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혀하는 메지로 아사마의 다음 말을 듣기 전에 왜 메지로 라모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때는 새해 넘어가고 어느 추운 날, 당주이자 할머님의 호출을 받아 방에 들어간 메지로 라모누, 그녀의 냉랭한 자줏빛 눈이 모자를 푹 눌러쓴 할머님을 응시한다. 할머님, 메지로 아사마는 작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며 주위를 둘러본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주게."


"예, 당주님."


고용인들이 모두 두터운 나무문 뒤로 사라진 뒤, 메지로 아사마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려, 라모누의 90사이즈 킷카상 덮개를 철썩 내리쳤다.


"에이! 이 정신머리 없는 기집애야!"


"아팟! 왜 때려! 왜 때리는데!"


자지러지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몸을 쭉 펴며 볼을 부풀리는 라모누를 무시하고 아사마의 손바닥이 몇 대나 같은 곳을 때려댄다.


"이게! 그래도! 뭘 잘했다고 할미한테 대들어!"


"뭘 못했는지나 말해주고 때리라고오!"


"이년아! 너 어제 느그 트레이너가 왔다 간거 알아, 몰라?"


트레이너란 말에 메지로 라모누가 이마에 손가락을 짚고 한참을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토레나 님이? 왜?"


곧장 아사마의 손바닥이 추가타를 가한다.


"에휴! 이 정신없는 년아! 지난번 아리마 9착한걸로 너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어? 와서 나한테 바짝 엎드려가지고, 눈물을 뚝뚝 흘려대고, 어? 머리를 땅에 박으면서 사죄했다고!"


"헤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양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라모누, 어쩐지 양 볼이 발그레하다.


"저번에 우마스타에서 봤는데, 나 때문에 우는 남자랑 결혼하랬어!"


아사마의 손바닥이 다시 라모누의 엉덩이와 등짝을 난타한다. 몇 번이나 몸을 경직시키면서 굼실굼실 피하는 그녀를 따라다니며 팡팡 때려대는 아사마는 분통을 터트린다.


"그걸 알기는 아냐! 알기는 알아? 이 정신빠진 년. 안다는 년이 그래? 너, 너네 트레이너한테 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 사람이 넋이 나갔냐고!"


"그게......"


라모누가 잠시 생각하다가 팔짱을 꼈다. 학원에서 으레 짓고 다니는 냉랭한 표정, 낮게 깔린 목소리.


"......사랑이 부족했네."


"누구의! 누구의 사랑이 부족해 이년아! 어?"


"모누! 나지! 당연히 내 얘기 한 거지! 그만 때려! 할머니!"


"근데 왜 니 이름을, 빼! 처먹냐고 이것아!"


"할머니가 당연한 건 생략하라면서!"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면서 손바닥을 피해대는 라모누의 머리를 쥐어박는 메지로 아사마. 혹이 날 것 같은 태평양 이마를 감싸쥐는 그녀를 향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현기증이 나는지 비틀비틀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라모누는 여전히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지 빽 소리를 높인다.


"할머니가 기품있게 말하래서 아가씨처럼 말하고! 되도록 말 많이 하지 말래서 생략했는데 뭐가 문제야!"


"말을 많이 하지 말랬지, 필요한 말을 하지 말랬어? 이것아, 너는 왜 필요한 말만 골라서 생략하냐!"


"힝...... 필요한 말이었단 말야."


"그래도."


메지로 아사마가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쥐어 책상 위에 두고,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숨을 고른다.


"아직 희망이 있어. 너네 트레이너가, 더욱 정진하겠다고 그러더라. 너같은 것도 담당이라고, 으휴. 못할 짓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너한테는 그 사람 밖에 없어."


"에히히, 맞아. 나는 토레나 님밖에 없어."


구깃구깃, 모자가 아사마의 손 안에서 구겨진다. 뒷목이 당기는지 고개를 뒤로 가볍게 젖히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걸 아는 년이 그런 식으로 말해......?"


"왜! 옆집 루비도 이렇게 말하는데! 온천여행 간다고 막 자랑하고 그랬단 말야!"


"네가 루비가 아니잖아......네 액면가가 루비보다 이 할미랑 더 가깝잖아!"


"흥! 그래도 난 메지로의 지보라고 불릴 만큼......"


"지보년아! 말을 끝까지 들어!"


"힝."


"루비는 정략결혼도 어마어마하게 들어온댄다. 너? 너는 글렀어."


"그치만, 그치만......"


머뭇머뭇대며 할머니 눈치를 살피던 메지로 라모누, 결국 아사마가 덧붙인 마지막 말에 터져버렸다.


"세상천지에 너같은 애 데려간단 사람이 하나가 없더라. 말 싸가지 없고, 레이스밖에 모르고, 반응도 짜서 트로피로도 못쓸 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댄다!"


"그거 다 할머니가 시킨 거잖아악!"


암탉 우는 소리같이 빽 질러대면서 라모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일반상식 부족한거 들키지 말라고 말 적게 하라고 하고! 경박해보이지 말라고 한자어 쓰라고 하고! 차갑게 말하라고 하고! 물의 안빚게 레이스에만 집중하라면서!"


"아이고, 이년아. 눈치껏 눈치껏 했어야 할 거 아냐!"


아사마가 책상을 쾅 내리치며 일갈한다.


"일심동체 안하고 뭐했어? 이제 너 시니어 급인데, 어? 그저께 라이언이 지 트레이너 데려와서 나 보여준다고 그러는거 못 봤지?"


"엑......."


"할머님을 뵙게 될 거라고 쩌렁쩌렁 울리길래 장난인 줄 알았지, 근데 넌 뭐했냐고 대체!"


"몰라! 할머니 미워! 할머니가 시킨대로 했는데 안 됐잖아! 근데 왜 내 탓만 해!"


"그래도 이년이......"


"이제 다 싫어! 모누 이제 자유롭게 살 거야! 모누 생각대로 살 거야!"


그리고 기껏 모누 생각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짜낸 아이디어가 "갸루가 되겠다" 인 것이다. 메지로 아사마는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앉았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에휴, 이제 파머 하위호환이 되겠다고......"


"아아아아아! 안 들려! 모누 안 들려! 할머니처럼 가는 귀가 먹어서 안 들려! 모누 나갈거야!"


쿵쿵 울리는 발소리,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닫혔다. 얼굴을 감싸쥐고, 메지로 아사마는 한참을 자리에 앉아서 고민했다. 얼굴 주름살을 펴려는 것처럼 꾹꾹 눌러대다가, 걱정하며 다가온 집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모누 쟤 카드랑 다 끊어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