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닝 티켓의 더비 때의 기수 시바타 마사토(柴田政人).


1984년 12월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스크럼 다이나로 첫 G1 제패.

1985년에는 2번째 3관마 신잔의 아들 2관마 미호 신잔에 기승하며 사츠키상과 킷카상 승리 기수의 이름을 획득.

아쉽게도 미호 신잔은 부상으로 더비에는 출주하지 못했고, 대신 시바타 기수가 더비에서 탄 말은 메지로 제스터 11착마.

다음해 페르시안 보이로 타카라즈카, 또 다음해에는 미호 신잔과 프레쉬 보이스로 각각 천황상, 야스다 기념도 승리.

1989년 12월에는 이나리 원에 기승해 아리마 기념을 따며 그랑프리 2관 승리 기수가 되었음.


하지만 그 이후로 4년간 이어지는 G1 미승리, 슬슬 은퇴하려고 마음 먹었던 시바타 마사토에게

위닝 티켓의 조교사였던 이토 유지(伊藤雄二) 조교사가 말을 걸었다, "더비 조키가 되고 싶지 않냐"고.

은퇴 전에 적어도 더비만큼은 따고 싶었던 시바타 마사토는 승낙했고 위닝 티켓은 시바타 마사토에게 더비 승리로의 티켓을 선물했다.


이토 조교사가 그 해 더비를 조종했던 걸까.

당연히 NO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정답은 바로 "이토 조교사의 혜안"이었다.

1966년 기수를 은퇴하고 조교사가 된 뒤 18년, 그에게는 이미 어떤 말이 어떻게 자라날 지가 눈에 훤했다.

이토 조교사에게 위닝 티켓은 더비마가 될 것이 보였다고.

때문에 위닝 티켓의 마주 오오타 요시미(太田 美實)에게 "이 말은 더비를 제패할 것 같다"고 곧잘 말하곤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교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시대였고,

아직까지 더비 승리가 없던 시바타에게 은퇴 전 마지막으로 더비 승리를 안겨주고자 자기가 "더비마로 점찍은" 위닝 티켓의 기승을 맡겼다고 한다.


이토 조교사의 혜안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꽤 공공연히 알려진 것이었고

그런 이토 조교사가 위닝 티켓과 시바타 마사토가 더비를 제패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기에

당연 시바타 기수는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부담감이 컸다고 한다.

혹자는 시바타의 더비 직전 인터뷰 불응은 이러한 부담감 또는 조교에 대한 전념으로부터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토 조교사의 혜안은 결국 훌륭하게 적중해, 위닝 티켓과 시바타 마사토는 나리타 타이신과 비와 하야히데를 멋지게 격파하였다.

시바타 마사토는 "세계의 호스맨에게. 제 60회 일본 더비를 승리한 시바타 마사토라고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인터뷰를 남기며

위닝 티켓과 함께 그의 기수 생애 마지막 G1 승리를 장식했다.


이후 시바타는 다음해 4월 말의 골절로 인한 낙마 사고로 경추에 손상이 왔고 9월에 은퇴를 표명, 다음 해 2월 26일에 기수에서 물러나게 된다.




덤으로 나리타 브라이언의 조교사였던 오오쿠보 마사아키(大久保正陽) 조교사도 이토 조교사와 비슷하게

재능은 있으나 10년째 더비 승리가 없던 미나이 카츠미(南井克巳) 기수에게 "삼관 조키가 되어보지 않겠나"며 나리타 브라이언 기승을 부탁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