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산한 금속의 견고함이 치욕스러운 곳에 닿을 때마다 그녀가 웃는다. 모멸감. 쓰라린 위액이 성대를 모두 뒤덮더라도 결코 소리를 지를 수가 없다.


원체 이 바닥이야 약간의 비열함을 통한다 한들, 어찌 옛 동료면서도, 비록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던 쇼윈도 부부라 하여도, 낮에는 사람들 앞에서, 밤에는 시야 속에서 벗어나 몰래 정을 나눈 사이다. 그리고 현재로 돌아온다면 죽일 듯이 증오하고 저주하던 원수다. 익숙한 비굴함이 안면 근육으로 쉽사리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 깊은 곳에 숨어있던 소인배의 기질을 일깨워준건 따뜻한 말 한 마디나, 충분히 감회될 만한 설득이 아닌 짱구의 강렬한 망치질 한 방이었다.



"……끅, 끄아악!"


"아가씨, 거 요래요래 하면 되유?"



결혼을 증명하던 네 번째 손가락에 마치 배신감으로 철저히 짓뭉개진 듯한 기분이 든다. 고장난 뼈 마디가 삐걱거리고, 파열된 근육에서 불타오르는 격통이 한 차례 음습해오며 척추를 어루만진다.


빳빳해진 허리가 곤두섰다. 손가락에는 감각이 없다. 다만 손가락 위에 저 허공에서 비정상적인 통증이 느껴질 뿐.


그녀는 굽어지지 않는 내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뽀로로. 너도 내 성격 아주 잘 알잖아?"



잔뜩 발기한 핏줄 위로 날카롭고 예리한 나이프가 올라온다. 두근거리는 혈관이 고통을 견디다 못 해, 스스로 발작하며 칼에 베이기를 선호한다.



"그니까 개수작부리지 말고, 100억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난 정말 몰……"


"모르는 건 죄야. 그건 너도 알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짱구가 거대한 오함마를 들고와 번쩍 들어올렸다. 더이상 공포심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썼어! 내가 썼다고 씨발……, 어느날 갑자기 통장에 들어와서 썼다고!"


"얼마나 썼어? 전부 쓰지는 못 했을 거고……"


"40억! 40억 썼어! 60억은 통장에 그대로 있고, 이제 사실대로 불었으니까, 이것 좀 풀어줘 씨발!"



패티는 내가 겁에 질려 헐떡이는 만족스럽다는 눈치다. 이내 자신의 부드러운 손으로 수염이 자라 까끌까끌한 내 턱과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나지막히 독백했다.



"……자기는 묶여있을 때가 가장 매력적이더라. 특히 손목."


"……뭐?"



곧장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구둣발의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딱딱한 뼈를 억지로 벌려 무언가를 쑤셔박는 것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숨통이 억하고 막힌 이유는 그것도 있었으나, 역시나 내가 떨어진 곳이 수심이 10m도 안 되는 목욕탕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쓸 데 없이 화려하고도 시설이 좋은 패티의 목욕탕이었다. 물론 사용자는 오로지 나 뿐이었지만 말이다.



"끅! 끄르륵……"



수면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중간중간 나의 이름이 흘린 발음으로 호명된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이대로 죽을 순 없는 노릇이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손목을 칭칭 감던 질긴 천을 앞니로 잘근잘근 잘라내기 시작했다.



―이야! 뽀글뽀글 기포 올라오는 거 봐유. 누가 보면 마사지탕인줄 알겠슈?



혈관의 산소가 모조리 빠져나가면 더이상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게 된다. 임기응변으로 만들어낸 생각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이었다. 


다만 이 상황에 봉착한 이상 더는 답이 없다는 생각이 절대적으로 대다수였다. 축 늘어진 근육, 숨이 쉬어지는 것만 같은 착각과 나른한 기분. 이미 내 신체는 삶을 영위할 것을 포기했는지 의욕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왔구나. 이럴줄 알았더라면 100억으로 눈 덮힌 숲속 마을에서 몰래 유흥을 즐기는 건데. 후회가 찾아왔다. 대체 뭘 믿고 재기한다고.



'……돈의 주인이 너무 빨리 왔어.'



아쉽다. 그래도 내 탓은 아닌 듯 해.


첨벙―! 이내 목덜미를 잡는 불가항력의 힘이 근육과 퉁퉁 불은 살갗으로 느껴지더니, 내 얼굴이 수면 밖으로 나왔다.


시야는 사후세계에 온 것마냥 뿌옇다. 당황한 폐가 막무가내로 산소를 빨아들이느라, 기도로 넘어간 물을 꼴사납게 전부 토해내고 말았다. 


안면이 딱딱한 돌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목욕탕은 죽을 듯이 아파했다.



"이건 뭐 사부사부여! 그쵸 아가씨? 흐헤. 그나저나 왜 살려둔 거유? 고문? 콱 잘라버릴까?"



패티는 나를 내려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아, 드디어 깨닫고 말았다. 그녀는 아직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렇다 한들, 봄바람의 빨갛게 낯이 익은 사춘기 소녀가 뒤돌아 애둘러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런 '필요성' 이 아니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더 많은 부와 명예. 아니,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그녀는 그저 조져버릴 정적들이 있던 것이다. 


또, 그런 사냥꾼들은 가장 처음으로 구입한 사냥개들을 흠씬 두들겨 팬다. 고춧가루를 탄 물을 강제로 먹이기도 한다. 복종의 의미다. 절대적인 상하관계를 만들고, 배신과 폭동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공포. 


나는 비교적 멀쩡했던 두 팔로 기어가, 패티의 가죽 구두를 혓바닥으로 핥았다. 구두약 악취가 지독하게 올라왔다. 씁쓸하면서도 역겨운 흙냄새가 미뢰를 겁탈했다. 비릿한 물냄새가 깊숙이 배어져있기도 했다. 아무렴 좋다. 뒤저서 지옥의 벽돌에 키스하고 오는 것보다는 백 배 괜찮은 선택이었으니까.



"……빚 갚을 게!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살려줘 패티. 응? 우리의 옛정을 봐서!"



패티는 무릎을 꿇고 앉아 미천한 개새끼가 되어버린 나를 우스꽝스럽다는 눈치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절대적인 하인의 관계는, 꼬리 자르기의 1순위가 된다.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그녀의 구미를 당길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토마스. 정확히 말하자면 토마스의 정보. 그것만으로는 스스로 본래의 힘을 낼 수가 없다.


혀를 놀리는 농간꾼의 철저히 비열하고도 수치스러운 재주가 필요하다. 그것이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도라에몬 전자. 네가 가장 좆같아하는 회사 맞지? 그 회장이랑 술 약속이 있어……, 조져줄 게. 조져줄 게 패티!"


"……정말 안쓰러워서 미치겠네 뽀로로. 어쩜 이리 비굴해졌을까?"


"내게 방법이 있어. 제발 날 믿어줘 패티."


"미안하지만 그 사람이 죽으면 오히려 우리 측이 손해야. 분명 라이벌 회사의 도 넘은 견제라며, 신문사를 매수해 가짜 뉴스를 잔뜩 퍼트릴 거라고. 우린 지금 신제품을 개발하는 중이라."


"……죽이지 않고 조지는 방법이 있어."


"뭔데?"



나는 곧장 넘어가려는 숨을 간신히 부여잡고, 천천히 읆조렸다.



"그 양반, 호색광이야. 내가 잘 알아. 내가 그 새끼 감옥에서 썩게 만들어줄 게. 알잖아 패티. 난 변호사 출신이라고. 아는 사람이 있어."


"음……"


"강간범에게 3개월? 1년? 하. 이런 애들 장난은 우습지. 난 할 수 있어 패티. 최대 28년 까지 말이야. 네가 원할 때 꺼내고, 네가 원할 때 가두는 거야. 정경政經! 이 씨발……, 법과 언론까지!"


"더러운 일은 잔뜩 했구나 뽀로로?"


"너도 잘 알잖아 패티. 쇳바닥으로 가만히 앉아서 돈 버는 직업은 입싸방 걸레들과 우리같은 사람들 뿐이라는걸."



나는 백태가 그득히 낀 혀를 패티에게 보여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 부란, 재물과 돈이라는 것은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 황금 만능주의 사회의 정점에 선 작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예를 원한다. 명예라는 것은, 곧 권력. 아무리 돈이 많다 한들, 막말로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딸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의 아버지는 준법정신을 철저히 지켰고, 친구를 두지 않았다. 뇌물? 코웃음이 다 나오는 소리지. 


그렇다 하여 그녀의 아버지가 견리사의의 정신을 가진 청렴한 인간으로써 존중받을 가치가 있느냐 묻노라면 그건 또 아니다. 그저 있는 돈을 굴릴 줄 모르는 멍청한 행운아였을 뿐이니까.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거야?"



그녀가 보고 자란 남자라는 것은 그녀의 형제들과 아버지 뿐이었으니, 이런 이질감과 배덕감에 흥미가 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의 천성부터 집 안 사람들과는 달리 철저히 글러먹었지만 말이다.


회사를 먹기 위해 가족들을 전부 다 담궈먹은 계집은 다른 이들을 앞서나가기 위해 인간의 따스한 정보다, 더 큰 합리적인 선택을 할줄 안다. 그것이 바로 능력과 정보다.



"그래 패티……, 너도 내 성격 아주 잘 알잖아?"


"으응. 아주 잘 알지."



쉭―! 날카로운 나이프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알싸한 감촉에 조심스레 어루만져보니,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네 성격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따야 후환이 없을 텐데. 옛 정을 믿고 굴려볼 게."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나는 입 속으로 차차 스며드는 비릿한 핏물을 혓바닥으로 천천히 훑어보며 음미했다. 오래되고 녹슨 쇠파이프를 게걸스럽게 빠는 듯한 맛이 났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올려 패티를 바라보았다. 눈은 죽여버리겠다는 살기를 가득 담았고, 입가에는 복수심에 가득 차 미소가 번졌다. 복종하겠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오늘 만큼은.






어쩌다보니 9화까지 썼네용......


아쉽지만 10화부터는 이곳에 올리지 못 할 것 같습니당...... 차후 스포일러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공개를 멈추는 것이 독자분들을 위한 올바른 선택인 거 같아용.......


비록 부족한 글이었지만 격려 댓글과 친절한 감평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많이 두렵고 머뭇거렸는데 덕분에 글을 쓸 활력이 늘어난 기분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응원하고, 다음에는 더 좋은 글로 찾아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