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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사온 커피로 나를 달래며, 새벽을 짓눌렀다.

여태 걸어왔던 발자취를 따라 믿음을 다시 한번 아로새겼다.

동영상 속 발전해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그저 외로운 나를 비춰줬다.

어르신 말씀이 옳다. 지금까지를 나를 믿어준 그녀를 내가 놓아줄 수 없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정신을 맑고 올곧았다.

학원 내 비치된 샤워실에서 몸을 씻은 뒤 정문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왕!"


뒤에서 나를 향해 소리쳐 깜짝놀라 몸을 웅크렸다.

놀란 나를 보며 해맑게 웃어보이는 그녀

검은 후드티에 치마를 입은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후드를 쓰고 있었다.

'놀랬어? 놀랬어?'하며 내 주변을 방방 뛰어다녔다. 


"새벽이라 쌀쌀하긴 하지?"


"음? 아~ 모자 안이 궁금했구나? 짜란!"


말을 한 뒤 모자를 가르키니 후드를 벗어보였다.

모자를 벗은 그녀의 머리는 단정하게 잘린 단발이었다.

어제 저녁을 먹고 헤어질 때 까지만 해도 분명 긴 생머리였는데.


"어제 자른거야?"


"응! 조금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면 해봐야지. 트레이너..

베이퍼 단발은 어울려서 실망한거야?"


"아니, 그냥 단발도 예쁘구나 싶어ㅅ.." 


'아...!'


"헤에! 트레이너 지금 베이퍼 예쁘다고 했지? 했네!" 

상체만 내 쪽으로 쭉 뻗으며 나를 올려다 보며 놀렸다.


"음.. 차 가져올게."


"예쁜 베이퍼는 오래 기다리는 거 싫으니까, 빨리 와야 해."


붉어진 뺨을 가리기 위해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픽업을 하고 경기장까지 가는 길 내내 놀림받았다.

차라리 긴장되어 경직된 상태로 가는 것 보단 좋다고 생각되지만..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자, 관계자가 들어섰다.

이미 알고 있었던 소식이라도 1% 가능성을 소망하고 있었다. 

결국 골드 쉽과 데뷔전을 치뤄야 하는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연신 당일 이런 소식을 말해 죄송하다는 관계자에게 화를 내 무엇하리.

그저 알겠다며 관계자를 보냈다. 아마 전 대기실까지 온갖 욕이란 욕은 들었을 게 뻔했다.

자신의 담당이 화려하게 데뷔전 1착하길 바라며 참가하는 것이지 남 들러리 세우려고 오는 게 아니니까.

헤드셋으로 노래를 들으며 긴장을 푸는 베이퍼에게 소식을 알려야했다.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니 내쪽으로 의자를 돌리곤 헤드셋을 책상에 올렸다.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번 경기에.. 골드 쉽이 나올거야."


"..?"


"걱정마. 하던대로 하면 충분히 우리 페이스대로 경기에 임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눈이 동그래지며 귀가 바짝 섰다. 놀라는 게 당연하지.

어쩔 수 없이 소식을 전했지만, 내심 동요하지 않았으면 바랬다.


"흥! 상관없어. 베이퍼는 트레이너를 믿으니까. 트레이너 말대로

우리가 이길거야."


베이퍼는 팔짱을 끼곤 조심스런 내게 말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한심한 고민으로 시간을 지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리곤 다시 헤드셋을 낀 그녀를 뒤로 한체로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혹여나 그녀의 밸런스가 무너질까 시합전까지 베이퍼의 의지대로 쉬도록 냅뒀다.

그때까지 밀려있던 골드 쉽의 영상을 모두 분석하고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 지 방안을 찾아야만 했다.


레이스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일단 극단적으로 후방에서 힘을 아끼며 페이스를 유지한다.

중후반부터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바깥쪽에서 치고 올라온다.

긴 신체로 성큼성큼 달리는 게 순간이동처럼 보였다.

바깥쪽에서 달려오는 골드 쉽을 마크만 할 수 있으면 밸런스가 무너질 것 이다.

또 한번 관계자가 문을 열고 남은 시간을 말해주었다.


"60분 남았습니다. 이제 패덕으로 올라오셔야 합니다."


뒤돌아 앉은 베이퍼를 부르고 마지막 전략을 말해줬다.


"여태 경기를 보면, 골드 쉽은 아무런 방해없이 바깥쪽에서 치고 올라왔어.

이번 레이스에서 또 다시 그런다면 그녀를 마크해.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당황할거야.

그때가 기회야."


 

베이퍼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실에서 나와 아무 말 없이 패덕으로 향했다.

주변에서 트레이너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선수들로 가득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불빛과 엄청난 환호성들로 넘쳐났다.

그녀의 발이 점점 멀어질 때 소리쳤다.

"결승선 맨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힘내!"


"응!"


찬란하게 빛나는 머릿결을 흩날리며 뒤를 돌아봤다.

역광으로 보이지 않는 그녀의 표정을 두고 서둘러 트레이너 관람석으로 달렸다.

아나운서는 순서대로 우마무스메를 불렀다.

하나 하나 빛나는 우마무스메들이 자신을 뽐낸 뒤 무대 뒤 편으로 들어섰다.

관람객들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그들의 데뷔를 축하해줬다.


그리고 순서상 마지막. 골드 쉽에선 귀청이 찢어질 정도의 함성이 쏟아졌다.

그녀도 이를 만끽하는 제스처를 보이며 프로다운 모습을 보였다.

골드 쉽의 순서마저 끝이 나고 다들 게이트 앞에 섰다.


아나운서는 게이트 순대로 이름을 불렀다.

내가 게이트에 서 있는 것 처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고요한 경기장 속 찰나의 순간에 폭발음과 함께 발구르는 소리로 가득찼다.


초반 선두는 도주로 달리던 2명의 우마무스메였다.

둘이 1위를 번갈아가며 경쟁을 하다 서서히 뒤에서 달리던 '크레이지 인 러브'와

뒤 따르던 '바이트 알 히크마'와 함께 4인 체제로 선두를 경쟁했다.


중반 선두 순위는 딱히 변함없이 중간에선 베이퍼를 중심으로 치열한 몸싸움이 일어났다.

베이퍼를 피하기 위해 '수아르 셀레스테'와 '카우리라리스' 2명의 우마무스메는 이른 시점에서

페이스를 올렸다. 트레이너인 내가 바라봤을 때 이미 밸런스가 무너졌다.


베이퍼는 그녀가 하던대로 말 그대로 숙청을 내는 중이었다.

그녀와의 몸싸움 도중 스스로 무너지는 우마무스메들이 우후죽순이었다.

선입, 선행 가리지 않고 주변에 있다면 서슴없이 싸움을 걸었지만, 그녀의 페이스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우리가 연습하던 경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베이퍼에게 있어서 마군사란 단어는 없을 예정이고, 없다.

그건 그녀를 트레이닝 한 내가 장담할 수 있다.

단언코 그녀가 느렸기에 진 경기는 있을 지 언정 몸싸움에 져서 무너지는 경기는 없을거다.


몸통을 박살낸 그녀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선두의 끝부분에 닿을 무렵이었다.

일제히 환호성을 내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골드 쉽! 골드 쉽! 베이퍼로 인해 무너진 꼬리에서 홀로 고고히 바깥에서 치고 올라옵니다."


우려하던 일이 시작되었다. 골드 쉽은 처음부터 꼬리에서 몸을 아끼는 전략이다.

베이퍼가 아무리 중단을 끊어내도 그녀에겐 아무 일도 아니었다.


"4번째 코너 느티나무로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골드 쉽! 골드 쉽!

느티나무로 들어서기 전 베이퍼의 옆을 지나칩니다! 과연 제치고 선두로 올라갈 수 있을지!

서서히 선두부터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골드 쉽! 골드 쉽의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홀로 나오는 베이퍼! 이번에도 베이퍼인가요! 앗! 이제야 골드 쉽의 모습이 보입니다.

베이퍼 달립니다. 5착 베이퍼! 히크마를 제칩니다! 1착 셀레스테까지 이제 5마신!

4마신! 카우리라리스를 체력이 부족한 지 점차 스피드가 떨어집니다! 

6착 골드쉽과 후발이 너무나도 멉니다!"


느티나무 뒤에서 그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 모르겠지만.

이제 결승선까지 200m 최대 위험요소인 골드 쉽이 사라진 이상 오로지 그녀의 다리만 믿을 뿐이다.


"삿포로의 직선은 짧습니다. 선입에게 불리한 경기장! 선두 5명 중 3명이 선입! 엄청납니다!

서서히 베이퍼와 선두의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합니다. 러브에게 1착을 넘겨주며 뒤로 밀려나는

셀레스테! 앗, 위험하다! 셀레스테! 베이퍼에게 2착을! 2착을 넘겨주며 뒤로 밀려납니다!"


50m, 1마신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내 눈에 보였다. 베이퍼와 러브 사이가

좁혀지는 모습이.


"러브와 베이퍼! 베이퍼와 러브! 눈으로 도무지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3착 셀레스테! 4착.."


이번 경기의 최대 관심사는 이미 베이퍼로 바뀐지 오래였다.


'1착은 러브였다!', '아니다! 발이 먼저 들어온 베이퍼였다.'등으로

한참을 떠들썩거렸다. 곧이어 결과 발표를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삿포로 주니어 데뷔전, 1착과 2착의 마신차는 코차이! 1착은 7번 매커니컬 베이퍼!"


"해냈다!!"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경기장으로 달려들어가 쉬고있던 베이퍼에게 안겼다.


"트레이너.. 우리가 해낸거야?"


"그럼! 베이퍼가 1착이야! 우리가 이겼어!"


조금은 진정이 되고 위닝라이브가 시작되었다.

무대 중앙에서 환하게 빛나는 베스페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녀를 나카야마의  중심에 선보이고 말겠어."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시니어 나카야마 경기장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아리마 기념, 물론 언제나 그 엄청난 열기로 가득차는 경기장이지만!

올해만큼은 더 특별하지 않나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골드 쉽과 베이퍼. 베이퍼와 골드 쉽이 만나는 5번째 경기입니다.

현재까지 4전 2승 2패! 엄청난 라이벌 관계죠."


"네, 그렇죠. 주니어 데뷔전을 시작으로 클래식에서 사츠키상, 일본 더비! 끝으로 올해 치뤄진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중거리에서만 이미 네번째 치뤘습니다!"


"둘이 치루는 장거리는 사실 이번 아리마가 처음입니다. 파천황 골드 쉽과 뇌제 매커니컬 베이퍼

승부를 섣불리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최근 골드 쉽에 경우 중거리는 물론 장거리에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만, 베이퍼는 장거리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일과 중거리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죠. 조심스럽지만 골드 쉽이 우위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해설이 뭐라 하든 들을 필요없다. 

'몸싸움을 자주 거는 건 선두에 있는 우마무스메를 돕는 짓이다.'라던

트레이너와 해설진들을 말에 증명이라도 하듯 당당히 1착을 하였다.


사츠키상에서 골드 쉽에게 패하고 베이퍼를 의심하는 이들 앞에서

모든 우마무스메들이 동경하는 더비 우마무스메가 되며 또 다시 증명했다.

텐노상 봄에선 하위권이었지만, 국화상에선 당당히 3착을 하며 입상을 해내고야 말았다.

3000m에서도 활약한 그녀가 2500m에 겁먹을 이유가 없다.


"경기 한 시간 전이라 패덕으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어이! 이번에도 결승선에 우주선을 준비해둘테니 서둘러 오라고!"


관계자 뒤로 귀마개를 낀 빨간 승부복의 우마무스메가 소리쳤다.

당황한 관계자가 이러면 안된다고 말려야 겨우 패덕으로 향했다.


뭔 사건이 있는지 모른 체 언제나처럼 헤드셋을 끼고 뒤를 돌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제 갈까?"


"응!"


이제는 꽤나 익숙해졌는지 패덕으로 나갈 때 까지 대화도 한참이었다.


"이번 경기로 골드 쉽과 승부가 나는데 안 떨려?"


"트레이너. 트레이너는 누가 이길 거 같아?"


"당연히 우리 뇌제 베이퍼지!"


"그래? 그럼 내기할까?"


"내..기? 갑자기?"


"나는 트레이너를 믿으니까."


그리곤 두 발짝 걸어간 후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트레이너 말대로 되면.. 내 인생을 맡길 수 있을 거 같은데. 트레이넌 어때?"


"에..에?"


"후흣. 그럼 결승선에서 답해줘, 기다릴게."


역광으로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간 내가 바라보던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생머리의 우마무스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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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게나마  나름 만족스런 결말을 내고 가는 거 같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좋지 않은 필력이지만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루 쉽도 좋아하는 우마무스메라 악역으로 삼기에 힘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