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그게 말이야.”



다이아의 냉정한 대답에, 나는 말끝을 떨며 굳어버렸다.


내가 다이아와 결혼한지도 8년, 여차저차 양가의 허락을 받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보니 나는 일을 놓은지 10년은 된 셈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쌍둥이 딸들은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고, 다이아도 새로운 직장에 정착했다.


나도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다이아가 없는 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빈 시간들이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예전 인연들이 떠올랐다.


아이를 돌보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현역 시절에는 많이 보내지 못했던 다이아와의 둘만의 시간은 이제 충분히 즐겼다.


이런 상황에서 옛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하나같이 소식이 다채로웠다.





코가 꿰여서 나처럼 결혼한 경우, 사고를 일으켜서 홋카이도에 요양을 하고 있는 경우, 무사히 은퇴하고 지금은 가게를 연 친구...


추억팔이나 하면서 그렇게 연락을 돌리던 와중, 한 후배에게 연락이 닿았다.


어릴때의 나와 닮아서 내가 좀 각별히 챙겨주었던 녀석은, 내 근황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배, 그럼 이제는 복직하는 건 어떻습니까? 간단한 서브 트레이너라도 좋습니다.’


‘제가 선배에게 받은 도움만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녀석은 듣기 좋은 대답을 해왔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현재에도 트레센은 인재가 부족한 것 같았다.


트레이너는 부족하고 말딸은 넘치는 트레센에서, 유부남 트레이너는 나쁘지 않은 인선이었다.


여자가 꼬일 일도 없고, 특히 트레이너였던 경험이 있어 능력도 어느 정도는 보장된 셈이었다.


후배의 설득과 무료한 일상에 질렸던 나는, 후배의 말에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지금, 딸들은 일찍 재우고 둘만의 오붓한 술자리에서 나는 무심코 다이아에게 말해버린거다.


...트레센에 복직하고 싶다는 말을, 무심결에.






“여보? 제가 물어봤잖아요?”


“어, 응.”


“그래서, 어째서죠?”






...위험하다.


다이아가 행복하게 만취되어 있어서, 무심코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 질러봤는데, 아니였던 모양이다.


방금까지 기분 좋게 취해있던 다이아는 없다.


밤 늦게 퇴근하고 내가 준비한 와인과 새우 오일 파스타를 즐기던 다이아는 없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건, 현역 때 나를 강제로 따먹은 다이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밤, 침대에서 용서를 구하기 싫었던 나는 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아니, 아무래도 내 실언이었던 것 같아. 복직이라니 어림도 없지.”


“그래요? 그렇죠?”


“..으..응, 그렇지. 애들도 아직 어리니까. 아무래도 좀 더 시간이 지나야..”


“오빠?”





윽, 숨이 막힌다.


방금 그 말은, 유부남이 가장 듣기 싫은 순간이 아닐까.


진지한 표정의 여보님이 나를 오빠로 부르는 순간은 반드시 내가 무언갈 잘못했다는 소리다.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걸 알고는, 한국 드라마를 모두 챙겨보더니 다이아가 얻은 지식이다.


숨이 턱 막힌 나를 보던 다이아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오빠, 제가 왜 이러는지 아세요?”


“..아, 알지.”


“왜인데요?”


“.......가족을 내팽겨치려고 하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어.. 어.. 그러니까..”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말고요 오빠, 정말 그거라고 생각해요?”


“....어, 아무래도 그거밖에 생각 안나네.”





나는 재빨리 복종의 자세를 취하기로 했다.


이럴때는 도게자의 자세로 싸움을 피하는게 상책이다. 내가 마눌님과 대립해오면서 얻은 지식 중에 하나다.


애초에 논리에서 이기면 졌다고 분한 다이아에게 짜인다. 버티다가 지면 정신 교육이 안 됐다고 짜인다.


다 쓴 치약처럼 짜이기 싫었던 나는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소심하게 포크를 돌렸다.


좋아, 누가봐도 개찌질한 패배견 같은 모습이다. 이걸로 다이아도 납득을...





“오빠.”


“···”


“오빠?”


“···”


“대답해, 안 그럼 화낸다.”


“..네 마눌님, 무슨 일이십니까요.”





납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연기를 간파한 다이아는, 너무 강해져 있었다.


현역때는 내가 저렇게 밀어 붙이고 다이아가 따르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순수하게 ‘네! 트레이너님!’ 이라고 외치며 수수하던 아이는 어디 갔을까...


상념에 빠져 있는 나를, 다이아는 다시 현실로 끌어들였다.





“오빠? 듣고 있어요?”


“아, 응.”


“어디까지 들었는데요?”


“아직도 너를 이해 못하고 있냐고, 네가 물어봤지.”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 듣고 있었네요.”


“아,하하, 그럴리가.”


“.....뭐, 좋아요. 그래서 오빠, 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어요?”


“그냥..”





나는 내가 살아남기 위한 정답을 골랐다.





“예뻐.”


“···”


“...앗, 이게 아닌데, 어.. 그게.. 헤헤...”


“......칫, 치사해. 연기인거 모를 줄 알아요?”


“아니, 연기가 아니라 정말인데.”


“알았어요. 그런걸로 할게요.”





좋아, 통했다. 다이아가 툴툴거리며 파스타를 다시 먹는다.


여기서 망설이지 않고 몰아붙인다. 계속 다이아를 챙겨줘야한다.


나는 내가 먹던 오일 파스타의 새우들을 다이아의 그릇에 넘겨주며 말했다.





“자, 이거도 마저 먹어.”


“안돼요. 살찐단 말이에요.”





더 몰아 붙인다.


다이아는 챙겨주는 정에 약하다, 그리고 저 말에 대한 정답도 나는 알고 있다.





“너 요즘 너무 말랐어, 오히려 더 쪄야해. 무슨 소리야.”


“...치.”


“정말이라니까? 아직도 학생처럼 보이는 애가 무슨...”


“아, 알았어요. 먹을게요. 먹는다고요..”





새우가 3점 올려져 있는 다이아의 포크를 보면서,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툴툴거리는 다이아의 볼이 귀엽게 부풀려진다. 화가 풀렸다는 증거다.


좋아, 이걸로 오늘 밤은 뾰이 없이 넘어갈 수 있....





“당신은 이게 문제에요.”


“....엉?”


“무슨 말인지 알아요?”


“...모..몰르겠는데?”





문득, 다이아가 정색하더니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처음 보는 패턴인데, 이거 위험한거 아닌가?


연기할 틈도 없이, 나는 바짝 긴장해버렸다.





“....아까 제가 화를 낸 이유는, 당신이 ‘아직’이라고 말해서 그래요.”




확실히, 아까 다이아와의 대화에서..


‘..으..응, 그렇지. 애들도 아직 어리니까. 아무래도 좀 더 시간이 지나야..’


라고 했었지, 그걸 듣고 다이아가 화가 난거구나.


여지를 주면 안 됐는데, 아무래도 좆된 것 같다.


툴툴거리던 다이아가 귀엽게 삐지며 포크로 파스타를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당신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하지만 그건 너한테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랬으면 제가 당신을 겁탈하지 않았을 걸요?”


“...그랬나?”


“그랬죠. 키타짱에게도, 크라운 양에게도, 슈발 그랑 양에게도 그러니 제가 속이 타요 안 타요?”


“....내가 그랬어?”


“그랬어요. 자각 없는 그 태도가 더 나빠요. 알아요 몰라요?”


“...미안.”


“안 미안해도 상관없어요. 여지가 생기기 전에 제가 선수를 쳤으니까요.”





흐흥, 소리를 내며 나를 키타산의 눈 앞에서 겁탈했던 다이아가 자랑스럽게 새우를 먹는다.


오물거리는 입을 보면서, 슬슬 상황이 끝나가는 걸 느꼈다.


왜냐고? 다이아가 불평의 이유를 모두 밝혔으니까. 더 이 상황을 끌기 싫다는 신호다.


이걸로 오늘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식기를 치우며 말을 꺼넀다.





“..그럼, 이제 자러갈까.”




내 말에, 눈을 감고 새우의 맛을 즐기던 마눌님이 말했다.


그것도, 내가 가장 듣기 싫던 말을.




“오늘 안 재워요.”


“···”


“저희 안 한지 일주일은 되었죠? 오늘 밤새도록 할 계획이에요. 돌아가서 알몸으로 누워 계세요.”


“...마눌님?”


“다 먹으면 침실로 갈게요. 그리고 트레센 학원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마눌님, 아니 다이아, 살려줘.”


“제가 죽이기라도해요? 엄살도 참.”


“콘O 한 박스를 하루에 다 쓰는게 죽이는게 아니면 뭔데! 진짜로 죽는다고!”


“이제야 원래 말투로 돌아왔네요. 그리고 트레이너님?”





아, 좆됐다. 이 호칭, 그리고 이 말투.


졸업식의 날, 나를 따먹을 때의 눈빛이다.


완전히 예전 모습으로 돌아온 다이아가,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트레이너님이 죽을지 말지를 정하는 건, 제 마음대로랍니다?”


“그러니까 얌전히 침실로 돌아가서 인자봉 똑바로 세우고 기다리세요, 알겠죠?”


“오늘은 특별히 더 길게 해줄테니까 기대하세요❤️, 트레이너님?”





..내 대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오우, 알겠다고."


아마, 내 눈은 죽어있었겠지, 반드시 그럴거다.






...그리고, 난 침실에 교복을 입고 온 다이아에게 짜였다.


복직하겠다는 소리를 낼 때마다 교복을 입고 상대해줄테니,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 밤에도, 내 몸에서 다이아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졸업식 이후에, 아니.


그녀에게 채용된 이후로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