 강욕동맹 간부진의 제거로 이를 위해 작전은 포위와 기습에 주안점을 두고 입안됨.

작전에 앞서 연막의 일환으로 경아조 전선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하며 지연전을 벌이고, 귀걸조에 전향적인 조건에서의 강화를 제의하며, 경아조 전선 전황이 악화되어 강욕동맹 방면 전력을 재배치한다는 역정보를 복수의 경로로 유포함. 작전 개시는 11월 16일 새벽 1시 정각으로 계획됨. 갈애시 방공망을 집중포격으로 무력화하는 즉시 병급 하니와 2개 연대로 항공을 봉쇄함. 동시에 간부회의가 진행되는 비궁에 갑급 하니와 2개 중대가 강습함. 요새 셋 이상을 제압하면 세 방향에서 정급 하니와 7개 사단이 포위망을 좁히며 돌격해 조속히 시가지에 진입함. 을급 하니와 4개 대대는 구원 시도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완전히 닫기 위해 갈애시 북쪽에 우선적으로 신속배치 후 증원함. 작전의 요지는 동시다발적인 파상공세로 효과적인 대응을 방지하고 준비된 전력의 우위에 대한 변수를 없애는 데에 둠


작전결과: 갈애시 점령, 강욕동맹장 토테츠 유마 확보, 강욕동맹 간부 4마리 퇴산/2마리 포로/3마리 실종, 동물령 32000여 마리 퇴산/84401마리 포로/2000여 마리 실종, 인간령 24896명 해방

정급 하니와 12883기 대파/8064기 중파/26954기 소파, 병급 하니와 1507기 대파/218기 중파/939기 소파, 을급 하니와 1181기 대파/242기 중파/379기 소파, 갑급 하니와 396기 대파/3기 중파/1기 소파


작전평가: 작전의 양대목표였던 도철 확보와 강욕동맹 간부진 제거를 달성함. 부가적으로 강욕동맹 산업과 물류의 중심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갈애시를 함락하고 포위를 성공시켜 전과를 확대함으로써 이번 작전으로 강욕동맹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거나 적극적인 반격을 실행할 능력을 상실함. 장기적으로 강욕동맹이 회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망됨.
















토테츠 유마 제1차 취조기록


면담자: 토테츠 유마


심문자: 조토구 마유미


<기록 시작, 00.00.00>


심문자: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면담자: 우리 서로 아는 사이인가?


심문자: 저는 영장원의 수행비서인 조토구 마유미라고 합니다.


면담자: 잘 모르겠네.


심문자: 면담자와는 이전에 6번의 교전에서 패퇴했습니다.


면담자: 관심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러니 여기서 빨리 내보내주기나 해.


심문자: 질문에는 성실히 대답해주십시오.


면담자: 싫은데.


심문자: 본인의 처지를 올바르게 자각할 것을 권고합니다. 저희는 면담자의 신변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없으며 격식을 갖춘 대우는 강욕동맹의 수장이었던 면담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면담자: 아니, 그러면 진작에 날 해코지했겠지. 사실은 내가 중요한 인물이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것 아니야?


심문자: 예 가급적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면담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면담자: 흥, 속이려 들지 마. 당신네들 얘기는 이미 실컷 들었어. 깡통은 악랄하고 가증스런 축생계의 파괴자랬지. 이 두 눈으로 직접 보았어.


심문자: 갈애시를 파괴하는 것이 저희의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부수적인 피해였음에도 강욕동맹의 진주라고 불리던 갈망의 도시가 초토화되는 것은 저희에게도 불미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면담자: 당신네들 같이 폭압적인 수단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집단과는 우호적이게 되고 싶지도 않네.


심문자: 폭력에 일가견이 있는 분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의외입니다.


면담자: 무슨 소리야?


심문자: 저희가 축생계에 오기 전부터 이미 축생계에는 폭력이 만연했습니다. 면담자는 이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까?


면담자: 피장파장이라는 거야?


심문자: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의 목적은 축생계의 파괴가 아닙니다. 저희의 목적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던 축생계에 새로운 정의를 이식해 축생계를 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희는 또한 힘에 의지하기를 강요받는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축생계에는 폭력이 만연한 상태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희는 더 대규모로 체계적이게 조직화된 폭력을 구축했습니다.


면담자: 아니, 전혀 자랑거리가 아니잖아.


심문자: 저희가 알기로는 면담자가 이 방식의 격렬한 비판자는 아니었습니다.


면담자: 당신네들 사정은 모르겠지만 폭력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어.


심문자: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면담자: 여기서 어느 부분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심문자: 혹시 10월 28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면담자: 그게 언제더라.


심문자: 오늘로부터 24일 전입니다.


면담자: 아니. 나 요즘 날짜 개념이 없거든.


심문자: 피연못지옥에 방문한 적 있습니까?


면담자: 잘 모르겠네.


심문자: 작열지옥터 아래 옛 피연못지옥 말입니다.


면담자: 지리에도 자신 없어.


심문자: 알겠습니다. 혹시 풀려난 다음의 계획 같은 게 있습니까?


면담자: 풀어주게?


심문자: 제 권한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닙니다만 협조적으로 나와주시면 최대한 용의를 봐드리겠습니다.


면담자: 에휴, 도움이 안되네. 글쎄, 나를 들들 볶는 녀석들이 없는 데서 맛있는 간식이나 실컷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심문자: 어떠한 이유에서입니까?


면담자: 어, 내가 그걸 원하니까? 그냥 내가 그게 좋다고 생각해서지 뭘 그런 걸 따져 물어.


심문자: 알겠습니다. 한 가지 더 물어보겠습니다. 창백한 피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면담자: 노코멘트.


심문자: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다음 번에는 보다 유익한 시간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때는 제가 간식을 몇 가지 가져오면 어떻겠습니까?


면담자: 그런 것보다 어서 자유의 몸이 되었으면 좋겠네.


심문자: 감안하겠습니다.


<기록 종료, 00.15.43>


















항구적폐쇄격리구상 제2안/기호명-천국


① 상급통합보안행정처는 도철에 대한 철저한 격리 및 폐쇄 주문을 하달하며 다음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도철을 물질적으로 격리할 수 있을 것

-도철을 임의의 집합을 제외한 물리적 실체로부터 분리할 수 있을 것

-도철의 관념적/영적 동일성을 국한된 영역으로 제한할 수 있을 것

-도철을 주술적/의식적으로 봉인할 수 있을 것

-도철을 영구적으로 폐쇄할 수 있을 것

-외부로부터 충분한 은닉성과 내구성을 갖출 것

심의회에서 제1안이 반려된 이후 다음 요구사항이 추가되었다.

-현재 기술 수준으로 실현 가능할 것

-가용 가능한 자원으로 완성할 수 있을 것


② 제2안은 반지름 500미터의 구체 구조물과 내부에 부속된 설비들로 구성된다. 구체 내부는 구동구획과 폐쇄구획으로 구분되며 구동구획은 다시 외곽구획, 내핵구획, 정축구획으로 구분된다. 외곽구획은 구체 표면과 폐쇄구획 사이 양끝이 만나는 직경 2.5미터의 이중 나선으로 연결된 구획이다. 내핵구획은 구체 정중앙에 위치한 반지름 12.5미터의 구형 구획이다. 정축구획은 입구 부근에서 외곽구획과 만나 수직으로 내핵구획에서 만나고 반대쪽 끝에서 외곽구획과 또다시 만나는 직경 2.5미터 길이 994미터의 직선으로 연결된 구획이다. 폐쇄구획은 전체가 하나의 벽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위치관계의 평면들이 복잡한 경로를 형성한 구체 내부 구동구획 이외의 나머지 공간으로 도철이 격리될 구획이다. 구조물이 작동한 후 그 시공간적 특성으로 인해 폐쇄구획의 벽은 손상되거나 변형되지 않고 항상하게 유지된다.


③ 전체체계의 핵심요소와 기능은 다음과 같다.

-법계형다차원위상닻: 구체 내부의 정합적 조성을 재배열해 그 내부를 외부차원으로 박리시킨다.

-나선형양자중력가속기: 양자화된 시간선속의 곡률과 밀도를 조정하여 그 내부의 시공간을 연장하고 안정화한다.

-개량형광역감제정신자검출기: 도철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며 입력된 사항과 일치함을 검증하고 존재를 확정한다.

-魄414아니마엔진: 전체체계의 동력원

-병마개: 히히이로카네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스펠카드를 복사한 용주의 합금을 너비 1.5미터 두께 6미터의 직육면체 모양으로 주조하여 구체의 유일한 입구를 정밀하게 차폐하는 동시에 봉인식의 점정으로 작용하고 전체체계의 스위치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발신자: 조토구 마유미

수신자: 하니야스신 케이키

   제목: 도철 격리처분 결정의 재검토를 건의드립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 계획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 이 계획 하나에 저희의 산업적 역량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흡수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할당된 재원과 물적, 인적 자원은 전례가 없는 수준입니다. 작금의 지출만 해도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다른 계획이나 일정을 줄줄이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있지만 금 30톤 분량의 예산을 올해 안에 확보하기는 어렵습니다. 최근 전선에서의 손실을 벌충하느라 하니와 생산의 병목으로 당장 노동 가능 하니와도 예년의 수효를 한참 밑도는 상황입니다.


   외부와의 협상도 순탄치 않습니다. 마계나 환상향에서 호가하는 금액도 과다하지만 특히나 달의 도시의 요구는 수용하기 난감합니다. 히히이로카네 1000톤을 넘겨받는 대신 저희 인간령 신앙 반절을 100년간 달의 도시로 전송하라고 하는데 이는 하니와 전체의 출력을 저하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달의 도시는 추가적인 기술이전을 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저희의 원천기술을 제공할 것을 요청했는데 그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어떠한 연유로 그들에게 필요할 일도 없는 저열한 기술을 구태여 요청하겠습니까? 천변만화의 세계들 속에서도 월인은 가장 심원하고 불가해하고 신뢰할 수 없는 부류에 속합니다. 저들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고 그에 따른 파급효과를 예측할 수 없는 한 현재의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이 크고 복잡한 계획을 추진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도철을 영원히 격리하고 폐쇄하고 봉인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현재 그것이 극도의 시급성과 중대성을 요하는 목표라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수 차례의 심문과 정보부가 수집한 증거를 토대로 추론해볼 때 도철이 피연못지옥에서 플랑드르 스칼렛이라는 지상의 흡혈귀에게 한번 파괴된 사실과 이를 직접적 원인으로 하여 도철이 기존에 축적한 욕망, 기억, 능력이 초기화되었다는 사실은 참이므로 도철은 현재로서 저희에게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밀집된 보안을 갖춘 도철 전용의 감호소를 비밀리에 설립해 그곳에서 도철을 저희의 감시와 통제 아래에 보호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 방안이라면 합리적인 비용으로 도철을 안전하게 억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당한 기호식품만 제공한다면 순조롭게 도철의 호의를 얻고 협조를 구할 수 있을 공산이 큽니다. 어쩌면 그 이상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저희가 운이 좋다면, 언젠가는 서로 이익과 가치를 공유하는 상호호혜적 관계를 맺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와 병단

















발신자: 하니야스신 케이키

수신자: 조토구 마유미

   제목: 염려하는 바는 잘 알겠단다 마유미

  



   하지만 걱정은 접어둬도 되겠구나. 예상보다 지출이 크다만 충분히 대책은 마련되어 있으니까. 재원은 이번에 강욕동맹 금고에서 털어온 걸 전용할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충당이 될 거야. 인간령한테 들어가는 불필요한 예산 다 삭감해버릴 거고 하니와 충원될 때까지 돌려야 되는 라인에 임시로 인간령들 3교대로 굴리면 땜빵은 되겠고. 어쨌든 투자하는 만큼 개발에 진척이 있으니 완성될 때까지만 좀 쪼들리며 버텨야지 뭐.


   달의 도시 건은 일단 내가 친서를 보내볼게. 살살 구슬리며 사정하면 그쪽도 에누리 좀 봐주겠지. 그리고 어차피 출력이 반토막 나도 동물령 따위에게 밀리지는 않잖아. 내가 너네를 그렇게 대충 만들지는 않았는데. 전력 부족분이야 10만이든 20만이든 더 찍어내서 메우면 돼. 저번 영장원 침입 때처럼 내가 피습당했다면 몰라, 얼마든지 손실은 보충할 수 있는데 기다릴 시간이 없을까.


   그런 의미에서 저열한 기술이라는 건 좀 마음의 상처네. 그 저열한 기술로 너네가 만들어졌는걸? 마유미, 저열한 기술 월등한 기술 하는 건 호사가들이 매기는 평가에 불과하단다. 정말 중요한 건 기술과 기술자의 함께하는 마음이라고? 조형신의 명예를 위해 첨언하자면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특정 기술의 효용은 가변적이지. 어쨌든 과연 그 콧대 높은 달의 백성이 써먹을 구석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굳이 달라고 한다면 줘도 상관없어. 오히려 그게 싸게 먹히는 거지. 월인들 꿍꿍이속이야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해가 되는 방향은 아닐 거야.


   나도 쓸데없이 크고 복잡한 계획을 선호하지는 않아. 국소블랙홀을 생성하는 제1안이 실현 가능했다면 망설임 없이 그걸 채택했겠지. 하지만 이게 그나마 최선인 걸 어쩌겠어. 도철 전용의 감호소를 세우겠다는 안은 당연히 기각이야. 겹겹이 보안을 갖춘대도 그 보안은 저번에 살아있는 인간들의 침입에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았니. 육신을 가진 인간과 동물령이 조력한다면 이번에는 막아낼 수 있겠니? 도철을 영원히 유폐시킨다는 조건을 달성할 수 없으니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


   그나저나 상호호혜적 관계라니, 도철을 교화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도철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 같구나. 애초에 정말로 괜찮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지. 도철은 탐욕의 덩어리 그 자체야. 지옥의 악을 긁어먹고 끝없이 악업을 되풀이하는 최악의 짐승이지. 도철이 내민 손을 붙잡는 건 잡아먹어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 타락의 징표고. 이 추악하고 끔찍한 존재만큼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 단일개체는 없어. 도철의 제거가 우리의 목적이 아니지. 목적을 이루는 필요조건이고 기본전제야. 도철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해. 최종적으로 파괴될 수 없다면 무기한의 유형으로라도.


   시비곡직청의 법집행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도철이 제멋대로 활개치게 내버려두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재심해야 한다고 확신해. 하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 어쩌겠어.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직접 해결하는 수밖에. 도철에게 자유형을 내려야 한다는 점에는 너도 동의하잖아? 그조차도 제대로 하려면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지 않겠어?


   물론 영혼 없는 우상에 불과한 너희가 이해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아. 이해했다면 이런 단견적인 제안을 내지는 않았겠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생각할 수도 없는, 언제든지 내 지시 한마디에 복종하는 손쉬운 도구. 그 이상을 바란다면 과욕이려나. 그래도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몰라주다니 너무 충실해. 속 편한 일이야, 마음이 없다는 건. 나도 편하게 한마디로 일축하면 될걸 이리 구구절절 피조물에게의 교시를 쓰고 있네. 느끼는 바가 무엇이 있을까? 말해줄 수 있다면 좋겠구나.


   인간령들이라고 더 나을 것도 없지. 축생계답게 기껏해야 잉여인간들 주제에 부스러기 같은 이득에 선악을 뒤바꾸고 자기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는 어리석은 속내와 그걸 숨길 줄도 모르는 덜떨어진 행동방식은 한숨만 나와.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썩어문드러져 한 아름의 윤회전생으로도 구제할 방도가 없으니 동물령 따위의 노예신세도 이상할 게 없지. 이런 비참한 영혼들도 신의 자비를 애걸하는 건 어느 세계에서나 똑같구나.


   차라리 그때처럼 지상의 인간들이 찾아와주면 좋을 텐데. 나를 죽이려고 한 건 좀 괘씸하지만 그래도 그 당돌한 인간들은, 살아있었어. 언젠가 죽는다는 게 아까울 정도로. 내가 흙과 물로 아름답게 다시 만들어 주겠다고 했을 때 사양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들이 죽어서 축생계에 올 일은 없겠지. 아니, 오지 않았으면 해.


   내 진의를 알아줄 자는 아무도 없구나.


   어쩔 수 없네. 어쩔 수 없어.


   이 또한 고립무원이 빚어낸 조형신이라는 숙명으로 감수해야겠지.


   추신: 그런데 숟가락은 못 찾았니?

   



   하니와 병단

















발신자: 원증회고 설계국

수신자: 하니야스신 케이키

   제목: 개념증명 완료

  



   개념증명이 오늘부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구체 제작에 착수합니다.

   바라시는대로 4월까지는 완성품을 출고할 수 있으리라 전망됩니다.

  



   연구개발부

















발신자: 하니야스신 케이키

수신자: 원증회고 설계국

   제목: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어

   잠든 뿌리를 봄비로 휘젓네

   

   추신: 케이크 자를 준비를 해야겠어.



   연구개발부

















토테츠 유마 제20차 취조기록


면담자: 토테츠 유마


심문자: 조토구 마유미


<기록 시작, 00.00.00>


심문자: 오늘은 마지막으로 면담자에 대한 처분을 고지하겠습니다.


면담자: 드디어 내보내주는 거야?


심문자: 아니오. 자세한 안내사항에 대해서는 먼저 이 문서를 읽어주십시오.


면담자: 이게 뭔데.


심문자: 면담자가 이송될 새로운 시설에 대한 개략입니다.


면담자: 내가 여기로 보내진다고?


심문자: 예. 그리고 그 곳이 종착지가 될 것입니다. 그 곳은 면담자를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미궁입니다. 그 안은 훼손되지 않는 공허한 벽과 길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면담자: 병마개라는 건 또 뭐야?


심문자: 그 곳의 유일한 입구는 알려진 가장 경도 높은 금속으로 주조된 방벽으로 봉인될 것입니다. 또한 병마개는 거기에 합금 처리를 통해 더한 성질로 극히 유독합니다. 접촉한다면 해당 부위에 발열, 붓기, 통증을 유발할 것이고 계속해서 피폭된다면 신체 말단부터 괴사하고 분해되는 부식이 몸통까지 전이될 것입니다.


면담자: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무슨 고문 같은 건가?


심문자: 저희는 면담자를 최종적으로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면담자를 철저하게 이 세상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는 차선책으로 그 곳에 면담자를 가두기로 했습니다.


면담자: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데.


심문자: 가능하다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추방됩니다.


면담자: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용의를 봐주겠다며?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심문자: 아닙니다.


면담자: 거짓말하지 마.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지? 그럼 그렇게 말을 하지. 처음부터 자기 앞날도 모르는 도축장의 축생이라고 비웃고 있었던 거네.


심문자: 그렇지 않습니다.


면담자: 그런 말뿐인 말 신물난다 진짜.


심문자: 죄송합니다.


면담자: 다들 하나같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만 지껄이고 있어. 내가 그런데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어 보이냐고?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러는 건데.


심문자: 어떤 분이 그러길 정말 괜찮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면담자: 그럼 당신네들은 지옥에서 뭐하고 있는데?


심문자: 저희는 축생계에 질서를 세우기 위해 종사합니다.


면담자: 지옥을 더 지옥답게 만드는 일이겠지. 나도 내가 왜 지옥에 왔는지는 몰라. 하지만 적어도 당신네들 희생양이 되라고 온 건 아닐 거야.


심문자: 언제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도록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자, 가야 할 시간입니다.


면담자: 무슨 짓을 한 거야.


심문자: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무해한 마취제일 뿐입니다.


면담자: 망할. 어쩐지 진수성찬을 내더라니.


심문자: 이 세상에서의 최후의 만찬은 부족함 없이 대접해드렸습니다. 모쪼록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면담자: 빌어먹을 깡통 새끼.


심문자: 저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좋았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그 기능이 제게는 없습니다.


<기록 종료, 00.10.48>





































是諸法空相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不減

시제법공상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

















상급통합보안행정처 긴급 공고


우선순위 등급: 흑색


대상: 전원


알림: 상황 협흡. 전원 2급 비상태세 발령. 보안체계 손상 심대함. 항구적폐쇄격리구상 봉인 지점에 신속타격조 급파됨. 가용 가능한 정찰감시자산은 강욕동맹측 핵심시설 색적 무제한/무기한 유지할 것. 강욕동맹장 토테츠 유마와 접촉할 경우 즉시 사령부로 보고할 것.


-상급통합보안행정처-






































천국에서 내리어 펼쳐지는 현실은 돌아본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너무 괴리감이 없어 오히려 미시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밖의 시간이 그리 지나지 않았음은 분명 기꺼워할 만했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부득이하게 현실감이 결여되었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잠시 쉬며 기억을 되짚어보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하여간 그 같은 고생 끝에 잠시 홀가분함을 만끽하는 일에 나는 반대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축생계의 칙칙한 하늘이 가려지지 않는 자리 위에 두 손을 머리 뒤에 깍지 끼고 누워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서두를 떼야 할까. 여럿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새의 규율이라면 적당하겠다. 새의 규율은 강욕동맹의 상징적인 강령이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공포된 것도 아니고 원작자도 알려지지 않은 기묘한 우언들의 묶음이었지만 강욕동맹의 일원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특히 조류 동물령들이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어쩌면 그때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원작자를 찾고 싶어도 찾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두 투계가 마당의 지배권을 두고 격렬히 다투고 있었다.

한 녀석이 결국 다른 하나를 패주하게끔 했다.

패배자는 조용한 구석으로 살금살금 숨어들었다.

정복자는 높은 담으로 날아올라 날개를 퍼덕이며 온 힘을 다해 환희에 찬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공중을 순항하던 독수리가 그에게 급습해 발톱으로 그를 붙잡은채 떠나갔다.

패배자는 즉시 그의 모퉁이에서 빠져나와 이후 공고한 지배권으로 군림했다.




강욕동맹의 모토는 어부지리였다. 우리는 가능한 싸움을 지양하는 행동방식을 취했다.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면 왜 굳이 싸워야 하겠는가. 강욕동맹은 우리보다 더 강성하고 오래된 조직들이 무너지는 꼴은 수두룩하게 지켜보았고 그것은 강욕동맹의 성과가 아니었다.


세 명의 총잡이가 서로 결투를 벌인다고 해보자. 블랙은 90%의 명중률, 그레이는 60%의 명중률, 화이트는 30%의 명중률을 가지며 서로는 서로의 사격실력을 숙지하고 있다. 만약 ‘화이트->그레이->블랙’ 순서로 자기 차례에 한발씩만 발포할 때, 화이트는 어디를 쏴야 생존율이 가장 높을까? 세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화이트가 블랙을 사살했다. 이 경우 그레이와의 대결에서 화이트의 생존율은 약 16.67%다. 둘째, 화이트가 그레이를 사살했다. 이 경우 블랙과의 대결에서 화이트의 생존율은 약 3.23%다. 셋째, 화이트는 누구도 쏴 맞추지 못했다. 이 경우, 60%의 확률로 그레이가 블랙을 사살했을 때 화이트의 생존율은 약 41.67%, 36%의 확률로 블랙이 그레이를 사살했을 때 화이트의 생존율은 약 32.26%, 4%의 확률로 아무도 누군가를 맞추지 못했을 때 원점으로 돌아오고, 합산하면 이 경우 화이트의 생존율은 약 38.14%다. 고로 화이트에게 최선의 전략은 가장 생존율이 높은 셋째 경우의 수를 확정적으로 선택하기 위해 아무도 없는 허공에 첫발을 쏘는 것이다. 그래야 일대일 대결에서 선공권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레이와 블랙은 이를 알아도 서로가 최대의 위협이기에 미약한 위협에 기회를 낭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강욕동맹은 최대한 마찰을 피하고, 선두를 달리며 주목 받지 않되, 기어코 우리와 싸워야겠다면 최대한 길고 고통스럽게 물고 늘어져주고, 지나치게 한 세력이 강해지는 것은 억제하고, 주인 없는 이권은 누구보다 먼저 선점하도록 하는 스캐빈저식 전략을 취했다. 다른 조직에게는 비겁하다며 평판이 안 좋았지만 우리 부하들은 이를 두고 손해보지 않고 이득을 취한다며 내게 ‘무패의 강욕동맹장’이라는 낯간지러운 이명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합리적인 전략일지라도 강욕동맹이 최종 승리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전략은 아니었다. 강욕동맹은 근본적으로 경아조나 귀걸조에 비해 약소세력이었다. 사실 이런 국면을 반전하는 데도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강욕동맹이 미약한 세력으로 남지 않으면 이 전략은 효력을 잃게 되고 새롭게 이런저런 골치 아픈 입장에 입장에 놓이면서 본격적으로 축생계의 무력항쟁에 엮이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경쟁에 패배하고 몰락하는 조직을 강욕동맹은 수없이 보았다. 일발역전을 위한 확실한 마스터플랜 없이는 무분별한 세력확장은 선택지 밖이었다.


정작 세력을 확장하래도 여건은 녹록하지 않았다. 강욕동맹의 뿌리깊은 조직문화는 나조차도 쉽사리 뒤바꿀 수 없었고, 평판도 안 좋은데 세력까지 미약한 강욕동맹은 고질적인 인력난에 시달렸으며, 믿고 맡길 인재가 없으니 어지간한 일은 직접 처리하는 게 능사라서 마땅한 준비를 할 시간도 모자랐고, 개혁이 실패했을 때의 뒷감당은 심히 곤란했다.


그래도 스캐빈저식 전략은 그런대로 유효했다. 갑자기 영장원에 나타난 삿된 신이 축생계 전체를 상대로 기관총을 쏴대기 전까지는 그랬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날아 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大風)이 일 때 [그것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천지(天池)를 말한다.




등에 딱딱한 바닥의 한기가 느껴졌다. 머리맡에 비치는 옅은 빛깔을 따라 눈을 뜨자 누워있던 허전한 통로의 한쪽 끝을 보란 듯이 가로막는 거대한 벽을 볼 수 있었다. 살며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봐도 붉은 금속질 벽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 이외에는 온통 어두컴컴했다. 유일하게 여기를 밝히는 진홍색은 은은하게 아른거리며 빛나 매끈하고 편평한 금속을 일렁이는 불꽃으로 보이게 하였다.


저것은 필시 히히이로카네였다. 그렇다면 불의의 사고 같은 건 없이 그대로 미궁에 갇히게 된 게 틀림없었다. 일단은 벽 쪽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때 한 말대로 이 벽이 극히 유독할지는 미지수지만 내 몸으로 시험해볼 생각은 없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통로 안쪽을 응시해도 저 너머는 넌지시 암흑에 잠긴 채로 멈춰있었다. “막다른 골목인가.”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잠깐의 주저 뒤 나는 발걸음을 떼었다. 저 안 깊숙이 이어지는 통로를 오른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걸음한걸음 세어가며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50걸음도 안되어 코너를 한번 도니 빛이 안 닿아 보이는 게 없었다. 눈을 떠도 감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뻗은 손과 내디딘 발이 공백을 채우는 벽을 느꼈다. 발 밑이 꺼지지는 않을까 불안했지만 계속 발길을 옮겼다. 연이어 모퉁이를 돌면서도 길은 한없이 뻗어졌다.


1,000걸음쯤 지나자 실제로 길이 위나 아래로도 통했다. 여기는 도대체 얼마나 넓은 건지 가늠이 안됐다. 일단 현재 위치와 수평으로 겹치는 경로를 0층으로 삼기로 머릿속으로 정해두었다. 그리고 위아래마다 1층씩 가감하면 어느 정도 여기 설계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왠지 헛수고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그런 생각을 떨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100,000걸음쯤 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 심란한 마음이 진정되었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까지 되찾았지만 주변에 둘러볼 게 없었다. 단순히 어두운 게 아니라 밋밋하게 닫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통로는 텅 비어있었다. 아무데도 닿지 않는 길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 소리를 내지 않으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요했다. 잠시 멍때리면 그게 1분이 될지 1시간이 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넓은 데에 나 혼자밖에 없다니 아주 참신한 공간의 낭비네.” 들어줄 사람도 대답할 사람도 없었다.


2,000,000걸음을 넘어 사방에서 달라붙는 추위에 발걸음이 멈췄다. 깨어나고부터 느꼈지만 이 곳은 정말이지 시간의 끝처럼 추웠다. 흡사 드라이아이스로 된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지독한 추위에 손발이 아려왔지만 손을 마주 비비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그걸로는 한참이나 부족했지만 별 수 없이 다시 일어났다. 적어도 바닥으로 내리는 추위 덕분에 정신은 바짝 들었다.


50,000,000걸음에는 춥고 배고프고 지쳐서 다시 멈춰 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하는 걸까? 지금까지 온 거리의 몇 배가 남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반대로 되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추위는 여전했고 배고픔은 끈질기게 자기주장을 이어갔다. “먹을 게 조금만 있었으면…” 부질없는 염원은 허기를 돋울 뿐이었다. “젠장. 이게 뭐냐고 진짜.” 공허한 메아리만 맴돌았다. 온갖 상념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나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이러고 있어봤자 더 힘들기만 했다. 계속 움직여야 했다. 머리보다는 발을 놀려야 했다. 나는 묵묵히 걸었다. 하염없이 걸으며 시간을 헤아려봤지만 길고 짧은 시간이 늘고 주는 현실이 되다만 막다른 세상에서는 도무지 이를 알 길이 없었다. 그나마 시간은 넉넉히 있었다. 퍽 위안이 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한참을 더 걸었을 때 어느 순간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작은 반짝임이 깜박였다. 부동자세로 얼어붙은 나는 또 한번 불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곧장 그리로 달음박질쳤다. 점점 밝아지는 길을 따라가던 내 걸음은 차차 느려졌다. 저 앞을 가로막은 붉은 금속 벽은 내가 처음 봤을 때처럼 영롱한 광채를 내비치고 있었다. 병에 두 개의 병마개는 필요하지 않다. 그 말인즉슨 내가 깨어난 곳에서부터 한 바퀴를 주회해 다시 출발지로 되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이럴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실제로 맞이하는 달갑지 않은 결말은 무량한 실망감을 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환장할 감옥은 출소일자도 안 나오는 밀실이었다.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로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진심으로 이 진저리 나는 폐허조차 못 되는 공허에서 벗어나 안락하고 온당한 일상의 즐거움에 참석하고 싶었다. 입에서 녹는 달콤한 간식이 그리워 미칠 것 같았다. “웃기지도 않아.” 그래, 이 모든 것은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차라리 역겨웠다. 이 전부를 모멸스럽다고 표현하는 게 보다 적합했다. 그제야 나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이 곳에 갇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똑바로 선 벽을 바라보니 이전과는 다른 것이 보였다. 거기에는 노골적이리 만치 선명한 악의가 서려있었다. 깊숙한 속으로부터 그에 감응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나는 이내 숨이 막히듯 끓어오르는 감각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덧창문을

갑자기 열어젖혔을 때,

펄럭이며 파닥이며

그곳에서 걸어나온 건

성스러운 태고로부터 온

위엄 넘치는 갈가마귀.

조금도 경의를 표하지 않고

잠시도 멈추거나 주저치 않고

그는 공작이나 귀부인의 몸가짐으로

내 방 문설주에 걸터앉았다

문 위에 놓인 팔라스의 흉상 위에

날아올라 걸터앉았지.

다만 그것뿐.


그러고 나서 흑단처럼 새까만

이 새는

그 얼굴 생김생김

신중하고 엄격한 표정으로

내 슬픈 환상을 속여

미소로 변하게 하네.

"볏을 잘라내고 밀어 버렸으나

그대는 분명 겁쟁이는 아니로군"

나는 말했지

"밤의 피안을 떠나 방랑하는

소름 끼치게 냉혹한

태고의 갈가마귀여

한밤중 지옥의 해변에서는

그대의 고매한 성명이 무엇인지

내게 말해 주구려"

갈가마귀는 말했지.

"영영 없으리"


나는 크게 경탄했지.

이 희귀한 새가 그처럼

쉽사리 대답하는 것에

허나 그 대답은 별 의미도 없고

믿을 만한 것도 아니었던 것.

이제껏 살았던 사람 중에선

침실문 위에서 새가 앉아

축복하는 걸 본 사람이 없다는 것에

우리 모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침실의 문설주 위

조각된 흉상 위에

새든 짐승이든 간에

"영영 없으리"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그러나 그 갈가마귀는

평화로운 흉상 위에 외롭게 앉아

그 한마디밖엔 말하지 않았지.

그 한마디 속에 그의 영혼을

한꺼번에 쏟아냈다는 듯이.

그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깃털 하나 펄럭이지 않고 있었네.

내가 혼잣말하는 순간까지도

"다른 친구들이 모두 날아갔었지.

아침이 되면

저 새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리,

나의 희망들이 그렇게 날아갔듯이"

그러자 그 새는 말했네.

"영영 없으리"


그렇게 때맞게 나온 대답으로

정적이 깨어진 데 깜짝 놀라

나는 말했지.

"분명해

저것이 말하는 것은

어떤 불행한 주인에게서 배운

유일하게 간직한 한마디.

무자비한 재앙의 신에게 쫓겨

더욱더 빨리 쫓겨

그 노래는 마침내

하나의 무거운 짐으로만 남았지.

그의 희망이 여신의 슬픈 노래도

음울하고 무거운 짐으로만 남았지

"영영 없으리"라는


그러나 아직도 갈가마귀는

나의 슬픈 마음을 속여

미소로 변하게 하네.

나는 곧장 쿠션 있는 의자를

새와 흉상이 있는 방문 앞으로

굴려다 놓고

푹신한 벨벳 천 위에서

공상과 공상의 사슬을 이어본다.

이 태고적 불길한 새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이 냉혹하고 희귀하고 소름 끼치고 수척한,

그리고 불길한 태고적 새가

"영영 없으리"라고 울어대는

의미는 무얼까 하고.




창백한 피는 불타는가. 오직 기억이 비로 내릴 때만.


재생은 미완이었다. 그것은 청정함으로 그러했다. 잔재는 용해되지 않고 망각되었다. 난파한 방랑자를 위해 지옥이 예정하는 함정은 천국의 밀실이었다.


치유는 보완이었다. 그것은 확산함으로 그러했다. 집요한 시련에 굴복하는 일에는 명예도 품위도 없었다. 희망을 추구한다면 사치요, 절망을 추구한다면 허영이었다.


부활은 완성이었다. 그것은 산패함으로 그러했다. 연원을 거슬러올라 발견한 불씨는 극도로 비효율적인 무기였다. 어린양의 생혈을 성배에 담아 마신다는 전형을 따라, 핏물에 잠겨 익사하여, 창백한 피는 타올랐다.


비로소 그녀는 진정한 악의의 쓸모를 증명하였다.




“수수께끼를 올리겠습니다. 언덕 위에 새가 있는데, 삼 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

"삼 년을 날지 않았으니 한 번 날아오르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 삼 년을 울지 않았으니 한 번 울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물러가라. 나는 수수께끼를 맞혔다."




고무적인 회복이었지만 이것은 끝의 시작은커녕 시작의 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감옥의 자물쇠는 여전히 닫혀 있었다. 결국 저 붉은 벽을 뚫을 수 없으면 영원히 수감자로 남아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었다. 


나는 손끝을 바닥에 두드리며 고민하였다. 누가 구해주러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논외였다. 하니야스신은 지금 이 상황을 초래한 내가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달가워할 자였다. 쿠로코마나 킷초는 내가 이런 데 갇혔다는 것을 아는지도 미지수에 설령 알아도 구태여 갖은 리스크를 감수하고서 나를 여기서 빼낼 메리트가 없었다. 강욕동맹은 공중분해되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4의 조직은 예측불가지만 이번에도 침묵할 게 유력했다. 축생계 외부는 따져볼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빠르게 내가 의지할 곳은 나 자신뿐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유기질, 무기질, 유형, 무형 막론하고 써먹을 수 있는 게 말 그대로 전무했다. 능력으로 흡수할만한 대상도 없으니 기본적으로 내 한 몸밖에 갖춰진 게 없었다.


다른 출구를 모색하려고 해도 그런 게 없다는 걸 이미 확인했다. 그 동안 지나온 통로 어딘가를 뚫고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입구에 돈을 처바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유일한 입구가 유일한 출구이기도 했으므로 여기서 나가려면 어차피 그리로 지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암울하군.” 하니야스신이 기고만장할 법도 했다. 이만한 초대형 프로젝트를 몇 개월 만에 완결하다니 할 짓이 그렇게도 없는 걸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니야스신이 지독한 적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 삿된 신이 놓은 지독한 함정에 빠지고 난 뒤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을까?


나는 차마 그렇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무언가 반박을 위해 장고를 거치며 거듭 주어진 조건을 검토한 끝에 나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정진정명 하책 중의 하책인 극단적인 방법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다른 대안은 없었다. “가망이 없는데.” 이대로 영원히 주저앉아 있는 것 역시 그랬다. “정말로 이게 맞나.” 삭막한 주변환경은 선택의 여지를 좁혔다. 그래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혹한 결론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감행하기가 두려워질 정도로.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왜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데?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글러먹었어. 그냥, 이번에는 그냥 지면 안되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무패의 강욕동맹장인데. 순간 말문이 막히는 듯 했다. “이제 와서,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어쨌든 적어도 나름대로의 이유로 삼을 수는 있지 않을까? 웃기지도 않았다. “역시 사기 당하는 기분이야. 아니, 사기 당해주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천천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돌아서서 일렁이는 빛깔을 지켜보았다.


“강욕동맹은 목숨을 위해서도 목숨을 걸지 않는다던 녀석들이 이걸 보면 까무러치겠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붉은 벽에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정말 이게 맞는지 자문해보았다. 대답은 똑같았다. 결단의 때였다. “그래,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봐야겠지.” 나는 웃는지 우는지 애매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오른손에 주먹을 쥐고 치켜들었다. 그리고 앞에 벽을 내리쳤다. 


부딪치는 소리보다 먼저 메스로 손을 마구 난도질하는 듯한 통증이 돌아왔다. 한번 쳤을 뿐인데 육안으로도 심상치 않게 손이 부어올라 있었다. 불운하게도 그때 들은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머리가 잘 안 돌아가 머뭇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계속 벽을 때렸다. 세 번 더 내리치자 감촉이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 손끝에서부터 몸이 쩍쩍 갈라지고 바스러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죽을 만큼 아팠지만 죽기 전에는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왼손으로 두 번 더 내리치자 몸통까지 분해되어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휘두르는 주먹이 허공을 스치고 시야는 거꾸러졌다. 쓰러지기 전 본 벽에 흠집이라고는 없었다.


“여섯 번밖에 못 쳤네, 빌어먹을…”유언치고는 지나치게 미련이 많았다. 눈을 감기 전 지나치는 생각들은 내내 그랬듯이 춥고, 배고프고, 쓸쓸하다는, 그런 것이었다.




봄철 새의 날개짓을 보라 새의 둥지는 그들의 날개짓 속에 있다




그 후에 대해 자세히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같은 말의 반복이 될 테니. 일어나고, 헤매이고, 알아채고, 내리치고, 눈을 뜨고, 길을 잃고, 불이 붙고, 다시 가고, 기상하고, 실망하고, 상기하고, 망실하고, 재생하고, 치유하고, 부활하고, 희생하고, 일어나면, 다음 악몽이 반기고.


악몽. 악몽들. 악몽들의 악몽. 나를 내보내주지 않는.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해야 할까.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악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 혼자 발버둥칠 뿐이었다. 스스로를 연료로 태워 고작 분자 몇 톨을 털어내고.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져 그저 다음을 기약하고. 이건 아주 멍청한 짓이야. 알고 있었다. 이건 아주 미친 짓이야. 알고 있었다.


이럴 만한 소용이 있을까. 이럴 만한 의미가 있을까. 수 백 번의 죽음이. 수 만 번의 죽음이. 수 억 번의 죽음이. 셀 수 없는 죽음이. 한걸음 앞으로 내딛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까. 내디딘 한걸음에 정녕 그럴 만한 의미가 있을까.


이런 의심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지어진 결론을 외면하고서 핑계만 도돌이표로 부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선택지는 협소했다. 이렇게 계속하던지, 아무것도 안 하던지. 양자택일의 딜레마는 되풀이되었다. 줄곧 번민하다가도 늘 선택은 똑같았다. 영원한 안식을 뒤로 하고 기나긴 찰나의 괴로움을 고르는 것이었다.


허기는 삶의 증거라던가. 유달리 여기서는 허기의 재촉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곱씹을수록 사무치게 스며드는 악의로는 목을 축일 뿐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선택권 따위는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참 애석한 처사였다.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면, 그러면 열릴 것인가. 열린다면 만사가 형통하겠지만 열리지 않는다면? 소원이 간절하지 않아서, 필요한 자격이 미달해서, 두드리는 방향이 틀려서, 처음부터 열리지 않아서, 이유야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천국의 문의 개통을 목도하고자 한다면, 하염없이 기다리며 두드리는 수밖에. 혹은 충분히 오랜 시간이 있고, 충분히 많은 횟수가 허용된다면, 역시 천국의 문을 계속 두드리는 수밖에. 하지만 만일 필요한 조건이 갖춰지고 열리지 않는 문이 아니라면 언젠가의 결말에는 필경 천국의 문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눈부신 장면 뒤에 그 너머로 손을 뻗는다면…




'영원은 몇 초인가?'

"순수한 다이아몬드로 된 산이 있습니다.

오르는 데 1시간이 걸리고 한 바퀴를 도는 데에도 1시간이 걸리는 산입니다.

그리고 100년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자신의 부리를 다이아몬드 산에 깎습니다.

그리하여 산 전체가 깎여나갔을 때 영원의 1초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먼 길 돌아 제자리다. 딱히 불평하는 건 아니다. 어쨌든 하니야스신이 이 소식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게는 해냈겠다. 그리고 당연히 이 정도로 멈춰서는 안될 것이다. 강욕동맹은 이번에 확실한 한 가지 교훈을 얻었으니까. 우리는 하니야스신 케이키를 죽여야 한다.


그녀의 실수는 스스로도 나를 궁극적으로 파괴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집요한 고식지계를 결벽증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잠깐의 유예를 무한정 늘리려고 했으니 마침내 파탄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패는 악의를 집어삼키고 돌아온 악연과 재회한다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한 줌 희망사항도 수포로 돌아가 애써 눈 돌려온 욕망의 거울이 자신을 도로 바라본다면 하니야스신은 자신이 지은 업보의 아가리로부터 뭐라고 스스로를 변호할까. 언젠가 외로운 삿된 신과 대면하면 그 심장을 받아가도록 하자. 내 손으로 그녀의 가슴에서 그 사특한 마음을 뽑아내 그녀 앞에서 보란듯이 씹어먹는 게 좋겠다. 그거라면 이 허기도 꽤나 달래지겠다.


물론 거기까지 갈 길은 멀었다. 강욕동맹은 와해되어 사실상 밑바닥부터 재건해야 했다. 쿠로코마나 킷초의 의중도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축생계 말고 지상에도 방문해봐야 할 것이다. 일단 추적을 뿌리치다가 한바탕 소란을 벌여보자. 축생계에 나 말고도 새의 규율을 기억하는 자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그럼 다시 시작이다. 가볼까. 지옥으로 어김없이































To Carthage then I came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Burning burning burning burning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O Lord Thou pluckest me out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O Lord Thou pluckest

오 주여 당신이 건지시나이다.


burning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