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리 캡의 아비는 댄싱 캡, 어미는 화이트 나루비. 댄싱 캡은 좋은 성적을 가진 말은 아니었고, 아버지가 종마 성적이 좋은 말인 "네이티브 댄서"였기에 딱히 출주 전적이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지방에서 그럭저럭 행복하게 종마생활을 보내는, 그저 그런 3류 혈통 말 1이었음.


그런 어미와 아비 사이에서 오구리 캡은 1985년 3월 27일 태어남.


선천적으로 무릎 장애가 있었기에 그런 장애에 굴하지 말고 발랄하고 씩씩하게 자라달라는 의미를 담아 어릴적 아명을 하츠라츠(ハツラツ, 일본어로 발랄)라고 지어줬다고 함. 어미인 화이트 나루비가 고루시급으로 괴팍하고 이상한 말이었어서 젖이 안나오기도 했고 자식들한테 젖 주기를 싫어했다고 함. 그래서 말을 돌보는 구무원들의 손에 키워졌고, 어머니의 젖을 빨지 못하던 오구리는 닥치는 대로 지푸라기면 지푸라기, 잔디면 잔디 모조리 먹어치우고 다녔다고 함. 오구리가 많이 먹는 거? 고증입니다~


무릎에 있던 장애도 다 자란 뒤 발굽을 깎아서 달리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하고서 맞이한, 카사마츠 경마장에서의 첫 데뷔전. 1번 인기였던 상대는 데뷔 이전부터 소질이 있다고 평가받았던 마치 토쇼. 마치에 이어 2번 인기를 받은 오구리는 결국 2착에 그치고 말음. 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나간 다음 레이스와 다다음 레이스에서는 바로 1착 1착을 거두면서 오구리는 소질을 보이기 시작함.


4전째에서 다시 만난 마치 토쇼. 마치를 이기기 위해 혼을 담아 싸워온 오구리. 하지만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고, 결국 또 다시 마치에게 패배하고 만다. 패배 원인은, 구무원이 똑바로 관리하지 않은 발굽. 4전 이후 구무원이 바뀌었을 때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이 오구리의 발굽이 거의 썩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마치에게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지 못했던 것. 바뀐 구무원은 정성껏 오구리를 치료해줬고 이후 오구리는 제대로 뛸 수 있게 되자 마치 날아다니듯 5전째를 승리. 6전째부터 안도 카츠미(安藤勝己) 기수를 만나 7연승을 거두면서 중앙 경마에서 눈독들이는 인재가 됨.


덤으로 안도 카츠미 기수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원래 지방에서 190전 이상 뛰었던 베테랑 기수인데 2003년 중앙으로 이적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중앙으로 오고자 시험을 침. 근데 경마계 다른 베테랑 조교사, 기수 등등이 190전 이상 뛴 베테랑 기수를 최우선으로 모셔오지 못 할 망정 햇병아리들이랑 똑같이 시험을 치게 하면 어쩌자는 거냐며 대규모로 반발했고, 이때부터 지방에서 중앙으로 기수가 이적할 때 20승 이상을 올린 기수들은 시험 없이 즉시 중앙으로 이적할 수 있게 룰이 개편되었고 안도 카츠미 기수부터 이 룰이 적용되어 중앙으로 이적함. 안도 카츠미 기수가 탄 말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다이와 스칼렛으로, 스칼렛의 12번의 레이스에서 2착 이하로 놓치지 않은 게 바로 안도 카츠미의 실력임.


다시 오구리 얘기로 돌아와서, 오구리는 카사마츠와 주쿄 1번, 나고야 1번을 합해 총 12전 10승이라는 미친 성적을 거두고 있었음. 때문에 중앙 경마협회 측에서는 "오 얘 좀 뛰는데? 함 중앙 데꼬와볼까?"라는 움직임이 있었고, 오구리 캡의 마주는 마치 늙은 농부가 소를 떠나보내듯 오구리를 축복하며 중앙으로 보냈음.


그렇게 중앙으로 이적해서, 카와치 히로시(河内洋) 그리고 미나이 카츠미(南井克巳) 기수를 만나 G3, G2를 6연승하게 됨. 이 때가 오구리 캡이 당시 4살, 현재식으로는 3살일 시절. 하지만 외국에서 들여온 외산마도 아닌 오구리 캡이 왜 클래식 경주인 사츠키 더비를 뛰지 않았을까?


그건 바로 출주 등록이 늦어져서. 오구리는 1월 10일 카사마츠에서 골드 쥬니어 경기를 뛰고 이적한 뒤 3월 6일 페가수스 스테이크스를 뛰었는데, 그러고서 클래식에의 출주를 등록하려고 보니까 이미 출주 등록이 마감됐고 늦었다는 거임. 더비에 반드시 나가고 싶어했던 오구리 캡 관계자들은 더비 등록 기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어림도 없었음.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클래식 G1이 아닌 G3와 G2를 연파할 수밖에 없었음.


나중에 가서야 출주 등록이 늦은 말에게 특수 절차를 통한 출주 등록이 가능해짐. 그리고 이걸 통해 처음으로 늦은 출주 등록을 하고, 그리고 사츠키상에서 훌륭하게 3강 어드마이어 베가와 나리타 톱 로드를 제치고 첫 G1을 따내는 말이 바로 연간 무패의 전설, 세기말 패왕 티엠 오페라 오임.


아무튼 이렇게 더비도 못 나가긴 했지만, 역으로 오구리 캡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음.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이렇게나 잘한대", "출주 등록이 늦어져서 아쉽게 더비를 못 나갔대", "회색 털인데도 잘 뛰네", "그러게, 똑같은 회색털인 타마모 크로스와 붙으면 어떨까?"


타마모 크로스.


회색 말은 잘 뛰지 못한다, 라는 요상한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쳐부순 말.

오구리가 집중받는 건 당시 엘리트주의에 찌들어 좋은 대학, 좋은 도시 출신의 사람들만을 뽑아댔던 당대 일본 사회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말이 성공해 중앙의 말들에게 패배를 안겨주고 다닌다는 성공 신화도 있었지만 타마모 크로스와의 대결 또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함. 가을 텐노상의 전초전인 마이니치 왕관에서 1번 인기 1착으로 카와치 히로시 기수와 함께 우승한 오구리 캡은 다음 목표를, 눈을 들어 저 위의 가을 텐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음. 그리고, 그 경기에는 당시 전성기에 막 돌입한 나니와의 하얀 번개 타마모 크로스가 출주 예정이었음.



오구리 캡인가, 타마모 크로스인가.

결과는 타마모 크로스였다. 1 1/4마신 차이로 선행 작전의 타마모 크로스 승리. 오구리는 중앙에서 첫 패배를 맞이함. 타마모 크로스는 이 가을 텐노상 제패를 통해 봄-가을 텐노상 연파라는 대단한 성적을 냄.


오구리 캡의 마방은 분위기가 다운되기 시작함. 더군다나 오구리 캡을 중앙으로 데려온 2번째 마주인 사하시 이소오 씨가 탈세 혐의에 연루되면서,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관계자들은 우왕좌왕했으며 조교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


어찌 됐건 이미 출주 등록을 했기에 나간 재팬 컵에서는 추입 작전을 펼친 타마모 크로스도 타마모 크로스대로, 어수선하던 오구리 캡도 오구리 캡대로 9번 인기였던 페이 더 버틀러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리며 타마모는 2착, 오구리는 3착에 끝마침. 게다가 오구리는 1코너에서는 선행 작전대로 4순위까지 잘 가다가 2코너에서 흥분했는지 멋대로 페이스를 올려 3순위로 올라서고는 3, 4코너에서는 7순위, 8순위라는, 자칫하다가는 마군사 당할뻔한 순위에까지 몰려있기까지 했었음.


재팬 컵에서의 패배 이후 사하시 이소오 마주는 탈세 혐의는 탈세 혐의대로 조사를 받고, 오구리는 오구리대로 잘 뛰게 해야 한다는 마인드로 다시 조교를 열심히 할 것을 부탁했고, 그런 상태에서 오구리 캡은 기수가 카와치 히로시에서 오카베 유키오(岡部幸雄) 기수로 교체된 채 아리마 기념에서 은퇴를 선언한 타마모 크로스를 다시 한 번 맞이하러 감.



원래대로 돌아온 조교 + 바뀐 기수. 회색 털의 괴물 오구리 캡과 원조 천재 오카베 유키오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완벽하게 보여주는 그림이었음. 아리마에서 우승하면서 대미를 장식하려던 타마모 크로스는 추입 작전이 잘 먹혀드는 듯 했으나 결국 오구리의 벽을 넘지는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음. 회색마끼리 단 두번의 싸움 뿐이었지만 오카베 유키오 기수는 이미 타마모 크로스의 달리기 방식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상대인 타마모 크로스와 미나이 카츠미 기수는 카와치 히로시 기수만을 봐왔지 오카베 유키오 기수가 오구리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약간 달라진 달리기 방식을 넘지 못했던 것. 그렇게 오구리는 중앙으로 이적해온 지 G3 3번, G2 3번, G1 3번 총 9번의 경주만으로 온 국민에게 관심을 받고 심지어는 당대 일본 총리까지도 오구리 캡에 열렬한 환호를 보낼 정도가 되었음.


하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