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젠스키

[슈퍼카(スーパーカー)]

원본이 되는 레이스는 특정적이진 않고 그냥 마루젠이 출주한 8개의 레이스 전부라고 보면 될 듯. 당시 일본에 일었던 외국산 자동차 붐에 힘입어 똑같은 외국산 반입마인 마루젠스키에게 슈퍼카라는 별명을 당시 언론에서 붙였었는데 그걸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음. 신마전을 약 15마신(대차)차로 승리했고, 그 다음에도 이어지는 총 7전의 레이스를 9마신, 코차이, 13마신(대차), 1/2마신, 7마신, 7마신, 10마신으로 승리함. 보통 한 말이 특정 레이스의 레코드를 한 개 가지고 있기도 힘듬. 예시로 라이스가 국화상에서 레코드를 냈지만 바로 다음해 비와 하야히데에게 레코드를 또 갱신당한다던가. 그럼에도 마루젠스키는 20여년간 깨지지 않는 레코드를 2개 가지고 있던 유일한 말임. 마루젠의 총 전적 8전의 착차를 모두 더하면 약 61이 나오고, 이를 8로 나누면 7.625가 나옴. 마루젠스키의 고유 칭호 조건이 "무패로 8연승 이상을 거두고, 평균 7마신 이상의 차이로 우승한다"인 이유가 바로 이거임. 덤으로 마루젠스키의 고유 칭호 조건은 원본보다도 오히려 너프먹었음. 마루젠스키는 8전을 치루면서 전부 1번 인기였음. 말딸에는 평균 7마신 이상의 차이로 승리하는 것부터가 어렵기 때문에 1번 인기 조건을 알파 테스트때는 넣었다가 나중에 뺐다고 함. 하지만 마루젠스키 원본마가 그렇게 크게 활약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마루젠스키가 외국에서 반입해온, 외산마였기 때문임. 클래식은 물론 타카라즈카 기념이나 아리마 기념 외의 모든 8대경주(당시에는 G123 기준이 없었고 사츠키상, 벚꽃상, 봄텐노상, 타카라즈카 기념, 오크스, 국화상, 가을 텐노상, 아리마 기념을 한데 묶어 8대경주라 칭했음.)에 출주할 수가 없었음. 그래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존재함. 외국산 말이라 영광스러운 무대인 더비에 출주등록조차 못하는 걸 알게 되자 마루젠스키의 마주가 "(더비에 있어서 가장 불리하다고 일컬어지는) 제일 바깥쪽 게이트에 배정해줘도 좋다. 1착으로 들어오더라도 없는 셈 치고 다른 말을 1착으로 해도 좋다. 상금도 주지 않아도 좋다. 그 무대에서 뛸 수 있게만 해다오."라고 애원했다고 함. 그래도 더비는 출주할 수가 없었음. 결국 마루젠스키의 꿈은 아들 사쿠라 치요노 오가 더비에서 승리하고, 또 외손자 스페셜 위크가 더비에서 압승하면서 그제서야 이루어졌음.


후지 키세키

[아름다운 삼관 우마무스메(麗しの三冠ウマ娘)]

이쪽도 마찬가지로 원본이 되는 레이스는 없음. 왜냐면 얘는 실제로 삼관을 딴 적이 없거든. 데뷔전을 8마신 차로 승리하고 OP 레이스를 하나 거쳐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현 아사히 퓨처리티 스테이크스)와 야요이상까지 무패인 채로 승리. 사츠키상에서도 1번 인기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앞다리 계인대염이 발견돼서 사츠키상에도 출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은퇴함. 그럼에도 계인대염이 아니었다면 삼관을 딸 수 있었을 거라는 경마 팬들의 아쉬움에 "환상의 삼관마"라는 별명이 붙었고 우마무스메에서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 고유 칭호 조건에 삼관이 포함되어 있음. 고유 칭호 조건은 "데뷔전에서 8마신 이상의 차이를 두고 승리하고, 1번 인기로 아사히배 FS, 사츠키상, 일본 더비, 국화상에서 우승한다."인데 이는 위에 말했듯이 원본마가 데뷔전 8마신차 승리,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현 아사히배 FS)을 1번 인기로 승리했다는 사실과 은퇴만 아니었다면 삼관도 가능했을 거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붙여진 "환상의 삼관마"라는 별명을 합해 이루어진 조건임. 게다가 은퇴가 아니었다면 삼관도 가능했을 거라는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했던 것이, 후지 키세키의 산구 성적이 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임. 대표적으로 두 마리만 말해보자면, 첫 번째로는 카네히키리가 있음. 04년 데뷔로, 딥 임팩트랑 마주도 같고 나이도 같음. 딥이 잔디에서 뛰었던 반면 카네히키리는 더트에서 뛰었고, 더트 G1 7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더트의 딥 임팩트라는 별명이 붙음. 두 번째로는 킨샤사노 키세키가 있음. 05년 데뷔한 단거리마고 은퇴 전 말년에 10년 11년 타카마츠노미야 기념을 연속으로 제패함. 이처럼 후지 자체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종마로서의 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고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함.


오구리 캡

[아이돌 우마무스메(アイドルウマ娘)]

원본이 되는 레이스는 오구리의 은퇴전이자 라스트 런인 1990년 아리마 기념이라고 생각됨. 지방에서 올라와 중앙에 있던 여러 강자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고 스스로 그 정점에 서는 모습은, 엘리트주의에 찌들어 실적이 아닌 나온 대학, 인맥, 가정 형편등만 가지고서 평가를 내리던 당대 일본 사회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음. 물론 언론 플레이가 엄청나게 잘 먹혀든 점도 있지만, 혹자는 그러한 언론 플레이가 오구리 캡과 비슷하게 지방에서 시작해 중앙으로 출세, 결국에는 총리까지 하게 된 당대 일본 총리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게 아닐까 라는 평가를 내렸음. 어쨌건 간에 오구리 캡은 지방에서 중앙으로의 출세와 활약, 타마모 크로스와의 회색 털 대결, 헤이세이 3강 간의 치열한 접전 등 당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다 있는 말이었음. 아니 어쩌면 진짜 만화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주인공스러운 말이었을지도 모름. 이런 오구리의 인기에 힘입어 전 일본에는 제 2차 경마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전까지는 한국 경마마냥 칙칙한 아재들만 모여있던 경마장에 20대들, 여성들, 심지어는 가족 단위로 관람을 하러 오는 팬이 늘어나게 됨. (제 1차 붐은 오구리랑 비슷하게 지방에서 성공해서 올라왔지만, 언론이 그걸 까대니까 역으로 팬들이 늘어난 케이스인 하이세이코.) 거기다가 일본 경마협회 JRA 측에서 실시했던, 도박으로써의 경마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스포츠 경기로써의 경마의 이미지를 씌우려는 시도가 완벽하게 먹혀들면서 일본에서는 야구와 쌍벽을 이루는 국민적 스포츠가 되었음. 오구리 캡은 또 하나의 일본 경마 역사상 빼먹을 수 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말 인형"임. 일본 경마에서는 G1 승리마나 인기마를 쁘띠하게 만든 천 인형인 "아이돌 호스"라는 인형을 매 경주마다 팔고 있음. 전국적으로 지금까지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고, 구매도 쉽기 때문에 경마 팬이다 하면 집에 이 아이돌 호스 인형을 한두개쯤 가지고 있는게 당연할 정도. 이 아이돌 호스 인형이 처음으로 제작된 게 바로 오구리 캡의 인형임.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감을 못 잡을 것 같으니까 단순 수치로만 설명하자면 이렇게 됨. 오구리 인형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인터넷 주문이 없었고 경마장에서 직접 팔았는데, 그렇게 해서 딱 2년동안 판 오구리 인형의 개수를 세어 보니 300만개였음. 거기다 전국 각지의 게임 센터 등에 비치된 인형 뽑기 기계에 넣기 위해 주문을 받았고, 앞의 300만개에 인형 뽑기용 인형으로 판 인형까지 모조리 합하니 그 개수가 1100만 개였다고 함. 이외에도 오구리 굿즈는 엄청나게 팔렸는데, 오구리의 경기나 그 일상을 담은 비디오테이프가 3만개, 소리만을 담은 카세트테이프가 1만개, 사진집 2만부에 달력 5만 부 등등. 심지어 아예 사지 말라고 전시해둔 80만 엔(당시 천만원 즈음)짜리 오구리 동상도 주문이 20건 이상 쇄도했다고 함. 그렇게 오구리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벌어들인 매상액이 당시 기준 100억 엔이라고 했으니 오구리의 인기가 얼만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음. 그런 오구리의 인기를 반영해, 고유 칭호 조건에는 "팬 수 24만 명 이상"이 붙어있음. 그 외 조건인 "G1에 1번 인기로 6번 출전"은 본래 1번 인기로 G1을 7번 출전했던 걸 너프시킨 거고, "마일CS, 야스다 기념, 아리마 기념에서 우승" 또한 오구리가 달성해낸 업적임. 그런 초절정 인기마 오구리 캡이었지만 경주마로써의 마생은 순탄치 않았음. 중앙으로 올라온지 3년차 되는 해에 오구리가 부상을 입어 본래라면 봄 텐노상이나 타카라즈카 기념 등에 나갈 예정이었던 것이 싸그리 뒤집어졌음. 게다가 오구리의 마주가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 오구리는 1년에 3억 엔, 2년 5.5억 엔을 조건으로 임대됨. 어떻게든 2년간 5.5억을 메꿔야 했던 새로운 마주는 오구리를 혹사시켰고, 말딸에서조차 불가능한 마일 챔피언십 → 재팬 컵이라는 혹독한 로테이션으로 오구리를 굴렸음. 심지어 극성 오구리 팬들이 오구리가 쉬는 목장에 침입해 오구리를 사진찍는다던지, 갈기털을 잘라간다던지 하는 미친 짓을 했고 이에 오구리의 컨디션은 나날이 하락함. 결국 89년 아리마 기념은 5착에 불과했고 그 다음 해에는 가을 텐노상 6착, 재팬 컵 11착 등 오구리는 이제 끝났다는 소리를 들을 즈음 결국 마지막으로 은퇴전으로 아리마 기념을 선택해 출전시킴. 기수는 타케 유타카. 똥말 취급받던 슈퍼 크릭을 G1마로 훌륭히 기승해내면서 희대의 천재 소리를 듣기 시작할 때 쯤이었음. 천재답게 타케 유타카는 조교 중 오구리의 버릇을 완벽히 파악했고, 아리마 기념에서는 이를 완벽히 극복해내면서 4번 인기임에도 불구하고 1착을 달성, 전 일본 경마 팬들의 우렁찬 환호성을 받으며 은퇴전을 승리로 마무리했음. 그리고 그때 나온 중계가 바로 "오구리 1착! (×4) 훌륭하게 은퇴 레이스, 은퇴의 꽃길을 장식했습니다! 슈퍼 호스입니다! 오구리 캡 입니다!" 오구리 캡이 평소에 언론에서도 아이돌이라고 다뤄졌고, 오구리를 시작으로 이어진 경마장의 인형 굿즈 이름이 아이돌 호스라는 점, 그리고 은퇴 레이스에서도 슈퍼 호스, 아이돌 호스라고 언급되기에 거기서 그대로 따온 것으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