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뚝섬경마장 시대의 명마>


에이원 (?~?, 암말)


1969년 부터 1974년 까지 활약한 호주 출신의 경주마. 이 당시 한국경마는 전산화는 커녕 경마장에 전광판 하나도 없어 분필로 출주마의 이름과 배당률을 표기하던 시점이라 에이원에 대한 모든 기록도 수기로 작성되었다. 문제는 이 당시 자료가 수해로 인해 유실되어 마사회도 에이원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 따라서 에이원에 대한 대부분의 자료는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 구전으로 남아 내려오는 전설의 명마다.


에이원은 호주에서 수출한 경주마로, 그 혈통을 알 수는 없지만(아마 좋은 혈통은 아니었을 것) 호주에서 경주마 수출을 늘리려는 목적 하에 경마 선진국인 홍콩으로 보낼 정도의 좋은 경주마를 한국에 수출한 경우다. 에이원이라는 이름은 당시 한쪽 다리에 A1이라는 낙인(도장?)이 찍혀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에이원은 뚝섬경마장에서 6년간 72승, 비공식 25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명실상부 한국 경마 역사상 최고의 명마 중 하나다. 다른 말들이 에이원과 같은 조에 편성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일종의 핸디캡으로 다른 말들이 먼저 출발해 100m 지점을 통과하면 그때 출발한 적이 있을 정도로 다른 경주마들에 비해 압도적인 실력을 지녔었다고 전해진다. 1971년 5월 24일자 경향신문의 한 기사에 의하면 당시 팔린 마권 350만원 중 340만원이 에이원에게 걸렸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압도적인 실력을 지녔을지 대충 상상이 될 것 같다.



연안부두 (1978~1998, 수말)



1978년 호주에서 태어나 1980년 4월에 한국으로 도입된 호주 출신의 경주마. 몸집이 작고 스피드가 빠르지 않아 당시 담당 기수의 회고로는 선행보다는 추입 성향을 가진 경주마였다고 한다. 1982년은 각종 대상경주가 처음으로 실시된 원년으로, 연안부두는 무궁화배(현 코리안더비), 그랑프리, 농수산부장관배 3개의 대상경주를 우승하며 한국 경주마 중 최초로 대상경주 3관을 달성한 업적을 남긴 명마다. 1982년 당시 대상경주는 총 4개에 불과했으니, 이 중 3개를 우승한 것은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연안부두는 1981년부터 1982년까지 총 13연승을 기록했고, 1982년에는 획득상금 1위에 오르며 연도 대표마로 선정되었다. 이렇듯 연안부두가 보여준 파괴적인 실력 탓에 말에게 부담시키는 부담중량이 점차 늘어났고, 1983년부터 출전횟수와 우승횟수 모두 줄어들며 반강제적인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4위 밖으로 벗어나 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연안부두는 당시 우수한 경주마를 육성해야 한다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연안부두 이후 당시 최고의 경주마였던 포경선과 함께 반강제적으로 은퇴를 당했다. 이러한 반강제적인 은퇴의 배경에는 너무 압도적인 말이 있으면 경마의 흥미가 반감될 수 있다는 마사회의 판단도 있었다. 아직 현역으로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던 연안부두는 1984년 강제로 은퇴식을 갖고 씨수말로 전환된다.


우수한 경주마를 육성하겠다는 시도는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연안부두의 자마들 중 1군급은 총 6마리, 그 중 1988년에 출생한 상승군(67전 12승, 각종 대상경주에서 2~4착을 기록)이 그나마 연안부두의 자마들 중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연안부두는 제주로 옮겨져 서러브레드와 제주마의 혼혈인 한라마 육성을 위한 종마로 활동하다 1998년 목뼈 골절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80~1991, 거세마)



1980년 11월에 태어나 1983년 데뷔한 뉴질랜드 출신의 경주마.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증조부에 그 유명한 씨수말 노던 댄서가 있다. 1985년 이전까지의 기록에는 착순이 기록되어있지 않아 공식적으로 인정된 기록은 아니지만, 통산 43전 31승, 2위 5회(승률72%, 연대율 83%)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긴 말이자, 15연승을 기록했고, 1985년, 1986년 2년 연속 그랑프리를 우승한 전적이 있는 명마이다.


1985년 그랑프리 우승 당시 포경선에 기승한 지용철 기수는 인터뷰에서 그랑프리 당시 포경선의 조교를 맡았던 故최연홍 조교사가 "오늘은 그랑프리니까, 한 번 몰아보자. 얼마나 이기는지 한 번 보자."는 말을 듣고 아무런 작전도 없이 그냥 포경선이 달리고 싶은 대로 달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뒤에 있는 말들이 따라잡지도 못 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 결승선을 통과했다고. 포경선의 능력이 워낙 출중해서, 당시 기수들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작전 지시사항은 '등에서 떨어지지만 말아라' 였다고 한다.


포경선은 신체조건도 좋았는데, 당시 경주마들이 430~450kg대로 몸집이 작고 가벼웠던 반면, 포경선은 혼자서 500kg대의 마체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계속 이기면서 부담해야 할 부담중량도 68kg까지 늘어났는데, 포경선은 큰 문제 없이 50kg 초반대의 부담중량을 진 다른 경주마들을 이기며 2500m 코스까지 무시무시한 괴력을 과시하며 질주했다고 한다.


포경선이 기록했던 15연승이라는 기록은 2011년 미스터파크가 17연승을 기록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던 기록으로, 무려 24년간 이어져왔다. 당시 기수나 조교사로 활약했던 사람들은 포경선을 역대 최고의 말로 꼽았는데, 그 이유가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은 말'이라서. 당시 기록이 현존하는 말과 큰 차이가 없는데다가 신체 조건도 좋아 지금 와서 뛰어도 잘 뛰었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포경선은 앞서 말했듯 연안부두와 같이 1988년 은퇴식을 가졌다. 다만 포경선은 거세마였기 때문에 종마로 활동할 수 없어 경마기수양성소에서 교육용 말로 전환되어 활동하였다. 1987년 부상을 당했던 오른쪽 다리가 악화되어 1991년 포경선은 인도적 차원으로 안락사 되었는데, 최초 15연승 달성과 같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사회측에서는 포경선을 전신박제하여 말 박물관에 전시해놓았다. 하지만 이후 박제 상태가 나빠져 수장고로 옮겨졌다가 최종적으로는 폐기처분 되었다고 전해진다.


포경선과 관련된 전설적인 일화 또한 전해지는데, 1986년에 외부인이 경주마 마방에 침입하여 포경선을 비롯한 당대 유명 경주마들에게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마비제인 콤비푸렌을 주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경주마들의 경주 진행에 문제가 생긴 조교사들과 기수들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는데, 포경선은 이 이후로도 멀쩡히(??) 경주를 뛰어 우승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