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일본 더비.

눈깜빡임마저 허락하지 않는 3개의 프라이드의 격돌.

열광의 2분 25초 5

최후의 직선을 제압한 그 말의 이름은.."




디자인은 심플. 빨강 바탕-물색 가로줄-황색 세로줄의 배색을 깔끔하게 상의에 옮겼다. 


때는 92년, 시바타 마사토는 통산 승리 1600승을 넘기고 오카베 유키오와 함께 관동의 쌍벽으로 불리는 명기수였지만, 그 베테랑에게도 딱 하나 얻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 더비 우승. 사츠키도, 킷카도, 천황상도, 아리마도 다 따 봤지만, 
더비만큼은 67년에 데뷔해서 26년이나 흐르는 사이에 18번이나 도전했지만 계속해서 물을 먹어 온 것. 가장 강력한 찬스였던 85년의 미호 신잔은 하필 더비를 앞두고 골절로 쉬는 바람에 출전 자체가 무산. "더비만 이길수 있다면 바로 은퇴해도 좋다"라고 갈망하던 시바타 앞에 '이 말 타 보지?' 하며 친분이 있던 이토 유우지 조교사가 보여준 말이 있었으니, 그게 위닝 티켓이다.

아버지는 토니 빈, 어머니는 파워풀 레이디, 외조부는 마루젠스키. 혈통은 훌륭했으나 태어날땐 꽤나 여리여리한 몸매였다는데, 이토 조교사는 그런 상태의 위닝 티켓을 보자마자 무슨 직감이 들었는지 바로 점찍어놓고 데뷔가 임박하자 마방 자리까지 비워놓고 대기했다고 한다. 데뷔전 조교를 통해 이 정도면 더비를 노릴만하다는 판단이 들자, 시바타에게 더비를 선물해주자는 마음으로 그를 기수로 지목한 것.

그러나 데뷔전이었던 신마전 1200m는 5착의 패배. 그리고 그 직후 신진 기수인 요코야마와 다나카가 대타로 기승했던 두 경주는 역으로 승리하면서 시바타는 이 말을 양보하려고 한다. 의리 중시파에 젊은 시절 자기가 타던 말을 큰 대회만 되면 유명한 기수들에게 뺏겼던 쓰라림 덕에, 남이 잘 타던 말을 뺏어타서 승리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 그러나 이토 조교사는 호프풀 스테이크스에 우격다짐으로 시바타를 태워 우승시켰고, 이토의 강한 의지에 두손 든 시바타는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이 말로 더비를 우승하자는 의지를 불태운다.

해가 바뀌어 93년. 사츠키상 트라이얼인 야요이상에서 복귀한 위닝 티켓은 타케 유타카가 기승한 나리타 타이신과 처음 맞닥뜨렸다. 비등한 인기를 나눠가지며 2강 대결로 예측되던 이 경주는 예상을 깨고 위닝 티켓의 2마신차 완승. 거리도 조건도 똑같은 한달 후의 사츠키상에서 단연 최고 인기를 누렸고 2위는 동기 오카베가 안장에 앉은 대가리 큰 말 비와 하야히데, 3위가 나리타 타이신 순이었지만..


한달 전과 달라진 날카로운 스퍼트로 문전에서 승리를 낚아챈건 나리타 타이신이었다. 2착은 비와 하야히데. 위닝 티켓은 막판에 발이 무뎌지며 시클레논 셰리프에게도 뒤처진 4착. 선두와는 2마신차. 한달 전의 승리를 그대로 돌려받은 격차였다.


그리고 한달 뒤 5월 30일 60회 일본 더비. 비와 하야히데, 나리타 타이신, 위닝 티켓은 BNW 트리오라 불리며 인기를 3분하고 있었다. 단승 인기는 위닝 티켓이 3.6배, 비와 하야히데가 3.9배, 나리타 타이신이 4.0배. 사츠키상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묘하게 위닝 티켓이 가장 인기가 높았다.


더비를 앞두고 이 3강의 안장에 앉은 기수들은 각자 이 말로 더비를 이겨야 한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19번째의 더비 도전인 시바타, 젊은 기수의 실수로 패배한 탓에 대신 비와 하야히데의 주전이 된 이상 타이틀을 따야 체면이 설 오카베, 젊은 천재로 불리며 이미 여러 GI을 따냈으나 아직 더비 우승은 없는 타케. 져서는 안되는 3명과 3마리.


스타트와 동시에 멀티 맥스의 미나이 카츠미가 낙마하며 어수선하게 시작된 더비. 비와 하야히데가 중단, 약간 뒤에 위닝 티켓, 최후방에 나리타 타이신이 위치하며 경주가 전개됐다. 4코너를 돌며 위닝 티켓이 인코스를 바짝 파고들며 먼저 앞선으로 나서지만, 직선 공방에서 비와 하야히데와 나리타 타이신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추격, 턱밑까지 쫓아온다. 반면 위닝 티켓은 눈에 띄게 스퍼트가 떨어지는 모습이라 곧 제껴질 것으로 보였지만...



50m 남짓 남겨두고 별안간 다시 기세가 살아나며 격차를 늘리더니 그대로 골인. 시바타의 18전 19기가 여기서 마무리됐다. 17만 관중의 마사토 콜은 덤.

말의 이름 그대로, 기수 생활 27년만에 받아든 더비 승리의 티켓.

시바타는 승리 인터뷰에서 "세계의 호스맨들에게 60회 일본 더비를 우승한 시바타 마사토라고 전하고 싶다"라고 그 기쁨을 드러냈고,

이토 조교사도 "마사토에게 더비를 선물할 수 있어서 기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드라마라면 보통 이 시점에서 완벽한 해피 엔딩으로 끝나겠지만, 더비 후에도 경주마는 계속 달리고, 기수도 계속해서 말을 타는 법. 가을의 복귀전인 교토 신문배에서는 승리하지만 클래식 삼관인 킷카상에선 여름 내내 언덕코스 훈련으로 머리만큼이나 근육도 커져 괴물이 된 비와 하야히데에게 무려 5마신차의 3착 완패. 재팬 컵에서도 레거시 월드에게 밀려 3착. 연말의 아리마 기념에서는 1년만에 컴백한 토우카이 테이오가 비와 하야히데를 간발의 차로 제치고 기적의 부활을 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11착으로 완패한다.


94년엔 미국 원정을 계획했으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상반기를 통째로 쉬고, 그 사이 주전 기수인 시바타 마사토는 낙마로 중상을 입어, 조카인 시바타 요시토미에게 안장이 넘어갔다. 7월에 타카마츠노미야배(GII)에 출전했으나 5착 패배. 타케 유타카가 다시 안장을 이어 받아 올커머(GII)에 나서 비와 하야히데와 재대결을 벌였지만, 이미 상반기에 천황상·春과 다카라즈카 기념을 쓸어담으며 건드릴수 없는 괴물이 되어 있던 비와 하야히데는 잡을수 없는 상대였고 1과 3/4마신차로 2착 패배를 기록했다.


그리고 마지막 경주가 된 천황상·秋, 나리타 타이신을 포함해 3강 재대결이 성립될 전망이었지만, 경주 직전 나리타 타이신이 굴건염에 걸려 이탈, 본 경주에서는 위닝 티켓과 비와 하야히데가 나란히 부진하며 각자 8착과 5착에 그치고, 두 마리 다 경기 직후 굴건염으로 판정, 나란히 은퇴한다. 시바타 마사토는 그 한달 전에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그대로 은퇴 선언. 93년 클래식을 수놓았던 BNW 트리오는 이렇게 94년 가을을 기점으로 거짓말처럼 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은퇴한 위닝 티켓은 시즈나이로 옮겨져 씨수말로 전업했지만, 자식들 중 중앙 중상을 이긴 말이 단 한 마리라는 처참한 결과를 안고 2005년에 씨수말 은퇴, 거세 후 공로마 휴양 시설인 AERU로 옮겨져 여생을 보내고 있다.



출처 : 우마무스메 캐릭터 소개 26 - 위닝 티켓(ウイニングチケット) - 우마무스메 갤러리 (dcinsi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