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단 한 번, 그 남자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최초로 여자의 몸으로 제국에 군림한 황제가 남긴 유언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제국 최초의 여황제 헤일른 벨로이아. 헤일른은 공석이든 사석이든 언제나 '그 남자'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그녀는 그 남자야말로 사생아에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던 자신을 황제로 올린 공신 중의 공신이라 칭하였다.


남자는 제위 다툼이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던 거친 시기에 나타났다. 그는 황궁에서 하루하루 죽어갈 날만 기다리던 그녀에게 내려온 동아줄이이었다. 또한 이유 없는 순수한 호의를 베푼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호의의 진심은 무엇이었는가. 


제국 최초의 여황제이자 성군이라 불리운 그녀는 결코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덕분에 국장이 한창일 때조차 '그 남자 - 수수께끼의 공신'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오갔다.


"예전부터 궁금했소. 젊을 적의 황제께서 끊임없이 말해온 것으로 보아 결코 헛말은 아닐 것이외다."


수수께끼의 공신에 대한 얘기였다.


"사실 지금 와서 그 남자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겠소? 붕어하신 황제께서 제위를 차지하실 때의 귀족들은 대부분 눈을 감은지 오래요. 어떠한 기록도, 증언도 없는 자를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이오?"


"게다가 그 남자는 제위를 차지하기 전에 실종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노귀족들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불경한 말일 수 있겠으나, 그 남자를 얘기할 때의 폐하의 표정은 마치 정인을 그리는 듯했지요."


황제의 남자에 대한 추측은 점점 사람들을 홀리듯 번져나갔다. 소리를 죽이며 대화하던 자들은 차츰 열변을 토하며 자신만의 추리를 내놓기 시작했다.


"...사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않소?"


"말해 보시오."


"마지막 남은 5대 공작가의 첫 번째 가주. 그 분이라면 응당 알 것이오."


그 말이 나온 순간, 주변 공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주변의 모두가 느꼈다. 마치 담지 못 할 말을 들었다는 듯.


"카르닐라 리코벨타 공작..."


5대 공작가는 붕어한 황제를 옹립하는 것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다섯 공신의 가문이었다. 5대 공작가 중 네 곳의 공신은 현재 세상을 떠났고, 오직 카르닐라 리코벨타만이 유일하게 남은 그 세대의 5대 공작가의 가주였다.


"그분은 황제께서 즉위하시자마자 칩거하여 오직 가문의 일만 볼 뿐이었소. 임종도 지키지 않고 국장조차 참석하지 않는데, 그걸 물을 용기 있는 자가 있습니까?"


카르닐라 공작은 황제와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와의 어떤 만남도, 요구도 거절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에 황제는 이해한다는 듯 언제나 아쉬운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지나치게 너그러운 처사. 그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누구도 감히 공석에서 입 밖으로 내뱉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그건 황제의 치부일 수 있으며, 또 5대 공작가의 어둠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허...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애초에 이 세상 사람인지도 의문입니다. 황제께서 워낙에 장수하셨으니..."


"확실히 그것도 그렇군요."


황제 헤일른이 눈을 감았을 때는 그녀의 나이 93세였다. 워낙에 고절한 힘과 미려한 미모로 40대의 외견을 유지했으니, 많은 자들이 그녀의 세월을 망각하곤 했다.


이제 그녀와 동세대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자는 카르닐라 공작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더 많은 궁금증과 이야기들이 자리에서 오갔다. 그러나 수수께끼의 공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자는 결국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그 시각, 황궁과는 더없이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의 어느 높은 동산.


남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머리는 덥수룩하게 길고 기름기가 흘러 더러운 거지를 연상시켰으며 앞은 보일까 의문이 드는 상태였다. 대충 걸친 옷은 누더기에 가까웠으며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고약한 체취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카반닐. 헤일른 벨로이아가 제국 최초의 여황제로 올라가는 계단을 닦은 장본인이자 5대 공작가에 가려진 진짜 공신이었다.


그런 카반닐의 앞에 또 다른 남자는 그를 오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말하죠. 황제는 죽었습니다. 당신도 느꼈을 겁니다. 당신을 저주처럼 옭아매던 구속이 풀렸다는 것을 말이죠."


"윽...으흐흑..."


"막상 사랑하던 사람이 죽으니 슬프긴 슬픈가보죠? 헤일른을 보기 싫어서 이런 구석진 곳까지 도망을 왔으면서, 사람 마음은 참 모르겠다니까. 웃어 젖혀도 이상하지 않을 마당에 말이야."


"어, 어떻게 그런..."


"왜요? 얼마나 다행입니까? 만일 그녀가 역경을 겪고 있다고 들려주었다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흐윽...!"


카반닐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아마 카반닐의 머릿속에서는 안도하는 감정과, 그걸 자각하며 자괴감을 느끼는 또 하나의 자신이 있을 것이다.


남자는 카반닐의 감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그 물건은 이제 쓰임을 다 했어요. 나는 헤일른의 최후를 들려 준 것만 해도 충분히 그 값을 지불한 것 같군요."


"너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 녀석들도, 헤일른조차 모르는 이것을..."


'그 녀석들'은 5대 공작가의 친우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카반닐은 '물건'의 존재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으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헌신잔영 '행복 추구의 약혼반지 니르하나'."


남자의 말에 카반닐의 몸이 움찔, 하고 떨었다.


"어떻게 명칭마저..."


이 남자는 마음이라도 읽고 있단 말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 하는 카반닐의 표정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참 역설적인 명칭이죠. 행복을 위해 기능해야 할 물건이 당신을 이런 흐느끼는 거지꼴로 만든 거 아닙니까."


"그때의 나는 행복했다."


"지금은 아니고요. 반지의 짝이 죽은 것에 안도할 정도로 말이죠."


"읏...!"


카반닐의 눈이 다시 땅으로 푹 꺼졌다. 남자는 그런 반응은 이미 질리도록 봤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뭐 됐어요. 저는 니르하나만 받아가면 그만입니다."


"자네는 마치 내가 당연히 넘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


"헤일른의 소식 정도면 충분한 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카반닐이 굳게 고개를 저었다. 흐느끼고 참괴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는 어느새 진중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목적. 자네의 목적을 알기 전에는 이 물건은... 넘길 수가 없어."


"목적... 목적이라... 하하하하핫!"


대뜸 광소하기 시작한 사내의 돌발행동에 카반닐의 당황스러움이 역력하게 묻어나왔다.


"생존. 그게 제 목적입니다."


"정말 그것밖에 없는가? 이건 사용하기에 따라 뭐든지 이뤄낼 수 있을 테지."


"결국 생존하는 자야말로 뭐든지 할 자격이 생기죠. 곧 난세가 도래할 것입니다. 평범한 삶이 농담이 되는 그런 난세가..."


사내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거야... 이딴 세계에서 죽어 줄까보냐."


남자의 혼잣말은 실로 편집증적인 구석이 있었다. 카반닐은 그런 그에게 니르하나를 넘겨도 되는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짧은 순간에 수십 번의 결정과 번복이 뒤섞이고 있었다.


'어차피 늙은 노구. 죽으려고 살았음에도 죽지 않아 사는 삶이었다.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는가? 그 후의 일은 나와 관계가 없을 터이니...'


헤일른의 최후가 결코 외롭지 않았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이제 충분하다. 그녀가 그를 평생 그렸다는 것을 들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진다.


그녀가 훌륭한 황제로서 천수를 누렸다는 것에 그저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 자네의 말이 맞아. 헤일른의 이야기를 들려 준 것으로 값어치는 이미 다 했네."


"고맙습니다."


카반닐의 손이 벽면에 기대있던 슬레지해머로 향하였다. 비쩍 마른 팔로 제대로 지탱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으나 별문제가 되진 않는 듯했다.


카반닐은 슬레지해머를 끌고 오두막의 왼쪽 구석을 향하더니 바닥에 해머를 내리꽃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몇 번인가의 망치질이 끝나고나자 바닥 아래있던 빈 공간이 완전히 드러났다.


빈 공간에서 발견된 것은 소담스래 놓인 옥갑이었다. 카반닐이 옥갑을 들어 열자 두 개의 붉은 반지가 루비처럼 반짝였다.


"이것이 니르하나일세. 받게나."


"좋군요!"


남자가 씨익 웃었다. 카반닐도 이때만큼은 남자가 진정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본 듯했다.


"감사히 받도록 하죠 노야."


"아무쪼록 자네의 목적을 이루기를 바라지.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저주'나 다름없다네."


"그 저주가 절실한 인간도 있답니다."


"그래... 그렇겠지."


니르하나의 기능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진실을 아는 자라면, 누구 하나 탐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비보라 할 만했다. 그렇기에 카반닐 역시 누구에게도 비밀을 밝히지 않았다.


'이 자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운명이리라.'


헤일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시점부터 카반닐의 마음은 어딘가 체념한 상태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더욱 미련이 없던 것이다.


니르하나를 받아 잠시 감흥에 젖어 있던 사내는 금방 무언가를 떠올린 듯 병 하나를 내밀었다.


"참, 이거 받으시죠."


"무언가?"


"독주입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필요하실 것 같은지라. 나가떨어지는데는 제격일 겁니다 아마."


"...흐하하. 신세를 지는군."


"니르하나의 값에 비하면 어떤 명주도 싸디 싼 독주겠죠. 신세랄 것도 없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아."


사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고마웠네. 그녀의 소식을 들려 줘서. 내가 죽기 전에 가장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려 줘서."


사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카반닐은 상념에 빠졌다.


"독주라... 선물 한 번 잘 가져 왔군."


사내가 대뜸 찾아와서 제 것저럼 니르하나를 요구하며, 그를 다그쳤을 때는 경악스럽고 황당했다.


처음에는 모르는 척 일관했다. 하지만 헤일른조차 모를 카반닐의 과거를 열거하며 이야기했을 때, 그는 천지가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사내는 방식이 어떻든 간에 카반닐을 과거로부터 해방 시켜주었다. 그것이 기껍고도 서러워서 결국 니르하나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아아, 헤일른... 아아."


가진 것 하나 없는 사생아였던 헤일른. 그녀의 죽어 가는 눈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무턱대고 뭐라도 가르쳤다. 처음은 예법으로 시작해서 후에는 각종 학문들을 두루 알려주었다.


그것이 제위 다툼의 시작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니르하나는 그 끝없는 싸움으로부터 만들어진 하나의 기적이었다.


카반닐의 헌신의 증표이자 사랑을 맹세하는 의식의 반지. 그것이 '행복추구의 약혼반지 니르하나'였다.


니르하나 계약의 주체는 사랑을 맹세한 대상이 슬퍼하는 일을 목격하는 즉시, 해당 사건의 근원으로 몇 번이고 회귀하게 된다.


몇십, 몇백, 몇천의 회귀를 거쳤는지 카반닐은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그만이 남들이 살아가는 시간의 수십 배를 살아왔다.


그것이 고통스럽기 그지없어서 카반닐은 눈을 돌려 도망쳤다. 니르하나의 발동조건은 '목격'이다.


눈을 돌리고 어딘가에 처박혀 은거한다면 그녀의 불행을 목격할 수 없다. 들리는 소문조차 회귀의 트리거가 되기에 인적 없는 산에 묻히듯 살았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으며 그를 괴롭게 하던 그녀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훌륭한 치세를 마치고 좋은 인생을 살았다.


덕분에 안도하는 동시에 괴로움과 상실감이 밀려와 카반닐을 괴롭게 만들었다.


"선물 하난 잘 두고 갔군."


사내가 두고 간 술을 말하는 것이었다. 취기라도 없다면 격한 감정의 파도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사흘 밤낮을 울부짖으며 보낼지도 모른다.


카반닐은 곧 술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크흐... 독주라더니 생각보다 맥아리가 없군. 쯧."


아쉬운 듯 병을 살랑살랑 흔드는 카반닐. 좀처럼 오르지 않는 취기에 의문을 품는 찰나였다.


"커흑!?"


이변은 순식간이었다. 기침과 함께 바닥에 튄 거무죽죽한 액체는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카반닐은 즉시 그것이 자신이 토한 피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게... 무슨...! 쿨럭쿨럭! 크흐흑...!"


오장육부가 끓어오르며 날뛰는 듯한 고통이 카반닐을 엄습했다. 눈알이 뒤집히고 몸은 휘청휘청거려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독주라더니... 이런 미친 설마 진짜로...!"


고통스러운 나머지 아무 소리나 뇌까리던 카반닐은 한순간 자신의 몸이 기묘한 부유감에 휩싸이는 것을 체감했다.


다음 순간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의식은 영영 소실되고 말았다.


니르하나를 꺼낸 후 바닥에 아무렇게나 놔둔 슬레지해머에 발이 걸려넘어지며 뒤로 머리가 깨진 것이다.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지고의 공신이자 한때 황제의 연인이었던 남자의 최후였다.




***




산을 내려온 남자는 물끄러미 산 중턱을 바라보았다. 카반닐의 오두막이 자리하던 지점이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안타깝지만 너와 니르하나를 아는 사람은 한 명이 더 있거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의 남자가 카반닐의 오두막을 찾을 것이다. 만약 그때 자신의 존재를 그가 발설한다면 그만한 재앙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먼저 살인멸구했다.


"이 빌어먹을 픽션에서 살아남으려면 뭔들 못하겠어."


남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작은 집을 구할 재력도 없다. 한낱 시정잡배를 혼내줄 무력도 없으며, 누군가를 하대할 권력조차 없다.


그나마 사내의 저력이라고 할 것이 있다면 정보였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유리하게 살 수 있는 정보.


재력, 무력, 권력. 이 모든 것들은 난세에 소멸하고 다시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목숨만큼은 그렇지 않다. 사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만들고 내가 거둔 것에 불만이 없길 바라."


개인 사정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던 소설 <회죄의 아이>의 세계. 사내는 어느 순간부터 이 세계에 존재함을 자각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목숨을 맡겨야만 했던 불쾌한 사건이 사내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자신이 만든 세계가 자신을 핍박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던 그는 이곳을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살아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 나머지는 플롯대로 움직이는 자아없는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사내가 품은 생각이었다.


"부디 이 빌어먹을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완결이 나면 좋겠군."


이를 빠득, 하고 갈며 그는 예정된 목적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