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TS 작가물 아이디어 메모

#TS #백합 #작가 #착각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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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책이 뿜어내는 곰팡내가 따사로운 햇살에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100만 장서가 꽂힌 서가가 밝아오면서 참새가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그 바람에 잠에서 깨버렸다.

"우으, 졸려……."

계속 눈을 감고 자려고 했지만 등이 배기기도 했고 또 이곳이 낯선 세계라는 걸 깨달으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그러고 보니 낯선 곳이다.
여기가 소설 속 장소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야.

그와 동시에 머리 속에는 수많은 의문이 뿜어져 나왔다.

어째서 책 속으로 빙의가 된 걸까.
어째서 하필이면 이미 처형당한 악녀로 되살아난 걸까.
작중 세계는 에필로그 이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일단 엔딩 이후로 1년 정도 지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베로니카가 2학년 종업식을 치룬 7월에 엔딩이 났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4월이고 베로니카가 3학년이니까 의외로 시간 차는 별로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엔딩 이후의 세계인 점은 살짝 아쉬웠다.
책빙의물인데 책빙의물 클리셰가 먹히지 않다니.

원작 초반부에 엑스트라로 빙의.
주인공이 받아야 할 기연과 행운을 독식.
그렇게 점진적으로 성장하면서 아이템, 스킬, 히로인 독점.
그래서 나중 가면 빙의한 엑스트라가 최종보스까지 잡고 클리어.

대충 이런 내용을 기대했는데 이미 스토리는 끝났다.
기연과 행운을 독식한다고 완결난 마당에 뭐가 달라지나.

그래도 상태창은 보이는 모양인데, 스탯을 보자마자 의아했다.

[카르마 : -999]

원작에서도 이런 스탯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낯설었지만 뭔지는 알 것 같았다.
생전 돌로레스가 저지른 악행을 업보로 표현한 것이겠지.
그리고 선행을 베풀어 카르마 수치를 +로 회복시켜야 할테고.

그런데 억울해.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고통을 받아야 하다니.
끙, 번거롭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복을 시켜야 할까.
몰?루

"……."

심심해.

밖은 분명 여신탄신제를 준비하고 있겠지.
베로니카가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 도서관에서 꼼짝 없이 갇혀 있어야 한다.

그 동안 책 좀 읽을까.
분명 이 세계는 마법이 실존해서 독서를 통해 마법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장서를 쭈욱 살펴보다가 문득 이상해보이는 책을 발견했다.

「마법 같은 사랑 - 빅토리아 스펜서」

제목은 지루해 보였지만 저자는 흥미로웠다.
빅토리아 스펜서는 작중 등장인물이자 베로니카의 조력자.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으로 성녀 릴리에 여학원의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인싸 중의 인싸.

작중 비중은 얼마 되지 않지만 특유의 나긋나긋하고 따뜻한 성격 때문에 인기가 많은 걸로 기억한다.
거기에 사람들과 부대끼는 걸 좋아하는 그녀가 소설을 써서 출판했다고 하니 뭔가 흥미가 돋았다.

뭔 책을 썼는지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있겠다.

 * * * * *

"……."

이게 소설?
스토리가 아예 없는데?

제목 만큼이나 내용도 별로였다.

스토리는 요약할 필요도 없이 간단했다.

여주가 남주를 만났다.
둘이 결혼했다.
끝.

장난 안 치고 저 얘기를 300쪽으로 늘린 게 이 책이다.
둘이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만나서 뭔가 꽁냥대다가 결혼하고 끝.
아무런 갈등도 긴장감도 없는 이런 이야기를 읽은 시간이 아까웠다.

뭐 누구나 글을 잘 쓰는 건 아니지.

책을 덮고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서가를 둘러보는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언니, 여기 진짜 아무도 없네."

"맞아. 이곳은 우리 둘 뿐이야. 빨리 하자."

소녀 두 명의 목소리다.
오늘 아무도 안 온다고 하지 않았나.

살금살금 기어가서 몰래 숨어서 지켜봤는데 깜짝 놀랐다.
두 소녀가 알몸이 되어 서로 뜨겁게 키스를 하고 있었던 것.



둘은 서로를 진득하게 바라보면서 상대방의 입술과 혀를 탐스럽게 먹었다.


"하아♡ 언니의 침, 정말 달다. 마치 꿀 같아."


"우리 후배가 이렇게까지 음탕할 줄은 몰랐네. 서큐버스도 아니고."


"서큐버스는 언니겠지. 순진했던 나를 이렇게 타락시켜 놓았는 걸."


그러더니 이제 서로의 몸을 핥고 빨고 아주 민달팽이가 따로 없었다.


역시 백합소설 속 세계관이라서 그런가 화끈하네.

이 세계는 빙하란 게 남아있긴 할까.

오늘도 북극곰은 삶의 터전을 잃어서 눈물을 흘리겠다.


"언니, 거기는… 으흥♡"


너무 충격적이라서 발을 움직이지도 못하겠다.


서큐버스라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아랫배도 뜨거워졌고 뭔가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

그리고 난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


안 되지, 안 돼.

이 악물고 꾹 참으면서 천천히 현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옷이 벗겨진 것을 확인했다.

둘 다 교복을 입고 온 것 같은데 어찌나 급했는지 옷가지가 전부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좀 정돈 하고 살면 어디가 덧나나.

뭐,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몸을 섞고 싶다는데 이해해줘야지.


찌걱, 찌걱ㅡ♡

"하앙♡ 너무 좋아♡"


도서관 전체에 음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짜증나서 조금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블라우스와 치마를 들고 명찰을 살폈다.


「올리비아 서포크」


얘는 원작의 엑스트라였나.

베로니카보다 한 학년 후배이자 도서부원이었지.

작중에선 돌로레스에게 세뇌되어 행동대원을 맡았던 걸로 기억한다.


돌로레스가 얘를 어떻게 세뇌시켰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미 죽었고 세뇌는 풀렸다.

그런데 그 맛을 못 잊어서 자기 후배를 꼬시고 이런 남사스러운 일을 하다니.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이러다니.

넌 안 되겠다.


잠깐 옷을 훔쳐서 바깥 구경을 하기로 했다.

둘이 오봇한 시간을 보내겠다는데 도저히 같은 공간 안에 있을 수 없는 게 첫번째.

옷 간수 제대로 안 하면서 공공장소에서 외설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처벌이 두번째.


어차피 꽤 오랫동안 즐길 것 같은데 잠깐 입고 돌아다니면 되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입는 걸까.

이렇게 입으면 되나?


우선 명찰부터 떼야겠지.


 * * * * *


힘겹게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완전한 늦봄 날씨라서 햇살이 따사롭고 꽃향기가 가득했다.


밖에는 사람이 가득했는데 충격적인 장면에 살짝 오금이 저렸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악을 멀리하고 여신님을 찬양하라!"

"오오, 여신님! 부디 저 마귀들을 물리쳐주소서!"


메마른 장작 더미 위로 악마 10여 마리가 꽁꽁 묶여있었으며, 사람들은 악마에게 돌 던지고 기름을 끼얹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이 날은 악마를 불태우는 날이라고 했지.

나도 잘못 됐으면 저 화형대 위에 매달렸을 것이다.


불쌍한 악마들.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비를 바라고 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이 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누가 라이터 하나 던져주면 금방이라도 불타올라 바베큐 통구이가 될 것 같았다.


으으, 도저히 못 있겠다.


화형대를 뒤로 하고 축제 부스를 살펴봤다.

음료수에 꼬치에 탕후루까지.

이런 저런 주전부리가 많지만 그림의 떡이다.

돈이 있어야 사먹든 말든 하지.


원작의 돌로레스는 공작영애라서 금수저다.

그런데 정작 나는 땡전 한 푼 없어서 굶주리는 처지라니.


나중에 신분이 밝혀져도 안전해지면 그때 공작가의 영애로 다시 인정 받든가 해야겠다.

그런데 악마를 저렇게 불태우는 시국에 신분을 밝힐 수 있는 날이 올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에 흥미로운 부스를 발견했다.


「중고서적 바자회 - 성녀 릴리에 여학원 학생회 운영」


어차피 더 걸어봐야 볼 것도 없고, 여기를 마지막으로 들려서 구경해야겠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떤 아가씨가 나를 반겼다.

키는 나보다 얼굴 하나는 더 크고 몸매는 늘씬한 미인상.

얼굴에는 미소가 생글생글했고 뭔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어, 너는 우리 학교 학생? 처음 보는 얼굴이네."


상대는 내게 다가와서 목덜미 냄새를 킁킁 맡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거, 서포크 영애의 냄새인데. 서포크 영애하고 무슨 사이야? 그리고 미안한데 네가 누군지 알려줄 수 있어?"


힉! 큰일났다!

옷을 훔쳐서 입었다는 게 들킬 거야!

그리고 만약 들킨다면… 통째로 구워지겠지?


어쩌지?

이대로 도망칠까?

아냐, 오히려 더 수상하게 보여.


머리 속이 완전 백지야.

어쩌지?

어떡하지?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상대는 잠깐 고민하더니 해맑게 웃으면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아, 내가 누구냐면, 빅토리아 스펜서. 스펜서 백작가의 영애이자 우리 학교 학생회장이야. 곤란한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와줘. 보다 많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돕고 싶으니까!"


이 사람이 빅토리아 스펜서야?

스토리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노잼 책을 쓴 작가?


그런데 진짜 최악이네.

여기 학교 학생도 아닌데 교복을 입고 다니면 누가 봐도 수상하게 보이잖아.

들켜선 안 되는데 어떻게 둘러대지?


상대는 인맥왕 빅토리아.

학생이라면 모두 꿰차면서 친하게 지내기 때문에 이 학교 학생이라고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빅토리아가 입학하기 전에 이미 졸업한 선배들은 모를 것이다.

이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빅토리아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도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 안녕하세요. 도, 도리에요. 그, 그게, 으으……. 이곳에 입학하고 싶어요."


"입학 지원을 했나보구나. 그런데 입학시험까지는 한참 남지 않았어? 그 교복은 어디서 난 거야?"


"그, 그게……. 언, 언니 옷을 입었어요."


"서포크 영애가 여동생이 있었어? 처음 듣네."


"아, 아뇨. 언니는 다른 사람이에요. 이미 졸업 하셔가지고요."


"아, 그렇구나. 언제 졸업하셨는데?"


"한 3년 전?"


"그렇구나! 미안. 나 입학하기 전에 졸업하신 분들은 모르거든. 그래도 언니 따라서 우리 학교에 입학하고 싶었구나! 참 대견하네."


휴, 어떻게든 거짓말로 커버쳤다.

빅토리아는 인맥이 매우 넓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까마득한 선배들까지 알 정도는 아니겠지.


하지만 빅토리아의 추궁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내 옷매무새를 다듬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옷이 흐트러졌잖니. 치마도 돌려 입었고. 넥타이는? 우리 학교 학생이 되고 싶다면 옷가짐부터 바르게 해야지."


"그, 그게, 우으……."


"그런데 가까이서 맡으니 서포크 영애의 냄새가 진하게 나네. 설마 걔가 너 괴롭혔어? 향수 들이붓고 그랬니?"


"아, 아뇨. 저도 잘……. 누, 누구신가요?"


"아, 올리비아 서포크. 도서부 부장이야. 사실 걔에게 중고서적 바자회 운영을 맡겼었는데 내가 억지로 일을 떠맡아서 좀 예민했나봐."


그 올리비아는 지금 도서관에서 쾌락에 몸부림 치면서 교성을 지르고 있을텐데요.


빅토리아는 불만이 가득했는지 올리비아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자기 도서부원 후배가 아프다고 돌봐줘야 한대. 내가 마법으로 치유한다고 해도 한사코 자기가 돌볼 수 있다고 굳이 내게 일을 떠맡긴 것 있지? 심지어 내가 보기엔 하나도 안 아파보였어. 걘 대체 왜 그런 걸까?"


"회, 회장님……."


"아, 미안. 네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는데. 그래서 무슨 책 보러 왔니? 학교 투어라도 시켜주고 싶은데 보다시피 할 일이 있어서."


올리비아라는 사람, 야스하려고 짬 때리고 튄 거였어?

진짜 미친 거 아냐?

돌겠네, 정말.


그래도 다행히 빅토리아의 신경은 올리비아에게 쏠린 모양이었다.

그냥 둘러봤다고 하고 적당한 시점에 나가야지.


"저, 뭔 책이 있나 그냥 보러 왔어요. 둘러봐도 될까요?"


"응, 물론이지. 어떤 책을 좋아해? 가장 잘 나가는 책이 있는데 한 번 볼래?"


빅토리아가 보여준 책은 자기가 쓴 '마법 같은 사랑'.

이 노잼 책이 한쪽 구석에 한 무더기씩 쌓여 있었다.


서점에서는 악성재고랍시고 반품 했고, 출판사에선 작가에게 처리하라고 떠넘긴 걸까.

인세 계약할 때 출판비용의 일부를 작가 보고 부담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결국은 작가가 직접 바자회를 열어 싼값에 팔아치우게 된 것이겠지.


어찌 보면 가슴 아프네.


"아, 아뇨. 그 책 이미 읽었어요."


"어, 그래? 어때? 재밌었어? 어땠는데? 응, 응?"


빅토리아의 눈망울이 다시 초롱초롱 빛났다.


작가 앞에서 서평을 하라니 이런 난감한 경우가 어디 있어.

이거 솔직하게 말해야 해, 아니면 사탕발림을 해야 해.


하지만 지나치게 귀찮게 달라붙는 걸.

자칫하다간 내 정체가 들키겠어.

들키면, 바베큐 통구이 확정.


내가 살려면, 팩트로 때려서 밀어낼 수 밖에 없겠지.


"재미 없고 지루해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전혀 모르겠네요."


그러자 빅토리아의 눈빛이 완전히 죽었다.


좋은 평을 기대 했는데, 이렇게 악평을 받았을 줄은 몰랐겠지.

특히 초보 작가는 악평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심정일 것이다.


너무 심한 말을 했나.

후회되네.

좀 더 잘 말할 걸 그랬나봐.


결국 빅토리아는 삶을 포기한 태도를 취하면서 카운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베스트셀러는 저기 있으니까 살펴봐. 내 책은 쓰레기였구나. 난 쓰레기야. 쓰레기. 아하하."

괜찮을까?
괜찮겠지?
내가 죽인 건 아니지?

애써 눈을 돌리고 베스트셀러 쪽을 살펴봤다.
그런데 거기서, 낯익은 책을 발견했다.

「백합꽃이 피는 정원에서 - 베로니카 갈릴레이」

이거, 원작 소설이잖아?
이게 왜 여기 있지?
그리고 베로니카가 이 책을 어떻게 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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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튼 작가틋년

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