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umamusme&no=278667&search_head=60&page=1






4월 16일


사고는 갑작스레 일어났다


훈련을 받던 도중 라이스 샤워가 갑자기 멈춰섰다


마장에서 가만히 서 있는 라이스 샤워는 앞발을 땅에 대지도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오른쪽 앞다리 관골 골절


2살 때 입었던 부상과 같은 부위


이 순간 마토바와 라이스 샤워의 천황상 봄 2연패의 꿈은 사라졌다


천황상은 커녕 라이스 샤워의 경주마로서의 생명조차도 위험한 부상이었다


릿토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라이스 샤워는 곧장 미호로 옮겨졌고


카와시마 구무원은 정말 최선을 다해 헌신적인 간호를 했다


다리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450kg에 가까운 마체를 들어올리게 하고


매일 몇 번씩이나 습포를 교환해주었다


영양분이 높은 먹이, 칼슘이 많은 것을 직접 고르고 연구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식욕이 왕성한 라이스 샤워도 이때만큼은 그다지 먹이를 잘 먹지 못했다


말은 그다지 고통에 강한 동물이 아니다


특히 말에게 있어 제2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다리의 아픔에는 정말 민감한 동물이다


골절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날뛰다 그대로 절명한 말도 있을 정도


환부에 무언가가 살짝 닿기만 해도 전신에 격통이 달린다


하지만 라이스 샤워는 필사적으로 이 고통을 참아냈다


그다지 아픔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속으로 삭힐 줄 아는 말이었다


그런 기특함이, 카와시마 구무원에게는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젠 틀렸을지도 모른다


카와시마는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애써 그런 생각을 지웠다


라이스는 나의, 우리의 보물이다


킷카상을 우승한 말이다


천황상도 우승해낸 말이다


자신의 인생에 꿈을 가져다준 말이다


이대로는 끝낼 수 없다


이대로 끝낼 수 있을까 보냐…


힘내라, 라이스


지지마라, 라이스…!


카와시마는 마음 속으로 절규했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한 응원가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이이즈카는 이미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목숨은 건질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정도의 부상이면 경주마로서 부활하긴 힘들다


더욱이 라이스 샤워는 벌써 5살


부상이 없었더라도, 은퇴하는게 이상하지 않을 나이


라이스는 이미 충분히 달렸다


나도, 그리고 라이스와 관련된 모든 이들도 정말 좋은 꿈을 꿨었다


은퇴 시켜주도록 할까…


아직 분함과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모든건 운명이다


라이스의 행복을 생각한다면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쿠리바야시 오너와도 상담한 이이즈카는 라이스 샤워를 씨수말로서 받아 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은 수입산 씨수말 전성 시대


국내산 말은 웬만한 실적이 없는 이상 씨수말로서 활약하기는 힘들다


연간 1만두나 데뷔하는 서러브레드의 세계에서


한 줌도 안 되는 말들 만이 오픈에서 우승하는데다


그 안에서도 극소수만이 씨수말로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라이스 샤워는 G1 2승의 실적이 있는 명마


심지어 천황상 봄에서는 현역 최강마로 불리던 메지로 맥퀸도 격파했다


제안만 한다면 씨수말로 받아줄 곳은 많으리라


처음은 그렇게 낙관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간의 반응은 이이즈카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차가웠다


라이스 샤워를 씨수말로서 받고 싶다는 제안은


단 한 건도 오지 않았다







이유는 몇 가지가 존재했다


우선 첫번째로 라이스 샤워가 너무 작은 체구의 말이었던 것


그 정도의 체구로는 더 큰 암말을 상대할 때 씨수말로서 역할을 잘 해낼지에 대한 의문부호를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이미 부상을 입고 있었기에 라이스 샤워는 경주마로서 그 능력을 의심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라이스 샤워가 「특수한 스테이어」라는데 있었다


2000m 이상에서 달릴 수 있는 평범한 스테이어라면 몰라도


3000m를 넘어야만 승부를 볼 수 있는 말이라면 나갈 수 있는 레이스가 너무나 한정된다


작금의 일본 경마계는 단, 중거리가 메인


장거리 레이스라고 해도 대부분이 2500m 전후


라이스 샤워가 본심을 낼 수 있는 3000m 이상의 G1 레이스는


클래식의 킷카상과 천황상 봄 단 둘 뿐


심지어 킷카상은 3살 때만 나갈 수 있는 클래식 레이스


실질적으로 라이스 샤워가 활약할 수 있는 레이스는 1년에 1번


천황상 봄 밖에는 없었다


경주마로서 전성기는 햇수로 따지면 약 3년간


그 안에 단 3번만의 G1밖에 노리지 못하는 말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즉 라이스 샤워는 씨수말로서 「돈이 안 되는 말」이었다


그것이 바로 희대의 명 스테이어


라이스 샤워에게 내려진 일본 경마계의 평가였다


만약 당시 JRA에 3000m 이상의 G1, G2 레이스가 조금 더 추가됐다면 라이스 샤워의 운명은 바뀌었을 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였다


라이스 샤워를 다시 한 번 레이스에서 복귀시킨다


재활에 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지 모른다


애초에 복귀가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래도 라이스 샤워를 복귀시켜 G1을 다시 한 번 더 따낸다면


라이스 샤워에 대한 평가가 바뀔지도 모른다


라이스 샤워는 인간을 위해 이미 충분히 달려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위해서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의 씨수말로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라이스는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다 산을 향해 꺾어서 가다 보면


어느새 시가지를 빠져나와 도로는 푸르름이 빛나는 목초지로 들어가게 된다


왼쪽에는 과거 라일락 포인트가 검은 망아지를 낳았던 오래된 마구간이 있다


오른쪽을 보면 눈이 녹은 물이 산에서 흘러나와 졸졸거리며 흐르고 있다


말 운반용 차량에 나 있는 작은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운 고향의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면서


라이스 샤워는 어미에게 응석부리던 망아지 때처럼 작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차가 산 속에 있는 마방 앞에 서서 문이 열리면


볕에 그슬린 남자들이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쿠보, 타케다, 타카하시, 그리고 키야마


라이스 샤워는 머나먼 기억 속에서 끊긴 실을 더듬어 찾는 듯이 남자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앞 다리에 신경을 쓰며 차에서 내린 라이스 샤워


다가오는 남자들의 손이 각각 라이스 샤워의 뺨에, 목에, 등에 차례대로 닿는다


단단하고 투박한 그 손이


라이스 샤워의 거칠어진 마음을 위로하듯이 따듯한 온기를 갖고 스며들었다







1994년 6월 6일


라이스 샤워는 3년 8개월 만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


유토피아 목장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수말은 한번 경주마로서 고향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골절 같은 부상을 입어도 마구간이나 육성 목장에서 치료를 받는게 보통


하지만 라이스 샤워는 골절이 원인으로 식욕도 떨어져 있었던 데다


골절로 인한 신체적 부상 그 이상으로 정신이 피곤해진 상태였다


거기에 지금부터 서러브레드가 가장 싫어하는 더운 여름날을 지내야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시원한 홋카이도에서 여름을 보내게 하는게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목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G1 우승마 라이스 샤워였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할 수 있겠다


당초에는 전치 6개월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골절도, 그리고 그 예후도 생각보다도 순조로웠다


특히 걱정되던 합병증은 발병하지 않았고 1달도 되지 않아 다리를 지면에 내려놓고 자력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작은 말은 부상에도 강하다


만약 부상을 당해도 금방 회복한다


거기에 라이스 샤워가 쓸데없이 날뛰거나 하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상은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다


유토피아 목장에서의 생활은 긴 세월 동안 치열하게 싸워온 라이스 샤워에게 있어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평안이었다


이곳에는 힘든 훈련도, 매일같이 찾아오는 취재진도 없다


아침은 5시에 일어나 낮에는 느긋하게 방목지의 잔디를 뜯어먹다가 밤에는 따듯한 침구 안에서 편안히 눈을 감는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전혀 없었다






몇 번인가 어미인 라일락 포인트와 얼굴을 맞댄 적이 있었지만


라이스 샤워가 그녀를 자신의 어미라는걸 깨달았는지 아닌지는


우리에겐 알 수 없는 일


라일락 포인트는 언제나 자신의 새로운 자식과 함께 있었고


라이스 샤워는 그저 그런 라일락 포인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시 지방 레이스에 참전하느라 삿포로의 하코다테를 전전하고 있던 마토바가


몇 번인가 라이스 샤워의 얼굴을 보러 들른 적도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느긋한 생활 속에서 작은 변화가 있었다면 그 정도일 것이리라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가끔 시간이 멈춘게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라이스 샤워는 확실히 체력과 기력을 회복시켜 나갔다


처음엔 쭈뼛거리던 라이스 샤워였지만, 곧 조금씩 다리의 상태를 확인하듯이 달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이 즐거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뛰어다녔다


서러브레드의 본능은 달리는 것


라이스 샤워는 자신의 힘으로 달리려 하고 있었다


자기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운명의 끝을 보려 하고 있었다


복귀는 빨라도 내년 봄이라 생각되고 있었지만


이 상태라면 올해에도 몇몇 레이스라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복귀할 수 있다면 몸이 아직 레이스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는 편이 좋다


9월 27일


다이토우 목장으로 가기 위해 말 운반용 차량이 유토피아 목장에 들어왔다


라이스 샤워는 차 앞에 잠시 멈칫 거리더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마치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주변을 둘러보던 라이스 샤워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차에 탔다


그것이 라이스 샤워가 본


고향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유토피아 목장에서 치바의 다이토우 목장으로 돌아온 라이스 샤워는 여기서 한달동안 머무르게 된다


부상의 회복은 여전히 순조로웠다


가능하다면 다음 아리마 기념에 출마하고 싶었던 이이즈카 조교사의 의지로 인해


유토피아 목장에서 이미 3주정도 가벼운 달리기를 시작했다


다이토우 목장에서는 속보로 200m를 15초 정도로 달리기도 했다


10월 28일


카와시마 구무원이 기다리는 미호의 마구간으로 돌아왔다


이미 2개월밖에 남지 않은 복귀전을 상정한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훈련이여도 무리를 시킬 수는 없다


결국 마체중은 452kg으로 완전히 잡혀지지는 않은 상태


12월 25일 나카야마 경마장 제39회 아리마 기념


라이스 샤워는 그곳에 출마하게 된다


이 레이스에는 앞으로의 시대를 짊어질 주역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 필두는 누가 뭐라해도 당대 최강의 3살마 나리타 브라이언


지금까지 통산 13전 10승


클래식 3관을 시작으로 중상 6승을 이룬 강자


트레이드 마크인 쉐도우 롤을 찬 채로 온갖 거리의 레이스에서 레코드 타임에 필적하는 기록을 남기며


압승을 기록해온 「괴물」


그 강함과 가능성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마토바 기수마저도 나리타 브라이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그 말은 격이 다르다. 미호노 부르봉이나 메지로 맥퀸은 비교도 안 된다. (역사상) 일본 최강마가 아닐까」


전성기 때였으면 몰라도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라이스 샤워는 도저히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였다


그리고 한 마리 더






마찬가지로 최강의 3살 암말이라 불리던 강자, 히시 아마존도 빼놓을 수 없다


외국산 말이었기 때문에 클래식에는 출마하지 못했지만


통산 전적은 11전 8승 2착 3회


단 한 번도 연대를 놓치지 않은 승부사 기질의 암말


심지어 한신 2살 암말 스테이크스, 엘리자베스 여왕배 이 두 G1을 포함해 중상 7승


아직 3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마 암말의 기록을 새로 쓰는 또 한 마리의 괴물이었다


출마는 총 13두


눈에 띄는 코바로는 트윈 터보사쿠라 치토세오아일튼 심볼리 등이 출마했다


마치카네 탄호이저도 출마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며 대회 직전에 회피를 하였다


그 안에서 1번 인기를 받은 것은 역시 압도적인 지지의 나리타 브라이언


골절로 인한 장기 휴양에서 막 돌아온 라이스 샤워는 그럼에도 4번 인기를 받았고


히시 아마존은 암말이라는 것 때문인지 6번 인기에 머물러야만 했지만 전문가들은 그 이상의 평가를 하고 있었다


라이스 샤워의 관계자들에게는 이 4번 인기가 오히려 의외라 생각됐다


솔직히 승부 운운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게 본심이었다


훈련의 마무리는 완벽하지 못했고


스피드뿐만 아니라 2500m를 달릴 스태미나도 있을지 불안한 상태


만약 기대할 수 있는 요소라면 라이스 샤워의 정신력 뿐이었다


메지로 맥퀸과의 사투로부터 이미 1년 8개월이 지난 상태


적어도 그 후유증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을까


이번에도 기대할 것은 라이스 샤워의 투쟁심 그것 하나 뿐이었다






레이스는 이미 모두에게 익숙해진 트윈터보의 대도주로 시작되었다


그 차이는 두번째 집단과 무려 30 마신 이상


그 뒤를 네하이 시저와 아일튼 심볼리가 쫓는다


나리타 브라이언은 좋은 스타트로 시작했지만 4,5번째 위치에서 참고 있었다


마토바는 그 나리타 브라이언을 타겟으로 정했다는 듯이 1마신의 차이를 두고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 뒤에는 쫓아오는 히시 아마존


전반에서 너무 달린 트윈터보가 4코너 중간에서 벌써부터 속도를 떨어트린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리타 브라이언이 간단히 선두를 빼앗는다


그 바깥에서는 히시 아마존이 라이스 샤워를 제치고 나리타 브라이언에게 일기토를 신청했다


마토바도 라이스 샤워에게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라이스 샤워의 반응은 둔했다


그럼에도 그는 선두를 쫓아 달렸다


나리타 브라이언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직선에 들어가고 모든 말들에게 일제히 채찍질이 시작됐다






역시 앞으로 치고 나간 것은 실력에서 압도적인 나리타 브라이언


그 뒤를 쫓는 집단과 1마신, 2마신


점점 차이가 벌어져만 간다


그 뒤를 쫓는 것은 히시 아마존


우승 쟁탈전은 완전히 이 두 마리의 싸움으로 좁혀져 있었다


그 때였다


한 마리


작은 몸집의 검은색 털을 가진 말이


안쪽에서 마군을 뚫고 뛰쳐나왔다


라이스 샤워였다


선두의 두 마리에게는 이제 닿을 수 없다는건 누가 봐도 명백했다


하지만 라이스 샤워는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고서도


이를 악 물고 달렸다






결과는 역시 나리타 브라이언, 히시 아마존을 이은 3착


하지만 이 3착은


조정도 잘 되지 않은 몸으로


장기간의 휴양에서 막 복귀한 몸으로


거리의 벽을 극복하고 얻은 3착이었다


역시 라이스 샤워는 정신력으로 달리는 타입의 말이었다


기백만 있다면 그 어떤 불리함도 뛰어넘을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육체적 결점을 훈련으로 하나씩 지워 나가면 된다


과거의 천황상 우승마가 아리마 기념에서 3착을 한 것은


일본 경마계에서는 그다지 관심 받지 못한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이스 샤워에게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에게는


마치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라이스 샤워는 이번에도


이번에야 말로


부활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1995년 1월 1일


카와시마 구무원은 가족과 신년을 축복할 새도 없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서 라이스가 기다리는 마구간을 향했다


「라이스, 좋은 아침. 오늘은 어떻니」


언제나처럼 말을 걸고 라이스의 다리 상태를 살핀 후 먹이의 준비를 한다


바깥은 아직 어둡다


차가운 바람에 먹이용 잎들을 쥔 손이 시려오는게 느껴진다


라이스는 하얀 입김을 뿜으며 카와시마가 준비해준 식사를 시작한다


카와시마는 그런 라이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라이스도 나이를 먹었구나…


그런 감상과도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정월


새해가 밝고 라이스 샤워는 6살이 되었다


6살이라면 경주마 사이에서도 고령층


지방 경마라면 10살까지도 현역에서 뛰는 말이 있지만


중앙의 1류마들 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다음, 라이스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작은 몸집의 말은 오래 뛴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1년인가 2년인가


언제가 됐던 이제 라이스와 함께 보낼 시간이 그리 많지 남아있지 않다는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이즈카나 마토바에게 있어서도 이 생각을 동일했다


골절이라는 불운한 일을 겪은 라이스 샤워는


5살이라는 절호의 시기에 단 1번의 승리도 쟁취하지 못했다


하물며 이제 남은 G1 레이스에서 승리를 할 기회는 얼마나 남아있는걸까


그리 많지 않다는건 확실하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더 승리를 안겨주고 싶다


라이스 샤워를 당당하게,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씨수말로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해주고 싶다


아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다가올 봄의 천황상인가


그것이 라이스 샤워가 이길 수 있는 마지막 G1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리타 브라이언이 있다


2년전의 최전성기 시절에 만났어도 라이스 샤워가 그 괴물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인 강적


나리타 브라이언은 그 존재만으로 라이벌에게 절망감을 안겨줄 정도의 말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


적어도 후회가 남지 않게, 마체 만큼은 완성시키리라




봄은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2월 12일의 교토기념 (G2, 2200m)로 시작되었다


출마는 총 8두


멤버는 와코 치카코쵸우카이 캐롤등의 암말이 중심으로 이렇다할 거물은 없는 상태


이 안에서 라이스 샤워는 당연히 1번 인기로 낙점받는다


그의 승리가 이상하지 않은 레이스였다


하지만 이 레이스에서 승리를 가져간 것은


킨배를 제패했던 암말, 와코 치카코였다






라이스 샤워는 설마했던 6착의 참패를 당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출마한 8두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근량인 60kg이 부과된 것이었다


아무리 G1 우승마라고는 해도 라이스 샤워는 450kg에도 채 못미치는 작은 말


심지어 다리가 골절당해 작년에는 9달동안 휴양을 했었다


그런 라이스 샤워에게 60kg의 근량은 너무나도 가혹한 수치였다


「라이스는 작은 말이라 단 1kg의 근량 차이만으로도 차이가 심하게 난다」


「한계는 58kg까지 이려나. 그 이상이 되면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진다. 더더욱 60kg이라면 경마가 성립되질 않는다」


이이즈카 조교사는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라이스 샤워는 생애 총 25전 중 59kg 이상을 짊어진 상태에서 단 한번도 승리를 해본 적이 없다


모처럼 살아나던 부활의 작은 불씨가 근량이라는 새로운 강풍 앞에 놓여지게 되었다


큰 레이스에서 이기면 강한 말로 인정받는다


강한 말로 인정 받으면 무거운 근량이 부과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강한 말이 이기지 못하게 된다


확실히 경마를 도박의 일종으로 생각한다면 핸디캡이 있는 쪽이 재밌기는 하다


하지만 달리는 것은 「말」이라는 동물이다


특히 라이스 샤워 같은 작은 말에게 근량은 승패를 결정짓는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어지는 3월 19일 나카야마의 닛케이상 (G2, 2500m)에도 라이스 샤워는 출마했다


이 때의 근량은 1kg 가벼워진 59kg의 탑 핸디캡


거기에 운이 나쁘게도 당일 나카야마는 전날부터 내린 호우로 불량 마장인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비에 젖은 잔디 때문에 마장이 무거워지면 근량은 양호 마장에 비해 +3kg 정도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라이스 샤워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62kg 이상


이걸로는 승부가 성립조차 안된다는건 자명한 사실


결과 승리한 것은 490kg이라는 마체중에 56kg이라는 근량을 받은 인터러너


라이스 샤워는 1번 인기를 받았음에도 시종 그 어떤 빛나는 모습도 보이지 못하고






또다시 6착의 대패를 겪고야 만다


투쟁심이나 기승법이나 전략이나 그런 레벨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라이스 샤워는 중요한 천황상을 앞두고 기세를 올리는 것 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관계자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듯이 라이스 샤워는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건 그의 성적표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강한 말은 어느정도 인기 대로의 결과를 내지만


라이스 샤워는 그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현역시절 1번 인기를 받았던 것은 25전 중 5번 뿐


이 중에서 그 인기에 보답해 1착을 거둔 것은 4살 때 출마한 닛케이상 단 한번 뿐


그 외에는 3, 6, 6, 6착으로 대부분의 레이스에서 졸전을 보여줬었다


반대로 승률이 높은 것은 2번 인기가 된 레이스였다


2살 때의 데뷔전, 후요우 스테이크스, 3살때의 킷카상, 4살때의 천황상 등


모두 2번 인기를 받고 나가 우승했던 경기였다


그런가 싶으면 16번 인기를 받고 나가 2착을 했던 더비처럼 기대 밖의 성적을 낼 때도 있다


또 생애 전적 25전 6승이라는 수치가 보여주듯이 실력이 있는 말이었지만 승률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도 라이스 샤워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라이스 샤워가 경주마에게 자주 보이는 「반짝 스타」였냐고 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도 애매해진다


반짝 스타로 불리는 말은 대부분이 정신적인 약점을 갖고 있어 그 때문에 좋은 성적을 거둔 이후


성적이 떨어져 다시 재.기하지 못하고 경마계에서 사라지곤 하는데


라이스 샤워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였다


메지로 맥퀸과의 사투 이후의 싸움은 별개로 치면 대부분의 싸움에서 정신력의 강함을 무기로 이겨왔었다


또 반짝 스타에게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데 반해 라이스 샤워에게는 패턴이 있었다


예를들면 「왜 라이스 샤워는 2번 인기일 때 강한 것인가」


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라이스 샤워의 「일대일에서 강한 성격」과 그것을 살리는 마토바의 「기승법」이 합쳐져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강한 말이 한 마리 존재 하는것도 원인 중 하나다


미호노 부르봉, 메지로 맥퀸 같은 강자와 만난다면


라이스 샤워는 그 말에게 지지 않는 투쟁심을 발휘한다


그렇게 되면 마토바로서 레이스 전개를 읽는게 쉬워지는 것이다


전반은 그 말, 단 한 두만을 마크하다가


마지막 코너에서 직선으로 빠지는 순간 승부를 걸면 된다


남은 것은 계산대로 라이스 샤워가 일기토에서 이겨주는 것 뿐


반짝 스타는 커녕 이 정도로 계산대로 승리를 쟁취하는 말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즉 마토바에게도 라이스 샤워에게도


자신들보다 강한 상대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레이스를 운영하기 더 편하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특징이 때로는 단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그 좋은 예가 1992년의 아리마 기념


이 때 마토바는 당연히 최강마로 인식한 토카이 테이오를 마크했지만


후방에서 대기하던 토카이 테이오는 언제까지고 움직이질 않았고


결국 부상당했던 토카이 테이오가 끝까지 못 움직이며 마토바도 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결과는 8착이었다


아무리 마토바와 라이스 샤워의 콤비라고 해도 설마 부상까지 계산에 넣으며 싸우기란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1번 인기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이치이다


마크할 말이 없다면 작전상의 불리함도 그 이유 중 하나지만


그것보다도 라이스 샤워가 「가장 강한 말」인게 문제이다


전술했던 대로 가장 강한 말은 가장 무거운 근량을 부과받는다



만약 라이스 샤워가 적어도 480kg대의 말이었다면 그 인기에 보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1번 인기였던 레이스가 모두 2500m 이하였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이런 라이스 샤워의 데이터를 살펴보고 난다면, 그가 승률 이상으로 「안정적인 결과를 내는 말」이라는걸 알 수 있다


작은 몸에서 오는 불리함


특수한 거리 적성에서 오는 불리함


그 범위 안에서 라이스 샤워는 자신의 능력을 100% 낸다


이길 레이스에서 이기고


질 레이스에서 진다


교토기념과 닛케이상에서는 참패당했지만


이이즈카 조교사는 그에 대해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패배의 이유가 라이스 샤워의 능력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황상 전의 훈련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리마 기념때는 452kg 까지 갔었던 체중은 닛케이 상때 446kg까지 줄더니


그 후의 훈련에서 더욱 줄어 최종적으로는 440kg까지 몸을 만들었다


2년전의 천황상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달릴 몸은 만들었다


하지만 훈련에서 하드하게 몰아붙여도 기록은 평범했다


아직 몸이 무거운 것인지 움직임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이런 표현이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마치 라이스 샤워가 자신의 상태를 이해 한 후 좋아하는 페이스에서 자주적으로 훈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라이스 샤워도 이미 베테랑이다


거기에 머리도 매우 좋은 말


스스로가 어느 정도의 컨디션을 만들면 레이스에서 이길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그것을 이미 알고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전혀 없다





만약 라이스 샤워의 2번째 천황상 봄 제패를 저지할만한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리타 브라이언의 존재일 것이다


그 마음은 이이즈카뿐만 아니라 마토바도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말이 나온다면 승부가 되질 않는다」


나리타 브라이언은 그정도로 강한 말이었다


하지만 천황상을 눈 앞에 둔 4월 중순


나리타 브라이언이 부상당했다는 것 같다


라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마토바의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문은 며칠 후, 현실이 되었다


「나리타 브라이언 천황상 회피」


스포츠 기사를 장식한 그 문구가


마토바의 심장을 세차게 뛰게했다


라이스 샤워에겐 아직 행운이 남아있었다


나리타 브라이언만 사라져준다면, 나머지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라이스 샤워를 포함해 상위 5마리 중 그 어떤 말이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백중지세


승기가 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 한가지 문제가 발생하고말았다


당일 레이스의 운영이었다


마토바는 일찍부터 나리타 브라이언을 마크한 운영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전제로 한 전술을 짜왔다


하지만 그 마크할 상대가 없어져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남은 말들 중에 집중 마크할 정도의 유력마가 있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닌 상태


전형적인 라이스 샤워가 1번 인기를 받고 패배하던 양상의 레이스가 될 것 같았다


마크 할 상대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때 마토바의 뇌리에 한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마침 딱 1년전의 닛케이상





결과적으로는 스테이지 챔프에게 코 하나 차이로 패배하긴 했지만


3코너부터 빠르게 승부를 걸어 선두를 달렸던 그 레이스


그것은 아직 이 시점에서는 얼핏 머리를 스친 생각에 불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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