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비 3만엔, 교통비 1000엔, 남은 돈 557엔.


기차역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긴다.


우선 기념할만한 밥부터 사볼까.


트레센은 넓다고 하니까, 분명 걷다보면 배고플거야.




대충 시선에 들어온 편의점으로 들어가자 권태로운 표정으로 카운터에 앉아있던 알바가 고개만 까닥거렸다. 어딜가던 똑같네, 알바는.


마주 고개를 숙이고 컵라멘 코너로 향했다.


내가 사려는 건 패밀리 컵라멘.


마트를 불문하고 수많은 컵라멘 중 가장 위에 있는 컵라멘이자


가격 550엔의 초 비싼 컵라멘이다.


굶거나 인간 사료만 씹어대던 내겐 극한의 사치품. 


하지만 살거다.


오늘은 초초 기분좋아지는 날이니까...!




가족이서 먹자 패밀리 컵라멘! 아빠도 엄마도 정말 좋아하는 패밀리 컵라멘~!




떨리는 손으로 계산을 마치고, CM송을 중얼거리며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얼마간 걸어가자 [축! 신입 트레이너 환영식]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트레센 입구가 한 눈에 보였다.


마침 신입 트레이너들이 모이는 날인 것 같다. 어수선한 인파 속에 나와 비슷한 정복을 입은 사람들이 입구를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TV속 잘난 트레이너도 수험생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쩐지 옷을 차려입은 나까지 엘리트가 된 것 같다.


시작부터 기분 좋은데!




벌써부터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한껏 띄우며, 나는 자연스럽게 인파에 섞여 트레센으로 걸어들어갔-




"마, 마야노 탑건이다..."


"진짜잖아?"




심상치 않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인파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에 주황색 머리카락, 커다란 눈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까지.


미인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외모를 가진 '우마무스메'가 입구에 서있었다.


신이 있다면 저 애를 만들 때 잔뜩 공들여서 만들었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 나같은 놈 인생은 남은 시간에 대충 했을테고.


그건 그렇고 이름이 마야노 탑건인가. 키는 작은데 이쁘긴 진짜 이쁘네.




하지만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가고 나서야 소녀의 이상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두 눈은 무언가를 찾는 듯 끊임없이 주변을 훑고 있고, 가슴 속에 모아 쥔 양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언젠가 골목길의 점쟁이가 내게 말했던 예언을 떠올렸다.




'너, 떨고있는 우마무스메를 조심해.'


'네?'


'세상이 뒤집히는 것을 봤어. 떨고있는 우마무스메를 조심해.'




점쟁이는 내 집에 휴지가 없어서 큰일을 보고 닦지 못한 것도 맞췄던 용한 사람이었다.


나같이 못배운 사람들에겐 일기예보보다 믿음직스럽다고.


그러니까 이쁜건 이쁜거고 아닌건 아닌거다. 시선을 떼고 다시 인파에 섞이려는 순간.




미친 것처럼 두리번거리던 마야노 탑건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더욱 커지며,




갑자기 내 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씨발!




"...다 비켜!"




천천히 걸어가는 인파들을 밀치며 트레센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뭐야, 뭐야, 뭐야!


최고로 기분 좋아야하는 날에 이게 뭐냐고!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지나갈게요...!"




잔뜩 화가 난 인파 속을 헤쳐나가며 어떻게든 마야노 탑건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러나 힘겹게 트레센 부지 안으로 도망친 나를 반기는 건, 먼저 도착해있는 마야노 탑건이었다.




"헉, 허억, 헉..."




지쳐버려 숨을 헐떡이는 이쪽과 다르게 저쪽은 힘든 기색도 안보인다.


뭐야 저게. 인간 맞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물러서며 나와 마야노 탑건을 애워쌌다.




"마야노 탑건이 저 트레이너한테 볼 일이 있나본데."


"드디어 담당을 정하려는건가?"




주변의 웅성거림이 묘하게 거슬린다.


이렇게 주목받는 거, 초등학교 반장 선거 이후로 처음인데.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속이 울렁거린다.


거칠게 쉬어지는 숨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겠다.


그러던 중 내 앞까지 다가온 마야노 탑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트...레이너?"




마치 연인을 찾은 것처럼, 고개 숙인 내 얼굴을 여기저기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린다.




"나, 나는 네 트레이너가 아니야."




가까스로 숨을 들이마시며 대가리를 쳐들고 눈 앞의 소녀를 노려봤다.


네가 뭔데 날 쫒아와? 오늘은 내가 최고로 기분 좋아야하는 날인데.




그러자 나와 시선을 마주한 마야노 탑건의 커다란 눈망울에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서서히 험악해져가는 주변 분위기.


조용히 즐기다 가려고 했는데, 이 녀석 때문에 다 틀려먹었다.




"울지만 말고 말 좀 해...!"




어이가 없다. 대답도 안하고 내 앞에서 울기만 한다.


물기 어린 눈가에서 느껴지는 애절한 눈빛.


나쁜 건 이 녀석인데,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다.




"트레이너..."


"그러니까 사람 잘못봤다ㄱ"


"트레이너!!!"




몸을 작게 떨던 마야노 탑건이 온 힘을 다해 내게 달려들었다.


익숙하다는듯 내 품으로 들어와 단번에 안겼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마야노 탑건의 따뜻한 체온.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상자 속에 넣어놨던 사시미 칼이 생각났다.


최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