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하는 순간에 게이트는 열렸고, 뒤늦게라도 이악물고 달렸지만 입착조차 하지 못했다. 결과는 빼도박도 못한 15착이라는 처참한 성적이었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반응할 정도의 난조는 아니었다.


난 그저 하염없이 전광판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거기서 고개를 돌려 관중석으로 시선을 돌리면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당황한 트레이너의 얼굴이 보였다.


트레이너와 눈을 마주쳤지만 도저히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 곧바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 트레이너의 차 안에서 계속 생각만 했다. 게이트에 들어서기 전에 무언가 있었던가? 아니면 터프 위로 올라오기 전에 터널에서 무언가를 당했던가?


그럴 리는 없지. 내가 생각해도 참 바보같고 유치한 망상이었다. 졌으면 졌다고 깔끔하게 인정하지 못할 망정 외부 요인 때문에 진 거라고 애써 변명하는 꼴은 참으로 우스울 테지.


멍하니 빠르게 뒤로 사라지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트레이너가 입을 열었다.


“곧 학원에 도착하는데, 근처 공원이나 잠깐 들릴까?”

“…갑자기 공원은 왜?”

“조금 힘들어 보여서 기분 전환이나 한 번 할까 그랬는데, 괜찮아?”


슬쩍 곁눈질로 트레이너의 얼굴을 봤다. 그 역시도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경기도 끝났으니 산책이나 하자. 대차게 말아먹은 주제에 이렇게 풀어져도 되는지는 모르겠다마는.”

“그런 말 하지 말고. 어차피 다음엔 이길 거잖아?”


그 말에 힘없이 실소를 흘렸다. 참 한결같은 놈이다.


“어이 어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확신할 수는 없는 거잖아.”

“너라면 확신할 수는 있지.”

“됐어, 입 발린 소리는 나 말고 맥 쨩에게 해줘. 맥 쨩도 천황상 졌잖아? 근데 담당이 아닌 애를 위로하는 건 그런가? 아무튼, 설마 맥 쨩이 질 거라도는 나도 생각치 못했단 말이지~”



공원의 산책로를 걸으며 노을로 물든 하늘을 만끽했다. 상쾌한 공기를 몸에 담으면서 하는 산책은 확실히 나의 컨디션 난조를 어느 정도 풀어줬다.


“잠깐 여기 앉아서 기다려, 자판기에 갔다 올게.”

“이런 때에는 역시 페니실린 티지. 그것만 있다면 세균 씨도 기분 절호조라구!”

“하하하, 아니 잠깐. 그거 무슨 맛으로 먹는 건데?”


트레이너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자판기로의 여정을 떠났다.


그가 자리를 떠난 틈을 타, 나는 헤드기어를 벗었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부드럽게 흔들고 간다. 그 시원함과 해방감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가끔씩 이렇게 해방을 즐기는 걸 좋아한다.


밤의 공원에서는 평소에 들리지 않았던 여러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고, 희미하게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매미가 우는 소리 대신 다른 벌레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린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트레이너가 오질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면서 봤던 자판기 위치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트레이너가 늦어진다.


그리고, 적적한 공원에 한 사람의 비명이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몸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소리의 근원지로 달려갔다.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기를 빌었다. 비릿한 냄새가 서서히 풍겨왔다.



자판기가 있는 곳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벌어진 후였고, 그 상황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트레이너는 자판기를 등지고 쓰러지듯이 앉아 있었고, 근처에는 피가 묻은 식칼이 떨어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덜렁거리는 오른쪽 팔을 부여잡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인영이 보였다.


상황은 파악했다. 힘겹게 숨을 내쉬는 트리이너가 걸렸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트레이너에게 한마디를 건냈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갔다 올게.”

“골드 쉽…”


도주하는 녀석을 잡는 건 내 주특기다. 시작부터 스퍼트치며 범인을 추격했다. 인간과 우마무스메의 달리기는 뻔히 보듯이 결과는 우마무스메의 승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다리에 힘을 실어 드롭킥을 날렸다. 적당히 기절할 정도로만.


범인을 기절시키고 주머니에 있던 케이블 타이로 손발을 구속시킨 뒤, 전화를 걸어 경찰에 신고하고 트레이너에게로 돌아오면서 구급차를 불렀다.


“조금만 버텨, 구급차가 곧 올 거야. 그보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놀음꾼이었어. 우마무스메의 레이스에 판돈을 거는 그런 놈들. 경기장에서부터 미행했던 것처럼 보였는데, 내 주의가 부족했네 하하… 윽———”

“짧게 말해. 더 심해지면 안 돼.”


손에 피가 묻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피가 과하게 흐르는 환부를 애써 지혈해 보지만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난도질 당한 복부와 깊게 베인 목. 점점 그의 얼굴은 핏기를 잃어 창백해졌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 환부를 압박하며 지혈했다.


“있잖아, 왜 헤드기어를 쓰고 다니는 거야? 괜히 좋은 얼굴이 아깝게 되잖아.”

“그래서 벗은 거잖아. 제발 가만히 있어줘. 지혈하는데 방해 돼.”

“처음엔 그냥 이상한 애다 싶었는데, 달리기 잘하는 이상한… 미녀였네? 아, 내가 못 알아 본 건 아니야. 원래부터 아름답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됐으니까, 입 다물라고! 왜 글렀다는 듯이 말하는 건데? 너 아직 안 죽었어, 살 수 있다고!!”


처절한 외침에도 트레이너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고루시…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아마 경동맥이 잘리고 폐, 간까지 찔렸을 텐데… 아 젠장, 우는 모습도 더럽게 이쁘잖아…”

“그럼 살아. 다른 내 모습도 더 보여줄 테니까 살아달라고!”

“이미 충분히 봤어.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의 입꼬리가 곱게 휘고, 눈동자는 탁해져갔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온기가 사라진 그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공원은 소녀의 통곡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곧이어 경찰과 구급대원이 도착했고 그들은 나와 트레이너를 떨어뜨렸다. 한참을 울어 힘이 빠져있던 나는 그가 들것에 실려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고 이내 수마에 떨어졌다.


눈을 감기 전 느낀 몽롱함은 무엇이었을까. 꿈에서 깨어나는 감각이었던가? 그게 아니면 그저 피로에 눈이 무거워지는 감각이었을까?


분명한 건, 귓가에 희미한 자명종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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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단편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썼다


한 편 더 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