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선대 이사장께서 중앙 트레센 학원에 아직 계실 무렵이니, 몇 년 쯤 전이다.

스태미너 훈련 때 입는 경영 수영복조차 외간남자에게 보이기 조금 수줍어 용기가 필요하던 시절, 마루젠스키는 과감하게 비키니를 입고 등교했다가 많은 수근거리는 소리와 풍기위원장의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반항아 마루젠스키에게 그런 말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교칙을 들먹이는 꼰대들 덕분에 교복으로 갈아입고 말았다.

"흥! 정말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야!"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학생회실을 나온 마루젠스키가 투덜거렸다.

"하 하 하!"

누군가 들은 건지 복도 저편에서 느릿하게 웃는 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왔다. 껄렁껄렁, 하얀 운동화에 청바지를 배까지 올려 입은 사람이 장발을 휘날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마루젠스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보아하니 우리 슈퍼카가 오늘도 잔소리 좀 들었나본데?"

추근대는 듯한 느끼한 소리에 마루젠스키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흥, 댁하고는 상관 없네요. 지방방송은 꺼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을 말하면 상관이 있다. 그는 마루젠스키의 담당 트레이너였으니까. 그는 흔히 말하는 장발족 얄개(장난꾸러기 악동)로, 청바지와 맥주, 포크 기타를 즐기며 자유롭게 살기를 추구하는 남자였다. 그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왜 어떻게 트레이너가 됐는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만큼은 통했지만, 어딘지 철이 없어보이고 조금 여자를 밝힌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트레이너는 선생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말딸들의 독점력은 그때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하. 선생님한테 못하는 말이 없는걸?"

"거울이라도 좀 보시지 그러세요? 당신처럼 단정치 못한 사람이 선생이라니, 학생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

"그러지 말고. 우리 슈퍼카 기름 좀 넣으러 찻집에나 가볼까?"

"흥."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숨기려 고개를 돌리면서 마루젠스키가 말했다.

"저를 그런 쉬운 부속품(남자들 노는 곳에 함부로 따라가는 여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누가 뭐래도 학생이니까요."

"누가 뭐랬나? 일단 가자고."


싫은 척은 있는대로 해놓고선 기어이 따라온 마루젠스키와 트레이너는 찻집에 마주 앉아 생크림 케키와 블랙 커피를 든다. 훈련을 쉬는 이름 모를 말딸들이 이따금 DJ에게 신청곡을 적은 쪽지를 내밀고, 선글라스를 낀 DJ는 그걸 담담하게 받아 나레이션을 깔아주며 틀어주곤 했다.

"그나저나 다음에 있을 레이스 말야."

트레이너가 케키를 뒤적거리고 있는 마루젠스키에게 조용히 말했다. 새삼 이 사람이 트레이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키지 않는 표정, 지금부터 이 사람이 하려는 말이 좋지 않은 소식임을 짐작하게 한다.

"어떻게든 경기가 성립은 하게 됐는데, 아무래도 좀 봐주면서 달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

"봐주면서 달리다뇨?"

"그, 적당히, 2착이 20마신 이내로 들어오게 말야."

마루젠스키가 포크를 접시 위에 두고 한숨을 쉰다.

"또 그 소리에요? 진짜 스팀아웃(김 새다)이야."

"나도 아더메치라고 생각은 하는데. 어쩌겠냐. 어른들이 이런 사정이 있는 걸."

트레이너가 가슴 포켓에서 말보로 레드를 하나 꺼내 문다. 그때는 찻집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가 있었다. 마루젠스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손에서 담배를 뽑아내 꺾었다.

"12시(데이트) 중에는 피우지 않기로 했었죠?"

"앗차차. 그랬었지."

멋쩍게 웃는 트레이너. 그러나 일부러 그런 것인줄 마루젠스키도 알고 있다. 그가 어른의 사정에 휘말리고 나면 항상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곤 했다. 자기 사정 좀 봐달라는 신호. 마루젠스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케키를 조금 잘라 입에 넣어 다물어버렸다. 흐응, 하는 소리를 길게 내며 생각하는 티를 팍팍 내다가 그녀가 웃었다.

"그러면 그 대신에. 오늘은 검은 도서관(영화관)에 가고 싶어라."

트레이너가 가볍게 윙크를 보냈다.

"우리 슈퍼카가 말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들어줘야지."

정말 마가린이라니까, 마루젠스키는 싱긋 웃어보이며 생각했다.


사랑이 궁금한 풋풋한 여고생인 탓일까. 마루젠스키는 이 세상 많고 많은 영화들 중에, 로맨스 영화를 골랐다. 사람들 모두가 훗날의 보드카처럼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모르고 당황해하던, 키스신이 나오는 영화였다. 키스가 그 시대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뭔가 꼬리 안쪽을 공공연하게 꺼내놓지 않는 것처럼 드러내길 꺼리는 풍조가 있었다. 허둥대던 두 사람의 손들이 팝콘을 찾지 못하고 통에서 마주쳐버린 것도 어쩌면 그런 당혹스러움 탓이었을 지도 모른다.

헛기침을 하면서 손을 치우는 트레이너가 어째서인지 귀여워보여 마루젠스키가 따라잡듯 손을 움직였다. 팝콘 통 안에서 두 사람의 손이 트랙을 돈다. 곧 있을 레이스를 연습하듯이, 코 차이 정도 간격을 유지하면서...

"당신 아주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등대지기(뾰이관계를 밝히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손 가지고 그렇게 허둥지둥해요?"

"이, 이 녀석... 하하하."

영화가 끝나고 귀여웠다는듯이 놀려대는 마루젠스키의 시선을 피하면서, 트레이너는 팝콘을 쓰레기통에 넣는다. 극장을 나온 두 사람이 트레이너의 차에 탄다. 고교시절이다. 그러니까 마루젠스키가 아직 아버지한테서 차를 받기 전의 일이다.

"하하, 벚꽃도 다 져버려서 이거 나체팅(나이트 체리블라썸 미팅)은 힘들겠는걸."

멋쩍은 침묵을 깨겠다고 트레이너가 한 말에 마루젠스키가 화들짝 놀라는 척을 했다.

"아이 참. 놀랐잖아요. 갑자기 나체라고 하면..."

"...바다에 가자. 갈 거지?"

"좋아요. 대신, 제한속도보다 빨리 달려주세요."

시속 80km, 현재의 속도로 환산하면 대략 시속 800km로 달려 어느새 땅거미가 내린 바다에 도착했다. 회색빛 모래사장을 거니는 동안, 트레이너가 트렁크에서 기타를 꺼내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개 껍질 묶어..."

"어머나? 시대를 좀 앞서나간 곡 같은데요?"

"그, 그렇게 들리나?"

당황한 트레이너의 손이 엉켜 멜로디가 흐지부지되어버린다. 다시 침묵. 바닷가에는 파도소리만 들려온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마루젠스키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트레이너 씨. 저 들어버렸어요. 저번에, 이사장실에서."

"아아. 그랬구나..."

들으려고 들은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이사장실을 지나가다, 두꺼운 나무문을 뚫고 새어나오는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버렸다고 하는 게 적당하다.

"제발, 더비에 나가게 해 주십시오! 최외곽 게이트라도 상관 없습니다. 다른 우마무스메의 방해는 일절 하지 않겠습니다. 위닝 라이브를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상금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마루젠스키의 달리기를, 마루젠스키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바닥을 한 번 때리고 위로 튀어오르는 소리, 땅에 납작 엎드려 호소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부채 비슷한 것이 책상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기각한다."

"이사장님! 제발!"

"새끼... 기각!"

현실은 때로 냉정한 것. 꿈을 이룰 능력도 펼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기회가 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한 명의, 어쩌면 두 명의 꿈이 시스템 앞에 꺾여버렸다. 마루젠스키가 비키니를 산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트레이너는 바닥을 내려다본다. 장난기 넘치던 웃는 얼굴이 온데간데 없다. 더 연주할 기분이 안 되는지 기타를 바닥에 내려두고, 그저 마루젠스키를 바라본다.

"괜찮아. 아리마 기념이 있잖아?"

"트레이너 씨는 그걸로 괜찮아요?"

"어른인 이상, 이런 걸로도 괜찮아야지. 오늘은 괜찮고, 내일도 괜찮겠지만. 어쩌면 모레부터는 후회할 지도 모르지만."

"그런 어른이라면 나는 되고 싶지 않아."

마루젠스키가 모래를 밟으며, 그의 옆에 풀썩 앉아 기댔다.

"나는, 나는 언제까지나 자유롭게, 나답게 살 테야."

"그래. 그래야지."

씁쓸하게 가슴 포켓에서 말보로 레드를 꺼내 무는 트레이너. 불은 붙이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는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냥 담배가 멋져보이던 그런 시대였다. 마루젠스키가 그걸 바라보다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빼내고, 천천히 그의 얼굴에 가까워져갔다. 트레이너는 말이 없다. 그의 볼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현재의 스킨십으로 환산하면 야외뾰이에 해당했다.

"트레이너 씨. 그 곡을 연주해주세요."

트레이너는 조금 망설이다 기타를 들어 줄을 튕겼다. 첫 멜로디가 나오자마자 마루젠스키가 연주를 끊고 속삭였다.

"노래해줘요."

트레이너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You must remember this..."


-----


"어머, 웬열. 이거 시대고증이 엉망이네."

마루젠스키는 도보메 지로 명의로 나오려고 기획중인 원고 하나를 '우연히' 입수해 훑어보다가 혀를 찼다. 자신을 포함한 요즘 젊은 것들은 옛 것을 너무 모른다니까.

"게다가 언니가 오나전 옛날 사람으로 나오잖아. 그리고 난 이런 소스 얼굴(윤곽이 뚜렷한 사람을 이름)은 취향이 아닌데? 그렇지? 트레이너 군?"

마루젠스키가 의자 대신 앉아있던 트레이너 군이 엎드린 채로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그치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건 좋네. 트레이너 군, 이거 어떻게 할까?"

"딱히 괜찮지 않을까요? 이런 거 팔리지도 않을 거고. 어차피 이런거 다 거짓말이고, 그런 거짓말을 적을 만큼 누님이 옛날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다 자업자득이고..."

트레이너 군의 등에 전해지는 무게가 버거운 수준으로 변해가자, 그가 황급히 표정을 바꿔 웃었다.

"이렇게 나왔는데요~!"

89년도 유행어부문 대중상을 차지한 점괘드립에 마루젠스키가 깔깔 웃는다. 트레이너의 등허리가 구원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