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너, 다시 묻는데 진짜 나로 괜찮아? 갈아타려면 지금이야."


'또 시작이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걸 힘겹게 삼키면서 트레이너는 손을 멈췄다. 그의 앞에 마주보고 선 파머의 눈을 바라보았다. 분명 조명이 두 사람에게 비치고 있는데 반사광이 없다. 큰일이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트레이너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낮은 단 아래 앉은 메지로 맥퀸, 라이언, 도베르, 아르당, 심지어 브라이트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이 창백하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토센 조던, 골드 시티의 표정도 똑같다. 방금 오구리 캡과 스페셜 위크와도 눈이 마주쳤는데, 입에 음식을 넣고도 우물거리지 않고 있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지 눈에 확 들어오는 증거였다.


반대쪽을 봐도, 아키카와 야요이 이사장이 부채를 초조하게 매만지고 있다. 그녀의 입은 속에서 여러가지 말을 우물거리고 있었지만, 부채에 떠오르는 '당혹!'이란 단어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파머야..."


"응, 불렀어? 트레이너."


여유롭게 미소까지 띄울 만큼 파머는 천하태평하다. 주위가 눈에 안들어오는 모양이다. 상황이 상황이 아니었다면 귀엽게 볼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트레이너가 다급하게 파머의 왼손을 잡아 올렸다. 새하얀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은 긴장으로 조금 떨리고 있었다. 트레이너가 자기 손에 든 것을 조명에 반짝이게 하며 파머에게 속삭였다.


"있지. 지금 혼인 서약 중이잖아..."


"응. 맞아.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그녀의 왼손 손가락이 트레이너의 손 위를 조심스럽게 왔다갔다 움직였다. 하지만 눈에 스며든 어둡고 축축한 기색은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근데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물론 트레이너는 지금 이후로도 언제든지 자유롭게 갈아탈 수 있겠지만, 트레이너의 이력에 보기흉한 자국이 남아버리잖아?"


식의 주례를 맡은 아키카와 이사장이 부채를 기어이 떨어트리고 만다. 그녀에게는 조금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이었을까? 마이크를 잡고 뭐라 하려고 하는데 손이 벌벌 떨리는지 앰프에서 연신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굳이 따지면 이런 질문은 아침식사로 토스트 대신 밥을 먹는 정도의 빈도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파머는 계약을 맺고 훈련을 시작하는 첫 날에도 같은 말을 했고, 함께 달리는 3년 남짓한 시간동안 수시로 같은 말을 했고,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동안에도 같은 말을 했다. 트레이너는 파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웃어보였다.


"그렇구나. 그렇다면야."


트레이너가 이사장을 향해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대요. 계속 하시죠."


"응?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되는 거 맞아, 자네?"


"그럼요. 제가 먼저 할 테니 시작하시죠."


"그...그런가. 알았어. 그렇다면, 으흠. 속행! 혼인 서약을 진행하겠다!"


이마까지 새파랗게 질린 것 같던 아키카와 이사장도 트레이너가 몇 번을 확인해주자 이내 컨셉을 되찾았다.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뒤 우렁찬 소리로 트레이너를 향해 묻는다.


"확인! 신랑 ○○ 트레이너는 메지로 파머 양을 아내로 맞이하여, 어떤 경우에도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된 남편의 역할을 다하겠는가?"


"네!"


트레이너가 조금 힘주어 대답했다. 그리고 파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부연 설명을 이어간다.


"어떤 경우에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더 슬플 때도, 그보다 더 슬플 때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더 나쁠 때도, 최악일 때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햇빛이 비치거나, 햇빛이 너무 강하거나 우박이 떨어지거나 얼음이 얼거나 서리가 내리는 날이나, 화산이 터지거나 핵겨울이 찾아온다 해도.


병들거나 아프거나 고통스럽거나 죽을 것 같거나 도망치고 싶거나 포기하고 싶거나 압박감에 잠을 못 이루거나 불안에 몸을 떨거나 식은땀을 흘리거나 악몽을 한 번 이상 꾸었을 때나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때에도. 남편으로서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과, 과중... 너무 무겁다..."


"아하하."


기겁을 하는 이사장과는 달리 파머의 눈이 조금은 맑아진다. 빛 때문인지 살짝 고인 눈물 때문인지는 모른다. 아까 트레이너가 잡아준 왼손을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지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트레이너, 그럼 확인 하나만 할게.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이 짜증나고 화나면 갈아탈 거야?"


아차차, 빼먹은 내용이 있었다. 트레이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당황한 기색을 파머는 놓치지 않는다. 관찰력은 좋은 편이니까.


"그렇구나. 괜찮아. 그때는 자유롭게 내게서 떠나도 좋아. 이해심은 좋은 편이니까 화내거나 하지 않으니까."


"아니야!"


트레이너가 벌컥 신경질을 냈다. 파머의 눈이 조금 놀라움으로 커졌다. 하객과 양가 부모님, 그리고 어느새 타즈나를 애타게 찾기 시작한 주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원래 생각지도 않은 전개였지만, 나름대로 임기응변을 쥐어 짜내면서 트레이너가 기세를 올렸다.


"지금 엄청나게 화나고 짜증나지만 널 절대 버리거나 갈아타지 않을 거야."


"고마워. 트레이너. 그치만..."


"이것보다 더 짜증나고 화나더라도 갈아타지 않을 거니까!"


"그렇구나. 그럼...."


"네 사랑이 너무 무겁고 습하고 부담스러워서 숨이 막히고 목이 졸려 죽을 것 같아도 갈아타지 않을 거야, 됐지?"


"...아하하."


파머가 자기 양 손을 꽉 맞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한 방 먹었네."


드디어 파머가 입을 다물었다. 만족한 모양이다.

지금은.


이사장에게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리자, 그녀가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고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맹세! 신랑 ○○ 트레이너는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해 신부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표하였다!


확인! 신부 메지로 파머는 ○○ 트레이너를 남편으로 맞이해, 어떤 경우라도 그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된 아내로서 역할을 다하겠는가?"


메지로 파머는 눈에서 몇 방울인가의 눈물을 떨어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하객석에서 간헐적으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여기가 결혼식장인지 가정법원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드디어 결혼식장다운 훈훈한 공기가 되돌아왔다. 스페셜 위크와 오구리 캡의 입이 다시 움직여 음식을 씹어댔다. 이사장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 저기. 끝인가? 뭔가 더..."


"이사장님."


트레이너가 주례석을 힐끗 보면서 짧게 말했다. 더이상 신부를 자극하지 말라는 신호를 수신하고 이사장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선, 선언! 신랑 ○○ 트레이너 군과 신부 메지로 파머 양은 서로의 배우자가 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하였다! 축복! 두 사람의 앞길에 ... 정말, 정말로 많은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이사장이 마이크를 잠시 끄고 중얼거렸다.


"삼여신이시여..."


"네?"


"아니, 내 말은...! 결연! 삼여신의 이름으로 반지를 교환하게!"


파머가 자신을 힐끗 보고 물어본 것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단 사실에 이사장이 힘을 낸다. 재치있게 위기를 돌파하고, 트레이너가 바통을 받아 파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왼손을 다시 잡아 들어올렸다.


말 없이 파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준 트레이너는, 잠시 뒤에 파머가 끼워준 반지를 약지에 끼고 손을 마주잡아 이사장에게 돌아섰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그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병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뭐, 이제 뭐, 어쩌라고 나보고. 이제 사회자가 알아서 할 거야."


"웨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이!"


신호를 받은 사회자 다이타쿠 헬리오스가 긴급하게 텐션을 올리기 위해 한 손을 들어올려 외쳤다.


"이제 파머찡이랑 토레삐는 즛쇼야! 맞지?"


"맞지?"


"왜 네가 물어보는 거야. 파머야."


파머는 손을 꼭 잡은 채로, 별 걸 다 물어본다는 듯이 웃었다.


"그야. 아까 맹세할 때 못 들었거든. 평생 함께하겠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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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디테일을 빼먹긴 했지만, 장례식장 비슷한 분위기로 넘어가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파머의 태양 다이타쿠 헬리오스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두 사람의 대화가 퍼져나가는 걸 막았기 때문이다. 물론 소리를 지른 건 하객석의 갸루즈를 올려 축가를 함께하려는 것이긴 했지만. 어영부영 이뤄진 결과라도 파머는 헬리오스가 자신을 위해 그래주었다고 감동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파카아게 리믹스가 조금 과한 묘한 텐션의 결혼 행진곡이 흘러나와 두 사람이 부부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헬리오스가 대도주를 한다고 조금 앞서 달려나가긴 했는데 그녀가 하는 일이니 모두가 그러려니 넘어가주었다.


"트레이너."


"응?"


"슬슬 끝나가는데. 나한테 키스는 안해주는 거야?"


트레이너가 조금 초조한 기색을 담아 파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저 끝에서 하려고 했는데."


"무리하지 않아도 돼.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으니까."


저 주둥이를 닥치게 만들어야 한다. 트레이너가 그대로 파머의 허리를 감아 안아, 버진로드의 애매한 지점에서 키스했다. 하객들은 환호하고 기뻐했지만, 트레이너 자신은 정작 언제까지 해야 하는 지 확신도 못하고 무작정 갈긴 터였다. 얼마인가 뒤에 두 사람이 떨어졌을 때, 파머는 75% 정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혀는 안 쓰는구나."


"아무래도 여기선 좀... 하객들도 있고."


"응... 역시 부끄럽겠지..."


그녀가 트레이너에게 팔짱을 끼면서 힘없이 웃었다.


"나랑 하는 키스가."


"아니, 아니, 아니. 파머야. 그건 좀 너무 갔다."


"너무 폭도주였어?"


치밀하게도 자기 아이덴티티를 넣어 함정수사를 하는 모양이었지만 트레이너는 걸려들지 않는다.


"아니, 사행이었어."


"아하하. 미안해. 이 정도가 선이었구나."


"응?"


"아무것도 아니야."


버진로드의 끝에서, 이제 하객들과 모두가 머무는 평소의 세상으로 내려오면서 파머가 조금 즐거운 얼굴로 웃었다.


"사랑해. 트레이너."


"나도야. 파머."


기다렸다는 듯이 열리려는 그녀의 입에 다시 입술을 대 막고, 트레이너가 귀에 속삭여주었다.


"지금 이 순간 만이 아니라 지금부터 계속. 즛쇼야."


파머가 얼굴을 붉히면서 그에게 안겨왔다. 친구들이 바구니를 가져다가 꽃잎을 마구 뿌려줬다.


"음... 지금은 텐아게 상태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토리마 이치키타하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품에 안긴 그녀를 토닥이면서 트레이너가 웃었다.


"집 아니고 신혼여행 바로 갈거잖아."


"언젠가 집에 돌아가잖아."


"그럼 집에 가지 말자."


"응?"


"집에 가서 마음이 식을 것 같으면, 그냥 집에 가지 말자고. 우린 맨날 이랬잖아. 그냥 자유롭게 지내자고."


트레이너의 가슴팍이 훅 뜨거워졌다. 파머가 내뱉는 웃음섞인 숨이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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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장식이 되어 있어서 번호판이 아니었다면 알아볼 수 없었을 파머 호를 타고 신랑신부가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조수석에 편안한 얼굴을 하고 반 쯤 누워, 파머가 눈을 살짝 감았다.


"트레이너."


"응?"


"...나는 파머야."


트레이너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수석 창문을 살짝 열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게 해 주었다.


"한 번 외쳐. 아까는 부모님이며 할머님이며 계셔서 못했지?"


그의 말과 함께 들이친 바람에 파머가 눈을 뜬다.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래 보였어?"


"응. 슬슬 너도 승리선언을 할 때도 됐지. 이제 그래도 법에 저촉되지 않잖아?"


"법에 저촉된대."


파머가 깔깔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창가 쪽으로 몸을 틀었다. 트레이너가 조금 더 창을 내려주자, 그녀가 바깥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파머! 나는 파머다ㅡ!"


그녀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외쳐댔다.


"메지로 파머가 아니야! 이제 메지로 파머가 아니야!"


자신을 얽어매던 사슬을, 무거운 짐들을, 사명을, 그 모든 것들이 담긴 이름을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처럼 외쳤다.


"나는! 트레이너의 파머야! 메지로 파머가 아니야!"


네가 남기고 싶은 것은 메지로냐, 파머냐, 물었을 때 그녀는 메지로로서의 달리기를 버렸다. 바보같아 보일 정도의 도주 끝에, 그녀는 결국 메지로의 이름도 버릴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손을 들어 호응해주기도 하고, 더러는 힐끗 보고 그냥 지나가기도 했다. 자유로운 바람이 차창을 넘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파머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조용해졌는데도 돌아서지 않는 걸로 보아 숨죽여 운다는 걸 파악했는지, 트레이너는 차창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녀가 털썩 조수석에 기대 눈물을 흘렸다. 메지로의 잔재가, 지금까지의 시간이 남긴 상처와 부담감, 긴장감이 거기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파머야."


"응..."


"너 이제 아가씨 아니야. 빽빽 울어도 돼."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파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트레이너는 약간 후회하면서도, 그녀를 배려해 이어플러그를 하지 않고 울음소리를 함께 들어주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파머도 울음을 그치고, 눈가를 완벽하게 정돈한 다음이었다. 가벼운 짐이 담긴 캐리어를 꺼내 게이트를 들어갔다. 검색대를 지나 면세구역에서 탑승을 기다리면서, 두 사람은 주스와 커피를 사서 마시면서 잠시 마주보았다.


"트레이너. 아니 당신. 우리 정말 여기까지 와버렸네."


"그러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정말 나로 괜찮아?"


말과는 반대로, 자신으로 괜찮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파머의 몸이 가까워져왔다. 이제는 남편인 트레이너의 목에 팔을 감으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아직 비행기가 출발하지 않았으니까... 갈아타려면 지금 뿐인데?"


언제나 그랬다. 상식적으로도 그렇다. 자기비하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말에 동의해주는 말을 듣고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누군가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그의 귀에 속삭이는 파머의 소리에 트레이너는 눈을 굴리다가 답을 생각해냈다. 이제는 부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가 되었지 싶었다.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 새로운 긍정을 만들어내는 작업.


"갈아타는 거 말고, 파머에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놀라운 대답이었을까. 하지만 듣고 싶었던 내용이었나보다. 잠시 머뭇대던 파머는 작게 웃더니 속삭였다.


"파머 호에 타서 돌아간다고?"


"아뇨. 자동차 말고 살아있는 파머에 타고 싶은데요."


아주 잠깐, 큰 소리로 웃던 그녀가 살짝 트레이너의 고개를 돌려, VIP 라운지라고 쓰인 공간을 바라보게 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파머가 작게 말했다.


"탑승수속은 저쪽이예요."


"와. 이제 정말 막나가는구나."


트레이너가 낄낄 웃더니, 그대로 파머를 들어 안아올렸다.


"당장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