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umamusume/72000136


2편 : https://arca.live/b/umamusume/72072743



===


아야베 씨의 트레이너 씨와 함께 점심을 먹었던 그날 이후로, 저는 휴일이나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친 저녁 등 여유 시간이 되면 트레이너 씨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아야베 씨를 만나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트레이너 씨는 항상 절 기쁜 얼굴로 반겨주셨어요.


그리고 매번 들를 때 마다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카레, 스테이크, 오무라이스, 나베, 퐁듀, 파스타...


과장하는게 아니라, 정말로 깜짝 놀랄만큼 맛있는 음식들이었어요.


시골 출신이라 자주 가본 적은 없지만, 웬만한 레스토랑 레벨에서도 꿀리지 않는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쁜 점은... 바로 트레이너 씨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함께 요리를 해서 만든 음식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도와드리기도 하고...


하나같이 별 거 아닌 일들이지만, 마음이 정말로 행복해지는 일들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도 즐겁지만... 이건 결이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요?


트레센에서 만난 친구분들이 신뢰할 수 있는 자매들이고, 저를 시골에서 중앙으로 데려와주신 제 트레이너 님이 엄격한 어머니라면, 아야베 씨의 트레이너 씨께선 힘들 때면 언제나 찾아 기댈 수 있는 아버지라는 느낌.


매일매일 고된 훈련을 하고, 트레센의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지쳐만 가던 저에게 트레이너 씨의 집은 마치 안식처와도 같았습니다.


핸드폰의 앨범에 저장된 그분의 집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고향으로 돌아간 것만 같...



"....드... 탑로드!"


"핫?!"



갑작기 절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립니다.


여기는...



"아, 오페라오 씨..."



뚱한 얼굴을 한 채 제 앞에 앉아계신 오페라오 씨.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도토 씨.


아아... 분명 두 사람과 오랜만에 외출을 나왔었죠.



"이 내가 앞에 있는데 자네는 어디로 시선을 기울이고 있던겐가?"



어... 그러니까 분명 오페라오 씨 그리고 도토 씨와 함께 외출을 나왔었죠.


아야베 씨는 오늘 따로 갈 곳이 있다며 거절하셨고.


그리고 오페라오 씨가 하시던 말씀은 아마...



"메뉴 뭐 시킬지... 였던가요...?"


"메뉴는 이미 시켰어요오..."



아, 아니구나.


도토 씨가 곧바로 반박해주셨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툭- 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시며 절 뚫어져라 쳐다보시는 오페라오 씨.


왠지 모를 압박감에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서 앞에 있던 아이스 커피를 홀짝이며 시선을 슬슬 피하는데, 그 순간 마침내 오페라오 씨의 입술이 다시 열렸습니다.



"내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지. 그보다 자네 이야기를 해보게나. 아까부터 표정이 묘한 것이, 혹시 우리 몰래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거 아닌가?"


"네헷...?!"



푸확-



"호오...?"


"구원은 없는 건가요오...?"


"으아악! 죄, 죄송해요 도토 씨!"



예상 밖의 오페라오 씨의 말에 당황해 마시던 커피를 그대로 뿜어버렸습니다.


그 탓에 그 방향에 계시던 도토 씨는 커피에 홀딱 젖은 생쥐 꼴.


황급히 티슈를 꺼내 닦는 걸 도와드렸습니다.



"핫하하하! 그 나리타 탑 로드에게 마침내 봄날이 찾아왔구나! 그래서 자네의 마음을 훔쳐간 그 괴도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 아니에요. 딱히 그런 게 아니라..."


"이제 괜찮아요, 탑로드 씨..."



괜찮다며 절 말리는 도토 씨와 흥분해서는 제 어깨에 손을 얹는 오페라오 씨.


저는 두 사람의 손길에 사로잡힌 채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으아윽... 그러니까..."


"음. 하긴 사랑에 있어서 상대방이 누구고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치 않지.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법이니까!!!"



정말로 사랑 같은 거 아닌데... 그냥 뭐랄까, 저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시는 분에 대한 동경이라고나 할까...


그보다 이게 사랑이면 진짜 큰일이거든요?


아니 그리고 왜 저만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는겁니까?



"딱히 사랑 같은 거 아니라니까요... 오히려 그런 말씀하시는 오페라오 씨야말로 따로 만나는 분 있는 것 아닌가요? 담당 트레이너 씨와 단 둘이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닌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 말에 오페라오 씨의 표정이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리면서 조금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뭐, 자주 어울려 다니는 저희나 알아볼 정도의 미세한 차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혹시...?



"하하하하! 미의 궁극을 추구하며 어둠을 빛으로 훤히 밝히고자 하는 우리에게 있어 끝없는 탐구는 필수적! 자네가 들은 이야기 또한 그에 따른 부산물에 지나지 않네!"


"헤에~ 과연 그런거군요."



아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제가 능글맞은 얼굴로 오페라오 씨를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오페라오 씨는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습니다.



"...그보다! 자네 설마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그런 옷차림으로 갈 생각은 아니겠지?"


"네? 제 옷에 뭔가 문제라도..."



제 대답에 오페라오 씨는 더욱 과장스런 포즈를 취하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건 그냥 교복 아닌가! 아아!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어쩔 수 없군, 도토. 오늘의 일정은 취소일세. 대신 탑로드의 무대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이 한 몸 불사르도록 하세나!"


"네에에...? 제 안목 같은게 쓸모가 있을까요..."


"저기... 전 그냥 원래 스케줄대로 하는게 나을 것 같은데요. 저녁 운동도 해야하고..."


"자! 출발이다, 제군들! 전진하라!"



===



[통화가 거절되었습니다. 삐 소리가 난 후-]



"끄응..."



아야베는 오늘도 전화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번 주 들어서는 그래도 눈도 좀 마주치고 이런저런 잡담에도 어울려주길래 기분이 슬슬 풀렸나 싶었는데 아직은 내 착각이었던 모양.


결국 핸드폰은 옆에 다시 내려놓고 하고 있던 서류 업무를 마저 진행했다.


타다닥- 타닥-


방 안에 나직하게 울려퍼지는 키보드 타자음 소리.


요 근래 들어서 아야베의 화를 풀어주고 갑자기 자주 찾아오기 시작한 탑로드 양과 어울리느라 미처 처리하지 못 한 일이 좀 쌓여버렸다.


결국 주말에도 노트북을 붙잡고 일이나 하는 신세.


뭐 내 잘못이긴 하니까 딱히 누굴 탓하기도 그렇지.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자기 다시 벨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리링~



"아야베?!"



황급히 핸드폰을 다시 주워들어 확인해보니 화면에 떠있는 것은 예전에 신세를 졌던 선배 트레이너님의 이름이었다.


아야베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여 한 숨을 내쉬면서도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선배님?"


[아, 아야베 트레이너 군. 통화 괜찮은가요?]


"물론입니다 선배님."


[다름이 아니라, 요즘 우리 아이가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신세? 갑자기 무슨 소리지?



"신세...요? 아, 탑로드 양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요즘 매일 무리를 하고 있다고 에어 그루브 양과 다른 학생들에게 들었거든요. 그래서 어제 이야기를 나눠보았더니 아야베 트레이너 군의 이름을 얘기해줘서요.]


"...죄송합니다, 선배님. 다른 의도가 있던것은 아니고..."


[네? 하하하, 무슨 얘기를 하는건가요. 그런 생각으로 연락을 한게 아니예요. 그냥 고맙다고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탑로드 양은 항상 지나치게 무리를 하곤 하는데, 트레이너 군 덕분에 쓸데없이 자신을 혹사만 하는게 아니라 제대로 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네에..."


[정말, 그래도 제가 명색이 담당 트레이너인데 저한테는 의지해주지 않는다는게 조금 섭섭하긴 하네요.]


"탑로드 양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아마 선배님한테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게 아닐까 걱정돼서 그런걸지도 모릅니다."


[말이라도 고마워요. 아, 쓸데없는 얘기로 쉬고 있던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전화 끊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혹시나 그 아이가 다시 찾아온다면 지난 번처럼 따뜻하게 받아주셨으면 해요. 물론 자신의 담당도 아닌 아이를 데리고 이런 부탁을 한다는게 몰염치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만큼 그 아이가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게 느껴져서 그런거니까요.]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네. 선배님도 좋은 밤 되십시오."



탑로드 양이 나한테 의지하고 있다고?


왜?


한거라고 해봐야 고작 식사 몇 끼 대접해준 것 뿐인데...


모르겠다, 어차피 쉽게 답이 나올 문제 같지도 않다.


난 다시 노트북을 붙잡고 작업을 재개했다.


그렇게 한시간 쯤 지났을까, 저녁도 제때 못 챙겨먹고 일에 몰두했던지라 좀 허기져서 배달이라도 시켜먹을까 우마이츠 어플을 켜고 고민하던 도중에 갑자기 현관문 벨소리가 들렸다.


딩동~



"누구지?"



설마 아야베인가?


아니 그래도 아까 그렇게 무참하게 전화를 끊어버렸으면서 갑자기 찾아올리는 없고...


도대체 누구지?



"네 나갑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빠른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끼익-



"누구세... 어라?"


"아, 안녕하세요. 트레이너 씨."


"탑로드 양...?"



갑작스런 방문객의 정체는 바로 탑로드 양이었다.


최근 들어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내 집에 자주 찾아오긴 했는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러고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항상 트레이닝 도중에 내 집에 들르는거라 운동복 차림인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어디 다녀오는 길인지 차림새가 꽤나 화려했다.


주말이라 어디 놀러갔다 돌아오는 길인가?



"아, 이런. 일단 들어와 탑로드 양."


"네, 실례하겠습니다."



왜 온건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을 문 밖에 마냥 세워둘수는 없어서 일단 거실로 안내한다.



"저기, 뭐라도 마실..."


"저기, 트레이너 씨. 별건 아니지만..."



일단 마실거라도 내올까 싶어 질문을 하려 했는데 탑로드 양도 같은 타이밍에 말을 꺼내 결국 둘 다 입을 다물어버렸다.


머쓱한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이야기 해. 탑로드 양."


"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친구분들과 백화점에 쇼핑을 다녀왔거든요. 그래서 별건 아니지만, 트레이너 씨한테 그동안 빚진거에 대한 답례 겸 선물을 좀 사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탑로드 양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에코백에서 이런저런 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디저트로 즐길만한 간단한 빵 종류와 식전의 전채 요리, 혹은 술안주로 적합할 것 같은 생햄.


백화점에서 사왔다고 하니 가짓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학생 입장에서는 가격대가 꽤 나갈 것 같은 물건들이었다.



"이런... 굳이 이렇게까지 사올 필요는 없었는데."


"하지만 맨날 트레이너 씨에게 얻어 먹기만 했잖아요? 그래서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냥 그 마음이면 충분한데... 그래도 사다줘서 정말로 고마워. 다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네."


"아, 정말인가요? 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나는 잠시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다시 돌려보낸다? 사온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행위니 당연히 아웃이다.


보관하다 아야베와 함께 먹는다? 좋은 아이디어 같기는 한데, 아야베는 은근히 입이 짧아서 안 먹을 것 같은것도 있고 뭣보다 그녀가 언제 화를 풀어줄지 모르겠다. 매일 찾아가고 있기는 한데...


그러고보니 아까 탑로드 양의 담당 트레이너인 선배님에게 연락이 왔었지.


분명 '탑로드 양이 다시 찾아와도 잘 부탁한다' 였었나...


나보다 훨씬 훌륭한 선배님을 담당으로 두고 있는 그녀가 과연 날 굳이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싶긴 하지만, 하여튼 선배님 말씀인데 무시할 수는 없지.


좋아, 그렇게 해야겠다.



"그럼 이왕 온김에 같이 들고가지 않겠어?"


"네?"


"내가 먹기에는 좀 많아서 말이야. 술은... 학생이니 당연히 안 되겠고, 대신 괜찮은 당근 주스가 좀 있거든."


"어... 괜찮을까요? 그래도 아야베 씨와 같이 드시는게..."


"아야베는 아닌 척 하지만 은근히 편식하는 편이거든. 그럴바에 사준 사람한테 보답도 할겸 같이 먹는게 낫잖아?"


"아...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응. 조금만 기다려, 금방 상 내올게. TV라도 보고있어."


"네."



창고로 가서 약간 커다란 접이식 탁자를 꺼내온다.


먼지가 좀 쌓여있기에 행주로 몇 번 닦으니 새 것처럼 깔끔해졌다.


그리고 그 위에 접시들을 얹고 탑로드 양이 선물해준 음식들을 플레이팅한다.


먹으려고 사두었던 과일 몇 가지도 한 번 씻어서 같이 준비했다.


그냥 쉬라고 말렸는데도, 탑로드 양은 굳이 그 과정에서 날 도와주었다.



"자, 여기."


"감사합니다."



유리잔 두 개를 가져와 하나는 그녀에게 건네고 음료수를 따른다.


그녀의 잔에는 당근 주스를 따라줬고 내게는 그녀가 직접 위스키를 따라줬다.


...뭔가 미성년자한테 술을 따르게 한다는게 굉장히 불건전하게 느껴져서 몇 차례 사양을 해봤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짠~


꿀꺽- 꿀꺽-


가볍게 건배를 하고 술을 마신다.


워낙 오랜만에 마시는거다 보니까 평소보다 더 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와아, 이 주스 엄청 맛있네요."



잔을 반쯤 비운 탑로드 양도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카렌짱에게 선물받은 물건인데, 꽤나 고급품이라고 들었어. 아야베도 좋아하더라고. 난 인간이라 잘 모르겠지만."


"아야베 씨가 좋아하는 것도 당연해요, 엄청 신선한데, 동시에 농축된 것 같은 진한 맛이 느껴지거든요."



식사는 꽤나 좋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뭐, 음식도 맛있고 음료수도 좋은 것들로 준비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난 일부러 앞으로의 경기 관련 내용이나, 오늘 선배님의 연락에 관한 것들은 회피해가면서 최대한 무난한 주제들을 꺼냈고, 탑로드 양도 밝은 표정으로 내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으으..."


"너무 많이 마시신 것 아닌가요, 트레이너 씨?"


"아, 아니야... 그냥 조금 더워서..."



난 반쯤 풀린 눈으로 탑로드 양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은게 있었다.


그러고보니까 이 이야기를 안 했네.


여자랑 대화할 때 기본적인 매너라고 들었는데...



"오늘 정말로 예쁘네, 탑로드 양."


"네, 네?!"


"그 블라우스도, 스커트도 정말 잘 어울려. 컬러도 탑로드 양의 이미지랑 딱이고... 오늘 쇼핑 다녀왔다고 했지? 거기서 사온거야?"


"아, 네. 맞습니다. 근데 그, 저 혼자 고른 건 아니고 오페라오 씨가 많이 도와주셨지만요."


"하하, 그렇구나. 그나저나 기쁜걸.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처음 보여주러 온 사람이 나라니."


"예, 예쁘다니 무슨 말씀을. 저는 딱히..."


"으음... 아야베랑도 같이 슬슬 겨울옷 사러 가야하는데... 음냐... 음냐..."



아... 갑자기 머리가 왜 이렇게 어지럽지?


쓰러지듯이 고개를 푹 숙이자 옆에 놓아진 거의 바닥을 드러낸 위스키 병이 눈에 들어왔다.


아씨... 그러고보니까 저거 40도가 넘어갔지... 하도 오랜만에 마신데다가 분위기까지 타서 술술 넘어가니까 착각해버렸다.



"저, 저기, 트레이너 씨?"


"미안, 탑로드 양... 나 잠 좀 잘게..."



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쾅-



===



"트레이너 씨? 트레이너 씨?"



쓰러진 트레이너 씨를 붙잡고 몇 번이나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술에 취해서 쓰러지신 것 같은데 괜찮으실런지...


일단 이대로 바닥에 쓰러져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침실로 옮기기로 했다.


다행히 우마무스메라 힘만은 타고나서 성인 남성이라고 해서 옮기는데 큰 힘이 들지는 않았다.



"영차...!"



털썩-


트레이너 씨를 침대 위에 눕혀드리고 이불을 덮어드린다.


그리고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트레이너 씨의 방이군요..."



남성의 방에 들어와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합니다.


책장에는 처음 보는 트레이너용 전문 서적이나, 평범한 만화책 따위가 한가득 꽂아져 있고, 책상 위에는 서류더미와 아직도 전원이 켜져 있는 노트북이 놓아져 있었습니다.


음, 평범한 방과 비교해서 그렇게 큰 차이가 있지는 않는군요.


아니 오히려... 약간 여성의 손길이 더해진 것 같다고나 해야할까요?



"아야베..."



아...


그러고보니 여기는, 트레이너 씨의 집이니까 동시에 그분의 연인인 아야베 씨의 집이 되기도 하는거겠죠.


그녀의 취향이 더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문득 든 그 생각과, 잠에 드신 상태에서도 아야베 씨의 이름을 중얼거리시는 그 모습에 가슴 속이 조금 쑤시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야베씨는 빛나는 하늘의 별처럼 고고하고 아름다운 분이시지만...



"저도... 그렇게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요..."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린 속삭임.


물론 제 주변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이 계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제 꿈을 끝까지 믿고, 응원해주시는 분들.


하지만 이 길을 달려나가다 보면, 가끔은 정말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서 저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야베 씨를 질투하게 되어버렸습니다.



"트레이너 씨..."



잠이 들어 힘이 빠진 트레이너 씨의 팔을 이끌어 제 머리에 얹어놓습니다.


그리고 보기에는 조금 우스꽝스럽지만, 그것을 제 손으로 다시 움직여 마치 머리를 쓰다듬는 흉내를 내보았습니다.



"아아..."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


가슴 속은 행복함으로 충만해지지만, 반대로 다리 사이는 과거 샤워실에서 스스로를 위로했을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애달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몸을 이전처럼 달랠 수는 없습니다.


여긴 제 방도 아니고, 트레이너 씨는 저의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면.


스르륵-


이불을 살짝 들쳐내고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트레이너님과 서로 조금의 빈틈도 없이 몸을 꼭 밀착하고, 그분의 팔을 제 허리에 두릅니다.


그리고 트레이너님의 목을 제 팔로 감은 뒤...



"츄..."



난생 처음 맛보는 감촉.


마시멜로보다 부드럽고, 초콜릿보다 달콤한...


영원히 이 순간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저와 그분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어... 탑로드... 양...?"


"아... 트, 트레이너 씨..."



갑자기 온 몸이 벌벌 떨리고 등줄기에 오한이 흐릅니다.


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습니다.



"자, 잠깐만 탑로드 양!"


"죄송합니다!"



그 말과 함께 저는 어두운 밤거리를 질주했습니다.


하지만 제 입술과 머리에 남은 트레이너 씨의 온기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


이번 편에는 본방 들어가려 했는데 쓸데없이 분량 늘어나서 또 실패


다음 편엔 ㄹㅇ 불륜뾰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