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너 씨이.”

벌써 몇 번째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 서서히 밤이 깊어가는 트레이너의 집 소파 위, 그녀를 위해 준비된 특등석에 앉아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그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둘 사이 공유하는 추억 얘기들이다. 시시하다면 시시한 일상, 휴일의 사건들을, 같은 이야기를 놓고 두 다른 시선으로 풀고 있었다. 필요에 의해서, 혹은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어서 담아두고 있었던 이야기들.

“으음.”

적당히 마무리될 쯤에 다이아는 눈을 살짝 감고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요청한다. 이제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입술에 가볍게 내려앉는 포근한 느낌에 만족스러운 숨을 내쉰다. 몇 번이나 입술을 뒤로 뺐다가 다시 앞으로 내밀어, 맞닿는 순간을 만끽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계속해도 질리지 않는다.

“......헤헤.”

웃으면서 그의 볼을 매만지다가, 다시 재촉하는 것처럼 그의 귓볼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싫어하는 내색은 없다. 코 끝이 서로를 위성처럼 빙글빙글 돈다. 조금 더 긴 시간을 맞닿는 동안, 그녀의 몸이 조금 더 가까이 당겨졌다. 그녀가 그를 내려다볼 정도로 밀착한 거리, 잠시 잦아들었던 두근거림이 다시 커졌다.

“그런데, 트레이너 씨이.”

“응?”

“물어보고 싶은 거 있다요.”

“뭔데?”

그의 눈을 내려다보면서 다이아는 빙긋 웃었다. 엄지손가락을 올려 그의 윗입술을 바라보며, 정리하는 것처럼 쓰다듬고 있었다.

“조금 불편했어요?”

“아니? 왜?”

“왜 입술 자꾸 움직여요? 위치가 이상했어요? 뭔가 제가 서툴렀으면 얘기해 줘요.”

트레이너 씨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조금 놀란 것도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다이아의 눈도 크게 뜨였다.

“뭔가 이상한 말 했어요?”

“귀엽네. 진짜.”

“그건 알아요. 질문에 대답이나 해 줘요.”

“천천히 알려줄게. 그냥......”

그녀의 머리카락을 입 근처와 볼에서 치워 뒤로 넘겨주면서 그가 미소지었다.

“내가 생각한 만큼 네가 어른은 아니었다 싶네.”

“대체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요?”

“그것도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 알려내요.”

괜히 어린애 취급받는 느낌에 발끈해서, 다이아는 양 손으로 그의 볼을 꾹 눌러 모았다. 처음엔 간단한 화풀이였는데, 세로로 길게 모여 튀어나오는 입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웃긴 모양이다.

“으으, 무쌩겼어.”

완전히 본말이 전도되었다. 몇 번이나 세게 눌러 그의 얼굴을 구기며 놀려댔다.

“히히. 푸히히.”

“흐즈 므르.”

“말도 똑바로 못한대요. 바보. 바보.”

“그므느......”

“재밌다아......”

그의 목에 팔을 목도리처럼 감고 다이아는 볼을 맞대 기대왔다. 어른을 놀려먹고 있다는 즐거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는 충만함, 맞닿은 몸의 체온과 감촉에서 오는 들뜨는 느낌이 입꼬리를 내려가지 못하게 했다. 웃으려고 한 게 아닌데 자꾸 웃게 된다. 꿈만 같다. 얼마 전까지는 정말로 꿈에서나 겪던 상황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꼬집으면 현실로 돌아갈 것만 같다.

“......아파, 다이아야.”

트레이너 씨의 목을 살짝 꼬집어 봤다. 그가 아파하는 걸 보아 꿈은 아닌 것 같다. 다행이다. 꿈도 아니고, 그녀의 망상도 아니다. 현실이다. 꼬리가 리듬감 있게 살랑거려 그의 양 무릎을 간지럽혔다.

“트레이너 씨이.”

“왜.”

“내가 좋아? 다이아를 좋아해?”

“응.”

“에헤헤. 부끄럼도 없나봐. 바로 대답하고.”

“그러면ㅡ.”

“그건 아니야요.”

“알았어.”

여지가 남지 않게 미리 끊어버린 뒤 다이아는 귀를 최대한 그를 향해 눕혔다. 부드러운 귀 끝이 그의 볼에 올라 간지럽게 했다.

“또 듣고 싶어요. 계속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소리가 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이아는 붉어져 열기가 올라오려는 얼굴을 숨기려고, 조금 더 바짝 붙어 기댔다. 부끄럽지만,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붙어있으면 머릿속에 가볍게 맴도는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트레이너 씨가. 귀, 만져줬으면 좋겠어요.”

그 큰 손 안에 정중하게 감싸서, 크기를 재고 윤곽을 따라가듯이 건드려줬으면 한다. 그때 느꼈던 기분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잘 설명하지 못하겠고, 어쩐지 그녀를 약해지게 만드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서우면서도, 다시 느끼길 바라고 있었다.



“트레이너 씨이, 이제 그만, 그마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따금 창 밖에서 들리던 자동차 소리도 멎고, 짧고 높은 벌레 우는 소리만 새어들고 있었다. 그 소리에 섞여 다이아도 짧고 높은 소리를 간헐적으로 내고 있었다. 불안하고 불규칙한 호흡이 그녀의 체온보다 조금 더 뜨거웠다. 눈에는 그녀가 기숙사에서 잘 때 쓰던 안대가 씌워져 있다. 시야가 차단되어서, 다리가 초조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서, 그의 셔츠 어깨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특등석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져내릴 것 같았다.

“그만 해라요......”

그녀가 몇 번째 말하는데도 귀를 매만지는 손은 멈춰주질 않는다. 트레이너 씨가 그녀의 요구를 묵살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그렇게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다. 들리질 않는 걸까? 한편 멈춰주지 않는다고 딱히 불만을 가질 일도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세게 쥐거나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귀가 얼얼했다. 위로 잡아당겨 들어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그녀를 덮쳤다. 놀이기구에 타고 있는 것 같은, 일종의 무중력 상태가 찾아왔다.

“트레이너 씨이. 정말로 그, 그만!”

아까와 목소리의 분위기가 달랐다. 소리의 피치가 올라가고 조금 더 다급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귀에 야트막한 이명이 들렸다. 그의 손을 피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더 닿게 하려는 건지 이쪽 저쪽으로 휙휙 움직여댔다. 귀 근처에서 시작해서 목 아래와 명치께를 꾹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을 호소하다가 포기한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터져나오려는 것들이 있어서 그걸 억누르려고 필사적이었다. 목소리도 그 중 하나였다.

“으윽, 끄윽! 아윽!”

꼭 아픔을 참는 것 같은 소리가 새어나오고, 그녀가 몸을 몇 번이나 크게 떨었다. 흔들리는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들썩거린 뒤에야 손이 그녀의 귀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감각들에서도 역시 자유롭게 풀려났다. 쓰라린 듯 알딸딸한 기분만 안에서 약하게 파도치고 있었다.

“......트레이너 씨이.”

숨을 고르면서 다이아가 불렀다. 잠시 후 안대가 그녀의 눈에서 풀려나왔다. 안대 안도 밖도 어차피 어둠 속인 것은 똑같아서 적응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가에 찡하고 찌르는 듯한 느낌에 흘렀던 눈물을 소매에 문질러 닦고, 다이아가 트레이너의 실루엣을 확인했다.

“이,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아.”

바짝 마른 목으로 약한 소리를 내면서,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 일단 되는대로 두들겼다. 힘조절을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적당한 힘으로 타격이 들어갔다. 몇 번이나 그를 무쌩겼다고 매도한 뒤에야 다이아는 다시 양 팔을 벌렸다.

“안아주세요.”

자기가 시작하자고 한 것이니 탓할 것은 못 되지만, 모든 게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무섭고 알딸딸했다. 그의 품에 쏙 들어가 기대자 갑자기 지치는 느낌이었다. 방금 그게 뭐였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낯선 것을 곱씹으면서, 이름표를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다이아야.”

“......응, 트레이너 씨.”

“피곤해?”

“조금요......”

“시간이, 3시 쯤 된 것 같은데. 일단 좀 잘래?”

“아직 자고 싶지 않은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언뜻 잠이 들려는 것을 그가 일으켜 세워줬다. 땅을 디뎌선 느낌이 굉장히 낯설었다. 모자걸이에 걸려있다가 내려온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일 뒤에 땀이 배기 시작한 그녀의 등을 트레이너 씨가 토닥여주었다.

“가서 씻고 와. 언제 자도 괜찮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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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녀가 생각한 일을 그도 생각하고 있으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물을 멍하니 맞고 있는 동안,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자신이 어디까지 준비하고 나가야 할 지 한참을 고민했다.

“트레이너 씨.”

“왜 그러니.”

둘 다 너무 피곤했다. 햇살이 두 사람의 눈을 찌를 무렵에나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고민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혹시 우리, 어젯밤에 한 거요. 뾰이 아니죠?”

“뭐? 그야, 아니지.”

땀에 젖고 조금 구겨진 승부복을 따로 가방에 챙겨 집을 나서기 전 다이아는 확인했다. 그녀가 뭘 적극적으로 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실수 투성이였던 것만 같았다. 트레이너 씨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줬을 때에서야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예요. 조금 피곤했거든요. 트레이너 씨가 요구하면 어쩌지 고민했다고요.”

“별 걱정을 다 하네.”

자기가 생각해도 그렇다는 듯 그녀도 따라 웃었다.

“솔직히 처음인데, 엉망으로 하면 곤란하잖아요.”

“항상 이상한 부분에서 날 놀라게 하는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모르고,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들을 알아채곤 한다. 단단하면서도 무르고, 탄탄하면서도 허술한 그녀를 향해 트레이너 씨가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뾰이라고 착각할 만큼 마음에 들었나봐?”

“아직 잘 모르겠지만......그렇게 말씀하시니 새삼 부끄럽네요. 그치만 저도 알 거 다 아는 나이라구요.”

그의 손이 머리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게 양 손으로 붙잡아두면서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좀 더 이렇게,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 그거잖아요.”

“참 노골적이면서도 뜬구름 잡는 설명이네.”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공부해 올게요.”

“그런 건 천천히 시간을 두고 알아가도 괜찮아.”

“저는 괜찮은데 트레이너 씨가 괴로울 까봐 그러는 거예요.”

갑자기 공격해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빠르게 오므라들며 위로 올라가 그대로 아래로 내리떨어졌다. 조준이 틀리진 않았다. 분명 그녀의 이마 위쪽을 사선으로 때리고 지나갈 수 있을 터였다.

“에헷.”

다이아도 다이아 나름대로 성장했다는 것이 실패 원인이었다. 그의 손 위에 손을 포개둔 이유가 있다. 이미 약간 경계한 상태로 던진 말이니, 트레이너 씨의 느려터진 손이 범접할 수는 없다. 고개를 휙 뒤로 빼 피하고 열받는 웃음소리를 냈다.

“다 큰 처자 꿀밤 때리는 건 이제 그만 둬라요. 트레이너 씨. 이제 우리 사이에 폭력은 어울리지 않아요.”

“너는 나 때리잖아.”

“다 큰 어른이 맞을 짓을 하니까 그렇죠.”

“알았다, 알았어. 빨리 돌아가. 슬슬 짜증나니까.”

“이런 게 괘씸하단 말이예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양 팔을 그를 향해 벌렸다. 눈만 찡그려 토라진 척을 한다.

“확 허그 안해주고 가는 수가 있어요? 감당할 수 있어요?”

“것보다, 다이아야.”

“응?”

“본가에 머무는 동안에,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보지 않을래?”

“하고 싶은 일?”

팔을 벌린 채로 다이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트레이너 씨가 작은 노트 하나를 가져와 흔들어 보였다.

“버킷리스트같은 거라 생각해도 좋아. 지금은 서로 제쳐놓더라도, 모든 게 정리된 다음에 함께 할 일들을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꼭 무슨 수험생같은 얘기를 하시네요.”

“수험생 때도 가끔 하던 거거든. 그렇잖아. 이게 제법 힘이 되고 희망이 된다고.”

“......좋아요. 다른 것보다, 트레이너 씨가 장래 일에도 절 포함시켜 준다는 게 기뻐요.”

“그럼 그때 얘기하는 거다?”

그의 말에 다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너 씨가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그녀가 돌아갈 시간이다. 원정 직전이니 그녀의 가족, 사토노 가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마지막 준비라거나, 현지에서 도움이 될 만한 연락망 따위를 그녀 나름대로 챙겨둘 시간이었다. 노트를 들고 돌아서려는 그를 그녀가 ‘음!’하는 짧고 굵은 소리로 불러세웠다. 여전히 팔이 아까 그대로 위로 올라가 있었다.

“슬슬 팔 아파요. 빨리.”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어본 건 아무래도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트레이너가 다가가자마자 식충식물이 벌레를 잡듯이 그녀의 팔이 홱 감겨왔다. 체중을 실어 그에게 기대, 그녀가 목에 얼굴을 느릿느릿 부벼댔다.

“점점 떨어지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아......트레이너 씨도 그래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또 연락할게요.”

“또 보자.”

문을 열어두고 마지막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려 하이파이브를 했다. 손깍지를 끼고 흔들고 마주본다고 또 몇 초인가를 그냥 보내다가, 사토노 가에서 보낸 고용인이 복도에 나타나고서야 마지못해 떨어졌다. 트레이너 씨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꾸밈없는 순수한 마음이 가장 파괴력이 강하다고 하던가, 그녀가 온갖 술수를 부릴 때보다 지금이 훨씬 견디기 어려웠다.

“풋풋하네......”

자조적으로 말하면서도 오랜만에, 그 역시 혼자 남은 집에서 입꼬리가 올라가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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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향하는 사토노 그룹 소속의 비행기가 출발을 위해 준비중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별도로 마련된 게이트를 지나 통로를 걷는 동안 트레이너는 괜히 두리번거렸다. 모든 것이 처음인 그와 달리 다이아는 꽤 익숙한지 힐끗 돌아보고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비행기 처음 타요?”

“이런 식으로 타는 건 처음이야.”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의 손을 잡아 끌면서 다이아가 신이 나서 웃었다.

“자주 이렇게 끌고 다닐 거니까.”

나란히 자리에 앉아 잡담을 하기도 하고, 다시 가까워진 거리를 기념하는 것처럼 살짝살짝 건드리면서 장난을 치는 사이 요란한 진동과 함께 비행기가 공항에서 떠나 날았다. 서서히 올라가는 고도, 잠시 귀가 먹먹한 느낌이 가시고 나자 둘은 일어나 뒤편에 마련된 소파 테이블에 앉았다. 손에는 ‘숙제’가 적힌 노트가 한 권씩 들려 있었다. 별도로 마련된 종이 위에 트레이너가 마커를 하나 올려두었다.

“서로 생각해본 것들을 리스트로 만들어보자.”

“좋아요. 히히. 잔뜩 생각해 놨으니까, 큰 종이를 준비해야 할 거예요.”

다이아가 노트를 펼쳐 그녀의 특등석 위에 앉았다. 머리로 몇 번이나 그의 턱을 툭툭 때리면서 재촉하자 허리를 둘러 팔이 안전벨트처럼 단단히 채워졌다. 그녀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제가 가장 트레이너 씨와 하고 싶은 것......”

“설마 뾰이는 아니지?”

“그, 그럴 리가요......”

장난처럼 건넨 그의 말에 다이아가 노트를 급히 한 페이지 뒤로 넘겨버렸다. 원래 자기는 첫 페이지에 여백을 두고 노트를 쓴다는 물어본 적 없는 변명까지 하면서 그를 째려보았다.

“그러는 트레이너 씨야말로 뾰이라고 적은 거 아니죠?”

“그, 그럴 리가 있나. 날 뭘로 보는 거야.”

함께한 시간이 길다보니 노트 쓰는 버릇까지 닮아버렸나보다. 한 페이지 뒤로 노트를 넘겨버리는 트레이너를 보면서 다이아가 올라가는 입을 오른손으로 가려 쿡쿡 웃었다.

“바보.”

“바보같네.”

“뭐, 그치만, 우선순위 상관없이 이미 서로 합의한 사항이니까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요......”

그녀의 복부 쪽에 편안하게 깍지껴 감겨 있는 그의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가지고 놀면서 다이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조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도 괜찮으니까요.”

“최대한 배려하면서 부드럽게 할 거야.”

“잔뜩 쓰다듬어 주셔야 해요.”

“시작하기 전부터 끝난 다음까지 계속.”

“세상에 우리 둘 밖에 없는 것처럼.”

“네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어느새 그녀의 어깨를 타고 넘어와 있는 그의 볼에서부터 가볍게 입술을 대면서, 귓바퀴까지 넘어간다.

“좋아요.”

“좋아.”

“잔뜩 기쁘게 해 드릴게요.”

“벌써 기뻐.”

“......무슨 얘긴지 다 알면서.”

귓볼을 가볍게 깨물면서 그녀가 작게 쏘아댔다. 아프다고 돌아본 그의 코 끝도 앞니로 살짝 긁었다. 딱딱, 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위협해 웃었다.

“그래. 무섭다. 다음으로 생각해본 걸 말해 봐, 피라냐야.”

“음. 사토노 피라냐는 트레이너 씨랑 아침에 함께 일어나고 싶어요.”

가장 첫째가는 바람이었다. 하루가 시작되었을 때, 새롭게 주어진 시간이 열릴 때, 그 옆자리에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 트레이너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랑 함께 밤에 잠들고 싶어.”

하루를 마무리하고 닫는 그 시간에, 함께라면 후회도 고된 것도 털어버릴 수 있었다. 마음 속에 응어리지는 가라앉은 감정들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다. 어쩌다보니 한 쌍을 이룬 소원을 서로에게 빌고 나자, 다음에는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튀어나왔다.

“아침은 제가 차려드릴 테니까, 설거지를 해 주세요.”

“가끔은 식사부터 설거지까지 풀코스로 해 줄게.”

“가끔이 아니라 자주 그렇게 해 주세요.”

“지금도 그러잖아, 이 녀석아.”

“한결같은 남자가 좋아요......”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애매한 태도로 속삭이면서, 그녀는 그의 앞머리를 잡아 늘리고 꼬면서 가지고 놀았다.

“솔직히 저 사토노 게임을 잘 몰라요. 잘 모르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거니까 더 깊이 알고 싶어요. 나중에 같이 해요.”

“나는 예술 작품을 봐도 아직 잘 모르겠더라.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더 깊이 알고 싶어. 저번처럼, 서로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세계 여기저기를 같이 다녀보고 싶어요.”

“너랑 레코드판을 보러 다니고 싶어.”

“같이 아침 운동 해요.”

“학원 옥상에 만들었던 것처럼, 마당에 같이 화단을 만들고 꽃을 심고 싶어.”

“히히, 물은 트레이너 씨가 주세요.”

“같이 하자는 말 못 들었어?”

감겨있던 손을 풀어 잡고 들뜬 것처럼 위아래로 움직여대면서 다이아가 웃었다. 마음이라거나 사람의 그릇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 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크든 다 담기지 않을 것처럼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마음이 그런 것처럼 몸 속 한 구석이 간질간질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자꾸 웃음이 났다. 지금 함께 모여앉아 미래를 이야기할 때, 여기까지 오면서 나누었던 이야기와 마음들이 떠올랐다.

“같이 해요. 같이 해요. 예쁜 말이예요.”

그가 언젠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녀가 고집을 부려 그를 독점하고 가지려고 했다면, 어쩌면 듣지 못했을, 깨닫지 못했을 말이 떠올랐다. 살짝 돌아앉아 눈을 마주보면서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속삭였다.

“당신이 가르쳐주신 대로, 제가 가진 것들을 당신이랑 공유하고 싶어요.”

소유보다는 공유를, 독점보다는 균점을, 기꺼이 자신의 침실과 생활공간과 먹을 것과 시간을 내어 주던 트레이너 씨에게 그녀는 이제 자기 것으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는 그대로, 그녀가 자기 이성과 감성을 동원해 얻으려고 했던 것을 쥐어주고 싶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네 것이 되고 싶어.”

“그건 당연히 그래야죠. 그러니까 되고 싶어가 아니라, 될 거라고 정정해 주세요.”

“사토노가 될게.”

“사토노 아니야.”

힘 주어 그의 손을 꽉 쥐면서 다이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이아 꺼야. 사토노가 아니라 다이아 꺼야.”

놀리는 것처럼 웃으면서 트레이너가 속삭였다.

“난 사토노 되고 싶은데.”

다이아가 어허, 하고 꼭 혼내는 것처럼 굴었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애를 다루듯이 말했다.

“무쌩긴 사토노는 필요 없어.”

“매몰차네.”

“무쌩긴 사토노 싫어.”

“알았어, 알았어. 무쌩겼으니까 사토노 안 할게. 네 것 할게.”

“푸히히.”

그제서야 만족한 것처럼 다이아가 손에 힘을 풀었다. 아팠냐고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면서, 그녀가 눈을 초승달처럼 만들어 웃었다.

“저도 당신의 것이 될게요.”

“나도 내가 가진 것들을 너랑 공유할게.”

“좋아......”

다이아가 완전히 돌아앉았다. 손을 잡고 마주 앉아 바라보았다. 리스트는 이제 몇 줄이 채워졌을 뿐이었다. 노트는 아직 몇 페이지가 넘어갔을 뿐이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았다.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장난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얽고 건드리면서 그녀가 눈을 감았다.

“으음.”

지금 함께 하고 싶은 것도 잔뜩 있었다.



두 사람 분의 소원을 잔뜩 실은 비행기가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했다.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원들, 그러니까 비원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한 그의 비원, 그녀의 비원, 그들의 비원.

미래를 열어가겠다는 마음이 언제나 그녀의 동력이었고 모티베이션이었다. 현재에 도전하는 그녀가 빛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녀를 향해 모여드는 기대와 희망 덕분이었다. 잘 깎인 다이아몬드는 주위의 빛을 받아 빛났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변했다. 시간이 흘러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었다. 가볍고 소소한 흠집이 생겼다. 타인의 기대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이, 욕심이 자라나 섞였다. 어쩌면 불순물이 섞여 탁해졌다고도 볼 수 있는 성장이었다.

하지만 다르다. 그건 원래 그녀의 안에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다이아몬드 안에 작게나마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다이아몬드를 더러 자외선 환경에서, 자외선 조사가 없어진 다음에도 어둠 속에서 일정 시간 스스로 빛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형광, 플로레센스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사토노 다이아몬드, 경이적인 말각이다?”

파리 롱샹 경기장, 그녀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 고국에서 최강의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조차도 어째선지 이기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이질적인 땅. 왜 승리하지 못하는지 이유를 찾다가도 ‘그냥 안 되는 것’이라고, 어쩐지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안개 자욱한 곳. 모두의 기대와 염원도, 노력도 바람도 닿지 않는 것 같은 수렁.

미량의 불순물을 포함한 다이아몬드는 오히려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 반사할 빛이 끊어져버린 그 상황에서도, 칠흑같은 징크스의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붉게, 노랗게, 흐릿하더라도 분명히 빛날 수 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라면 평가절하되는 그 특성이 어떤 기준에서는 까다로운 운명의 저울을 기울게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오묘한 사실인지.

“개선문상이 눈앞이다, 비원 달성이 눈 앞!”

한 번 흑연이 되었던 다이아몬드가, 한 번 깨졌던 곳에서 다시 빛난다는 걸 누가 생각했을지.

< Provisoire 18 7 8 14 5 >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이미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이미 대성공이라 여겼다. 그녀는 작년의 자신을 뛰어넘었다. 10계단도 넘게 이겼다. 그것만으로도 도전에 가치가 있었다고 했을 것이다.

< Officiel 18 7 8 14 5 >

결과가 확정되자 오히려 웃음기가 사라져버렸다. 트레이너 씨를 데려오니까 정말로 이겨버렸다. 운명을 함께 만들어갈 사람으로서, 징크스를 깨트릴 사람으로서 지목했던 그 사람과, 정말로 이겨버렸다. 트라이얼에 참가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순전히 직감으로 고른 지 4년이 지난 뒤였다. 그녀가 옳았다. 한편으로는 틀렸다. 그런 사람을 그녀는 한 번 계약해지 해버렸던 것이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흘러가버렸는지, 어쩌다 이런 미래로 이어져버렸는지 하나하나 생각하는 걸 포기해버렸다. 깊이 분석하고 따지는 것도 다 징크스라고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그냥 운명이다. 저 앞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 지금까지의 고생이, 오늘을 위한 산고였다는 것처럼 다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웃고 있는 무쌩긴 사람이, 그냥 운명인 거라고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정말.”

그녀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웃었다. 온 몸 가득 산소를 모아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정말 좋아해애애!!!”

관중들 대부분이 알아듣지 못하는 짧은 외침이 롱샹 경기장과 많은 마이크들 사이를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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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이리 와 봐!”

휴일 대낮의 일이었다. 개선문상 트로피가 장식된 트레이너의 집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그의 담당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씩씩대고 서 있었다. 손에는 ‘월간 트윙클’이 들려있었는데, 얼마 전 큰 소리로 외치던 그녀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오, 잘 나왔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요! 옆에 적힌 거 봐라요!”

그녀의 손가락이 소매 밖으로 튀어나와 대문짝만하게 쓰인 헤드라인을 콱콱 찍었다.

< 롱샹에 울려퍼진 사랑고백, 실은 슈발 그랑에 대한 오마쥬?! >

몇 페이지를 넘겨, 최근 담당과의 열애설을 극구 부인하는 트레이너 씨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뚫어버릴 것처럼 찍으면서 다이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대체 거기서 슈발 그랑이 왜 나오냐요!”

“아니, 그걸 또 그대로 받아적었나 보네.”

“다이아가 부끄럽냐고요!”

“일단 들어와라. 진짜 부끄럽기 전에.”

다 큰 아가씨, 개선문상 우승 경력이 있는 유명 우마무스메가 동네방네 소리지르고 있는 걸 주민들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일단 팔을 끌어 집 안에 들인 뒤, 식탁 앞에 앉혀 냉수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물 한 잔이 눈 깜빡할 사이에 비어버렸다. 에메랄드색 원피스를 펄럭거리면서 답답해하는 다이아의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트레이너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그냥 분위기를 어떻게 돌려보겠다고 한 농담인데, 오토나시 기자가 진짠줄 알고 적어버렸나 봐.”

“열애설을 부인했다고 딱 적혀있는데도 그런 변명을?”

“아니, 열애설을 부인한 건 부인한 거고. 저건 저거대로 오보란 거지.”

“아, 그러면 슈발 그랑 건은 괜찮아요.”

의외로 차분하게 사태를 받아들이고 일어난 다이아가 의자를 집어넣고, 그의 정강이에 사토노 빔을 날렸다.

“꺼흑.”

“열애설은 왜 부인했냐요?”

“아니, 우리 계약건 생각해 봐. 추가적으로 1년의 시니어 시즌과 +@ 옵션이 걸려 있다고. 그러면 당연히 남은 기간 재팬컵이든 아리마든 나갈 건데......”

열애설을 인정해버리면, 아무리 생각해도 훈련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단다.

“나 때문에 네 커리어 망가지는 거, 나는 그 꼴 보느니 차라리 내 마음을 좀 더 억누르고 있을래.”

“......하아.”

괜히 지치는 느낌에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월간 트윙클을 바닥에 대충 던져놓고 소파에 가 드러누워버렸다. 그가 그런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귀국해서도 이러니까 조금 생각과 달랐다.

“그러니까, 개선문상을 우승하고 왔는데 모자라서 재팬컵이든 아리마든 나간다고요?”

“그럼. 최강을 가리기 적합한 도쿄 2400m든,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나카야마 2500m든. 또 하나의 영광을 너에게 줄 수 있게 해줘.”

“영광 하나 얻자고 슈발 그랑 따라하는 이상한 애로 낙인 찍혔는데......”

“아예 재팬컵으로 해 버리자.”

“사토노 비......”

휴지곽을 잡아 던지려다 다시 내려두고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잠시 생각하다 풋, 하고 웃었다. 한 번 터지자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번져버렸다. 세레머니가 꼭 진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징크스고, 오보를 꼭 정정해야 한다는 것도 징크스라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어휴, 알았어요! 저 고집을 누가 말려.”

기분이 많이 누그러진 그녀가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팔을 벌려 덩굴처럼 감겨 붙으면서 등을 토닥였다.

“정강이 많이 아팠어요? 미안해요.”

“괜찮아. 아무튼 그럼 다음 레이스는 재팬컵인 걸로, 오케이?”

“이번 세레머니에는 절대로 그런 이상한 농담 하지 마요, 알았죠?”

살짝 고개를 들어 몇 번의 가벼운 키스로 확인 도장을 받은 뒤, 그녀가 히죽거렸다.

“뭐, 정말 좋아한다고 말해주지도 않을 거지만요.”

“엥. 안해주는 거야?”

“흥. 소녀의 순정을 오마쥬 농담에 써먹는 몹쓸 트레이너 씨한테는 아까운 말이거든요.”

“아쉽네. 기대하고 있었는데.”

꾹, 그의 발을 밟아 디뎌 발돋움해 눈높이를 맞추면서 다이아가 가볍게 볼을 부풀렸다.

“기대하고 있으면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주셔야 돼요. 알았죠?”

“그치만 말 안해줄 거라며.”

“안해줄 거죠. 당연히.”

그녀의 무게에 눌려 아픈 발 때문에 인상을 쓰며 따지는 트레이너에게 볼을 부풀린 채로 웃어보이고, 다이아는 그의 귀를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창피를 당했으니 정말 좋아한다고는 다시는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이번에야말로 얼버무리지 못하게, 놓치지 못하게. 귓속말하는 것처럼 손을 가져다 대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의 귀에 다이아의 입술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그녀와 그의 비원을 향해, 미래를 이어지게 만드는 주문을 속삭였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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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너 씨가 밥을 하도 맛있게 먹어서 프랑스에서 사온 먹을거 자랑하던 다이아가 밥이랑 먹을거랑 바꾸자고 떼쓰는 장면 쓰려고 시작한 거였는데

두세 문단에서 시작한게 12편까지 늘어졌으니 보는 맛도 좀 떨어지지 않았으려나

아무튼 응애 다이아는 상했고 본편은 여기서 끝입니다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