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2화

3화

4화

5화


보잘 것 없는 의지의 말로는 비참하고, 분수를 따르지 않는 행동의 말로는 처참하다.


인용할 상황이 별로 없는 누군가의 지론이 오늘날 전혀 다른 형태로 인용되고 있을 때, 그 말을 했던 당사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당연하게도 그 말을 인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안위 따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제 말이 명언이 된 것조차 모를테지. 


그렇다면 명언은 의지의 도구다. 신성하기 그지 없는.




키타산 블랙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서 그 말을 여러 번 곱씹은 후, 손에 들려있던 칼을 쳐들었다.


상대방의 의지를 끊는 것에는 칼날보다 양 손을 찢어버리는 것이 더 용이하겠지만, 그녀는 그런 것조차 신경쓰지 않았다.


희고 고운 손길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3척은 족히 넘는 칼의 자루를 두어 번 쓰다듬는다. 손을 펼치자 흐르는 핏물을 자루에 먹이고, 쇠할대로 지친 벚꽃이 걸려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에 인사는 필요없겠죠? ......도둑고양이 년."




신음과도 같은 대답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을 때, 대기하던 조직원이 성냥불을 벽 한켠에 갖다댔다. 섬광이 몇 번 일고서 빛나기 시작하는 촛불이 처참하기 그지없는 광경을 비춘다.


피에 젖은 검은 머릿결을 가볍게 털어재낀 키타산의 시선에 벽에 걸린 여인이 보였다.


불필요한 옷가지와 신체부위들을 제거한 여인의 몸에서는 기묘한 구릿빛 광채가 나고 있었다. 여인의 원래 피부가 창백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그녀는 실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여인의 얼굴에 칼날을 들이댄다.


말할 수 없게 재갈을 물려두는 수법은 어느 고문에서나 할 수 있는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도저히 그것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살점이라고는 남지 않은 볼에 칼을 쑤셔박아 밑으로 내리면, 재갈이 풀림과 동시에 여인의 비명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울렸다.


이제는 좀 죽어주면 좋을텐데- 입술을 삐죽거린 키타산은 칼을 거꾸로 쥐고는 숨을 헐떡이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저지른 모든 것들을 되갚아주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다죽어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아도 끓어오르는 분노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건 곤란했다. 트레이너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소녀여야만 하니까.




"역시 죽여야겠네요!"




느껴지는 여인의 시선에 그녀는 빙긋 미소지으며 결론내렸다. 칼을 내려치기 전 여인의 시선이 보인다.


흉측하게 변해버린 육체에도 아름다운 벚꽃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렇기에 키타산 블랙은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눈가를 비비며 일어나 벽에 걸린 화면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한 여인이 남자와 몸을 섞고 있었다.


안겨있었다.


너무나도 행복해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타인이 보기에 너무나도 야릇한 그 광경은 키타산에게 있어 가증스러운 창녀의 일방적인 강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개같은 년.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뒤로 돈 키타산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정사를 보고 눈알을 파낼 뻔했다.


3년 전 토카이 테이오 언니를 쫒아 트레센에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드디어 동경하는 테이오 언니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성취감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대낮의 거리를 마음대로 활보하던 중에 만난 것이 지금의 트레이너였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힘들어할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준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숭고한 나머지 키타산의 17년 인생 전부를 뒤바꿨다. 연모하는 감정과 동시에 첫 사랑을 처음으로 깨달은 그녀는 서서히 사랑의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갑작스러운 어필은 그에게 부담만 줄 것이다. 사소한 호감 하나하나를 쌓으며, 가슴속을 저미는 사랑을 애써 숨긴체 서서히 다가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더러운 것들이 그에게 꼬이기 시작했다.


트레이너에게 다가가는 것들은 더러웠다.


그 년들은 자신이 느낀 그 남자의 헌신적인 인간상과 숭고함을 모르면서도 겉만 보고 추잡대는 날파리들이었다.


그리고 더렵혀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방에 들어온 조직원들이 때가 되었음을 말해온다. 


꿈 속에서 로렐을 찢어발겼던 검자루에 깊은 분노를 담아 움켜쥔다. 


키타지마 가는 더 이상 사회의 규칙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거사의 때가 다가왔다.








창가에 서있는 꽃 두어 개가 제 빛깔을 내고, 두어 번 경험한 타인의 온기는 초점 없는 햇빛에 절여 뚜렷해진다.


이른 아침의 맑은 햇빛이 머리맡에 닿아 눈꺼풀 사이를 헤집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맞은편의 벚꽃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다음으로는 이불 밑으로 빠져나온 손을 마주잡았다.


마치 어제처럼 퍼지는 육욕의 기분좋은 따뜻함 속에서, 피부를 맞대고 있던 그녀가 일어나며 속삭였다.




"일어나셨나요, 당신."


"응, 로렐."




귀를 쫑긋거리며 부드럽게 미소짓는 로렐에게 함께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아침을 맞이한다. 그런 광경에는 어제의 그 아침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경직된 미소와 죄책감 대신 가슴 속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기쁨.


그 기분좋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이불 옆에 개어놓은 옷가지를 입었다.


입을 옷을 다 입고 멍하니 앉아있는 나와 달리 로렐은 전 날 입고있던 속옷과 내가 입던 흰 셔츠만을 입고선 부끄러운 얼굴로 승부복을 들었고, 나는 그걸 보고 나서야 로렐이 어제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씻는 장소는 1층에 있어. 옷이 구겨졌다면 다림질이라도 해줄게."


"아, 아뇨. 어제 일이 생각나서요. 트레이너와, 그, 뾰이하던 중에... 옷깃에 키스 자국이 좀......"


"아..."




어젯밤의 격렬한 뾰이 때문에 옷이 더러워진 모양이었다. 이상해지는 분위기에 고개를 돌려버리자, 미묘하게 발을 동동 구르던 로렐은 옷을 들고서는 밑으로 내려갔다.


유난히 불규칙한 걸음걸이를 보니 여러가지 의미로 안심이 된다.


늦은 나이에- 아침을 둘이서 맞이하는 것이 정말 기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기지개를 폄과 동시에 하루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