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이 일곱 신을 소멸시키고 지상계에 강림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성검을 쥘 용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에는 더 이상 태양이 뜨지 않았다. 대지는 마기로 오염되어 시커멓게 물들었다. 영광된 제국도, 현명한 마탑도, 고결한 신전도. 그 누구도 마계의 침공을 막지 못했다.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올린 모든 게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그 재앙 속에서 죽지 못한 운 없는 자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마족에 굴복하여 노예가 되거나, 성역(聖域)에 몸을 숨겨 그 비루한 생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는 것뿐이었다.

 

마족이 성역을 침탈하지 못할 것이라 믿으며, 그들이 자신들을 넘보지 못하도록 기도하며.

 

그리고,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줄 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뒤였다.

 

 

“꺄아아악!”

 

 

비명, 피비린내, 마을 전체로 번지는 불길.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너무나 익숙해진 것들.

 

성물에 깃든 힘이 전부 소진되었거나, 혹은 우리가 모르는 배신자가 있었거나, 어쩌면 그 전부일지도 모르지만 이제 와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쏟아진 물을 주워담을 수 없듯, 아무리 과거를 반추해본들 참혹한 현재를 돌이킬 수는 없다. 사람들은 마치 술집 한구석에 대충 쌓아둔 자루처럼 넘어지고, 칼자국에서 포도주처럼 붉은 피가 취할 정도로 짙은 향내를 풍기며 흘러내렸다.

 

그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것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기괴하게 뒤틀린 괴물들. 그리고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인간이 아닌 자들.

 

 

“내 아이! 내 아이!”

 

[힉크그긱! 뭐야, 이것 말인가?]

 

 

울부짖는 여인과, 그 앞에서 무언가를 들고 히죽이죽 웃고 있는 사내. 그 모습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것이었으나, 황혼이 내린 자줏빛 피부와 가시나무관을 쓴 것처럼 제멋대로 돋아난 뿔을 가진 자를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섬뜩하고 구불거리고 날카로운 갈퀴손톱을 들어, 마족은 제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찢어발겼다. 비명의 합주곡 사이로 붉은 조각들이 여인의 머리를 위해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 모습은 우습게도, 어릴 적 성당의 낡은 성화(聖畫)에서 보았던 장면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숨가쁘게 달리는 와중에도 피식 웃고 말았다.

 

더 이상 세상에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자의, 이 빌어먹을 세상과 그 안에서 추하게 살아남으려는 자기 자신에 대해 보내는 냉소.

 

 

“거의 다······왔어······!”

 

 

나와 그녀의 손에는 검이 있었고, 우리는 마족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할 힘이 있었다. 그러나 눈 돌린 채, 구원을 갈구하듯 허공으로 뻗은 피투성이의 손을 외면한 채 우리는 달렸다.

 

나를 대신하여 마족이 여인이 내민 손을 붙들었다. 갈퀴손톱이 맞물리고, 찢어지고 부서지는 소리. 온 세상을 긁어내는 듯한 비명과 소음들 사이에서, 우리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와 벅차게 두방망이질치는 심장 고동은 너무나도 작았다.

 

누군가는 맞서싸우고, 누군가는 달아나고,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그 발에 입 맞추며 복종을 맹세한다. 나의 고향,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그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없이 망가지고 있었다.

 

그 모든 멸망과 절망의 구렁텅이 한가운데, 다시는 뜨지 않을 태양을 대신하여 여태껏 인간들의 땅에 휘광을 드리우던 성물이 불안하게 깜빡거린다. 이내, 마족 중 하나가 홰를 치며 날아올라 성물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성물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눈부신 광휘를 내뿜으며 그 마족을 태워버렸다. 그러나 그 뒤로 둘이, 셋이, 열이. 어둠의 존재들이 악다구니를 써대며 부나방처럼 자신을 태우는 빛을 향해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성물 위로 시커먼 손자국들이 역병처럼 번지고, 마지막으로 날아오른 덩치 큰 마족이 성스러운 포도주 잔을 향해 불의 채찍을 내리쳤다. 모든 힘이 고갈되고, 마기에 오염된 성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챙그랑.

태양은 부서지고, 인간의 하늘이 마계의 어둠에 잠긴다.

 

 

“안 돼! 성물이, 성물이······!”

 

“흔들리지 마.”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눈에 담는 나는 스스로가 놀랄 만큼 건조했다. 이제까지 참아 왔던 것이 무색하게, 비명을 지르며 사방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가자.”

 

“케이, 넌······.”

 

“시간 없어.”

 

 

내 무미건조한 완고함 앞에 어떤 말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지,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나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마족 중에서도 정예라 할 것은 대부분 성물 쪽으로 몰렸기에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은 잔챙이들었다. 부서진 세계에서 뭐라도 건질 수 있을까, 가지고 놀 만한 장난감이 있을까 하는 저열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스캐빈저들.

 

 

“크르르르.”

 

 

우리는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고 마수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일분일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녹슬고 닳은 칼날이 마기로 강화된 가죽을 가르다, 끝내 전부 베어내지 못하고 뚝 부러졌다. 망설임 없이 반토막난 손잡이를 집어 던지고, 놈의 몸뚱이를 걷어차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내가 있던 자리로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콰르릉. 하는 울림이 잦아들기도 전에 나는 새까맣게 탄 마수를 뛰어넘어 다시 달리고 있었다. 그 뒤로 헐떡이는 가냘픈 숨결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이젠, 정말, 한계······!”

 

“거의 다 왔어.”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짧게 툭 던졌지만 그녀가 짓고 있을 표정이 선연했다.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꽉 물고 서러움과 독기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한때는 그 표정 하나하나에 가슴 떨리고 일희일비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나는 다시금 피식 웃었다. 더 이상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건조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냉소뿐.

 

이내 발걸음이 멎었다. 베인 상처는 따끔거리고 쉬지 않고 무리하게 혹사한 육신은 비명을 지르지만, 아직은 쉴 수가 없어 나는 멈춰버린 육신을 다시금 재촉했다.

 

다행히 목적지는 머지않았다. 본래 성물을 보관하고 있었던 곳. 허나 성물이 하늘 높이 떠오른 뒤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그저 무너진 그대로 방치된 낡은 성당. 

 

우리는 최후의 힘을 끌어내어 잔뜩 쌓인 장애물들을 해치고 나아갔다. 피어오르는 먼지에 뒤따라오는 그녀가 쿨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끝에 도달해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자 바람이 바다에 다녀온 듯 짙은 짠내를 싣고 빠져나왔다.

 

 

“케흑, 헤흑, 여기야?”

 

“그래.”

 

 

온갖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것과 달리 지하층의 방 안에 있는 것은 별 거 없었다. 방은 텅 비어 부스러기와 먼지뿐이었고, 그 중앙에 사람의 허리춤까지 오는 소금 기둥 하나만 외로이 박혀 있을 뿐.

 

나는 그 소금 기둥을 향해 다가섰다. 등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좁은 방의 벽에 부딪쳐 웽웽거리며 울었다.

 

 

“정말······할 거야?”

 

“해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피와 먼지로 범벅되어 더럽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흑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말똥거리는 청록색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소녀.

 

그 안에 담긴 것은 오직 나에 대한 걱정과 염려뿐이나, 그것을 보면서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걱정하지 말라며 달콤한 거짓말로 그녀를 다독이거나 참견하지 말라며 화를 내지도 못한 채 그저 말했다.

 

상대를 끊어내려는 차가움조차 담겨 있지 않은, 무채색의 언어.

 

 

“이제는, 무엇도 돌이킬 수 없어.”

 

“하지만······하지만! 모두가 네가 용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 사이 그림자처럼 얼굴에 붙은 냉소.

 

 

“나도 그랬지.”

 

 

이 멸망으로 치달은 세상을 돌이킬 수 있는 건 용사뿐이다. 불사이며 불멸인 마왕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성검을 쥐고, 일곱 신의 가호를 등에 업어 마계를 물리칠 구원자.

 

벌레처럼 숨죽이고 살아가더라도 꿈을 꾸는 건 막을 수 없을진대, 어느 누가 용사를 그리지 않겠는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철없던 시절, 그리고 조금 철이 든 시절에도 나는 용사가 되기를 꿈구었고 내가 그리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정말, 얼마나 알량하고 유치한 생각이었는지.

마족이 마을을 덮쳤을 때, 내 꿈 또한 함께 부서졌다-

 

 

“너도 알잖아. 한 번 마기에 오염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지.”

 

“성검은 마기에 오염된 사람을 용사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성물은 마기에 오염된 마인을 성역에 받아들이지 않겠지. 나도 알아.”

 

 

현재의 인류가 조금이라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세계 곳곳에 흩어진 성물들을 통해 유지되는 소성역(小聖域)들과 대성역(大聖域) 덕분. 마기를 밀어내는 신성력의 성질 탓에 성물의 힘이 온전한 한, 아무리 마족이라도 인간의 영역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 또한 그리 되리라.

 

 

“말했잖아. 에넬.”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도 부르고 불러 이제는 닳을 만도 하건만 여전히 애틋한 그 이름을, 아마도 마지막으로.

 

 

“이미 늦었어.”

 

 

나는 그 혼돈의 한가운데서도 잃지 않고 소중히 품에 넣어 온 것을 꺼냈다. 그것은 검처럼 보이는, 그러나 날은 어디 가고 손잡이만 달랑 남은 기이한 물건이었다.

 

‘그것’의 힘을 느낀 에넬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주려 하다가, 그것이 그저 상대를 비웃는 냉소가 될 뿐임을 깨달은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금 기둥을 향해 내가 든 것을 밀어 넣었다.

 

찰칵. 무언가가 부드럽게 맞물리는 소리. 칼날을 잃어버린 손잡이와 예기라고는 없이 둔중하기만 한 소금 기둥은 마치 처음부터 짝이었던 것처럼 하나가 되었다.

 

 

“가.”

 

“케이······!”

 

“어서.”

 

 

나는 냉소했다. 

 

소금 기둥이 녹아내리며, 그 안에서 우윳빛으로 빛나는 칼날이 드러났다. 손잡이가 맞물려 그것은 완전한 한 자루의 검이 되었다. 그러나 아름답고 뽀얀 광택과 달리, 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저 한없이 또 사이하고 사특할 뿐이었다.

 

갈증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것을 메마르게 하는 힘. 그러나 검은 곧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소금 결정들이 끈적하게 전신에 달라붙고, 얼굴에 뒤집어씌워진 백색 가면 위로 앞서 본 마족의 뿔과 같은 암염(巖鹽)이 묵직하게 자라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함과, 그 무엇이라도 파괴하고 것 같은 모순적인 감각이 동시에 내 안에서 용솟음쳤다. 

 

 

[용사가 되지 못해도 좋아.]

 

 

입 밖으로 흘러나온 음성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 우리 마을을 습격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희롱한 마족과도 같은.

 

 

[세계는커녕 당장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것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앞서 침공한 마족들과는 다른, 건조하고 공허한 마기가 확 번졌다. 에넬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 눈에는 이제 걱정과 염려 말고도,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날 ‘그런’ 눈으로 본다는 것을 슬퍼해야 할까. 아니면,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그녀와 마주하고도 이제는 조금도 미동도 없는 내 마음을 애도해야 할까.

 

글쎄, 어느 쪽이든 간에 이제 중요한 건 아니지.

 

 

[······어찌 부끄럼도 없이 용사임을 자처할 수 있겠어?]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설령 그것이 마검에게 영혼을 팔은 대가라 해도, 내 손에는 이제 놈들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