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회색이구나.

다 타들어간 세상.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없는 세상.

모두가 죽었다. 그 어떤 희망도, 목표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다.

인류는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진정한 '신'들의 전쟁, 그 무대가 되어 버린 세계의 말로란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생존자는 나뿐이었다.

"으하하하."

눈앞의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휘둘렀다. 세상에 생존자가 어디 있는가. 회색인데.

회색이 무슨 색인지 아는가. 검은색과 흰색을 섞은 색이다.

"으하하핳하ㅏ하!!!"

반대 손에도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휘둘렀다. 이번 돌멩이는 우연찮게도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이 무슨 색인지 아는가? 그걸 지금부터 보여주겠다.

빠각.

"푸하하하.. 낄낄!! 끼하하하하!!"

어떤가. 대가리에서 피가 튀어나오지 않았는가. 튀어나온 피가 검은 돌에 후다닥 달라붙지 않았는가.

피는 붉은색이다. 피는 붉은색이다. 돌은 검은색이다. 돌은 검은색이다.

그래서 피는 검은색이다. 

빠각.

나는 그 사실이 썩 기꺼워 다시 한번 대가리를 깨 버렸다.

아차. 실수했다. 이번엔 흰색 돌로 깨 버렸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해 보자. 흰색은 무슨 색인지 아는가?

이것도 돌을 보면 안다. 돌이란 것이 참 신기하다. 이 세상의 진리를 담은 듯 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없다.

보라. 무려 두 개의 질문을 했는데 둘 다 알려 주지 않는가.

검은색이란 무엇인가. 검은 돌이 대답해 준다. 흰색이란 무엇인가. 흰색 돌이 대답해 줄 것이다.

피는 붉은색이다. 피는 붉은색이다. 돌은 하얀색이다. 돌은 하얀색이다.

그래서 피는 붉은색이다.

이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떻게 피가 붉은색인가. 세상이 회색인데.

아무래도 흰색 돌은 전지전능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가 멍청한 놈들을 보면 돌팔이라고 부른다.

나는 사이좋게 깨진 양 마빡을 바라보며 다시 돌을 휘둘렀다.

팽팽 휘둘렀다. 양팔로 아주 팽팽 휘둘렀다.

마치 어떤 푸른색 병신 같은 눈사람이 나오는 만화의 대나무 헬리콥터를 양쪽으로 붙여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잠깐!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는가. 인간은 본인의 마빡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내 양 마빡이 지금 사이좋게 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이 증명한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보통 길거리에서 돌을 두 개 집어 양팔로 팽팽 휘두르는 놈을 인간이라 부르지 않는다. 금수라고 부른다.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병신이라고 부른다. 머저리라고 부른다. 저능아라고 부른다. 관심종자라고 부른다. 하여 누군가는 부르지 않고 자리를 피한다. 피한다. 피한다.

피해라. 돌 날아간다. 이 개새끼야.

"낄낄꺄하하하하!! [이퀄리브리엄 트랜스피어서]!!!"

"제발 정신 차려라!!"

쿠과가가가가각!!!!

워후! 시발! 섹스! 상쾌해! 이 더러운 회색 세계! 어디 하얀 돌 따위에 와장창 콰장창 무너지는가!

이 사실이 증명한다! 회색은 하얀색보다도 못하다! 저 하늘의 신들보다도 못하다! 질서의 왕들이 싸놓은 똥들일 뿐이다!

똥은 전지전능한 새끼들이 알아서 치워 준다!! 마치 이 까만색 돌처럼!!!

"[이퀄리브리엄 트랜스피어서]!!!!"

"제발.. 커흑.."

퍼엉!! 쿠과가가가가각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iiiiiiiiiiiiiii

섹스섹스자지보지털미용사는어떤직업일까 아 상쾌해.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회색이 무슨 색인지 아는가?

회색은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색이다.

아아, 그것은 진리로구나.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을 때쯤 내가 편안히 잠들 수 있음을 느꼈다.



----



"으윽.."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오랜 잠에서 깨었다.

깨어난 나를 겨누고 있는 것은, 오랜 동료들의 무기였다.

질서의 검을 든 하테사. 용사보다도 더 용사 같은 왕도를 걷는 자. 인류의 별빛이자 지도자. 성국 최고의 성기사였던 그는 결국 질서의 검을 계승받아 용사 파티의 전위가 되었다.

유레피나르에 화살을 물린 리파. 종족의 비원을 안고 노예 수용소에서 뛰쳐나온 희망. 엘프 종족 최초의 활에게 선택받은 그녀는 수많은 시련과 인고 끝에 용사 파티의 후위가 되었다.

영원의 십자가에 마력을 쏟아붓는 에스테르.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한 소녀. 신이 가장 총애하는 처녀라고 불리는.. 성녀. 나의 소꿉친구였던 그녀는 용사 파티의 중위가 되었다.

그리고 나. 모든 무장이 해제되어 있다.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나체에, 사지가 단단한 쇠사슬로 결박되어 있다.

"..나, 정신 오염 마법에 당했나?"

"""..."""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신들의 전쟁에 참전한 이후, 전장을 나온 기억이 없다. 중간과정이 다 끊긴 책을 읽는 기분.

전장에 서 있던 내가 이리 동료들에게 결박당해 있을 이유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곳은 어디지? 전쟁은 어떻게 됐어? 혹시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나?"

"""..."""

마음속에 불안감이 몰아쳤다. 전장에 선 전사에게, 상황을 모른다는 것은 치명적인 불리함이었다.

지금은 전장이 아니지만, 전장에 서지 않은 전사라는 것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잘 들어라, 용사."

하테사가 입을 떼었다. 모두들 눈치챘겠지만, 용사 파티에서 용사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나였다.

그러니 지금은, 용사라는 작자가 정신 오염 마법에 걸려 날뛰다 동료들에게 제압당해 한 오두막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황이다.

신들의 전쟁의 전장에.. 용사 파티가 없다.

빨리 상황을 전해듣고, 다시 전장으로 향해야 한다. 인류가 전부 멸망하기 전에.

"듣고 있어."

"신들의 전쟁은 끝났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용사 파티가 기능하지 않는 채로, 신들의 전쟁이 끝났다.

그 사실은 필연적으로 인류의 패배를 예고했다.

"젠장.. 생존자는?! 생존자는 있어?!!"

"없다. 마지막 남은 인류는 우리 뿐이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내가, 용사가 없었다지만, 자기 한 몸 지킬 능력 있는 사람들은 많았어!"

"..."

하테사는 다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질서의 검을 겨눈 채로.

이윽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생존자는.. 신들의 전쟁이 끝난 이후, 전부 사망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전쟁이 끝난 이후에 왜.."

"네가 죽였다."

"누군가 배신자가 있었어?! 전쟁이 끝난 이후에 죽을 이유가 없잖아!"

"네가 죽였다."

"안 되겠어.. 아직 너네가 찾지 못했을 뿐, 생존자가 있을 거야. 빨리 이 결박을 풀어줘. 내가 직접 찾아보겠어."

"네가 죽였다."

"젠장, 알아야 할 건 다 알았잖아! 빨리 풀어줘! 정신 공격이라면 에스테르가 내성을 만들어 줄 수 있잖아!"

"네가 죽였다."

뚝.

모든 소리가 멎었다. 하테사가 사라졌다.

"네가 죽였다."

활시위 너머로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던 리파도 사라졌다.

"네가 죽였다."

십자가를 꼭 모아쥔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에스테르도 사라졌다.

"네가 죽였다."

"네가 죽였다."

"네가 죽였다."
" ."
" ."
"네가 죽였다."

목소리는 없었다. 오두막은 없었다. 동료들은 없었다. 무기는 없었다. 속박은 없었다.

회색 세상 위에 나는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아. 그랬구나."

내 양손엔 흰 돌과 검은 돌이 들려 있었다.

난 검은 돌을 들어 내 마빡을 후려쳤다.

빠각.

[사망하였습니다]

[마지막 세이브 포인트로 회귀합니다]



----



온 세상이 회색이구나.

다 타들어간 세상.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없는 세상.

모두가 죽었다. 그 어떤 희망도, 목표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다.

인류는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진정한 '신'들의 전쟁, 그 무대가 되어 버린 세계의 말로란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생존자는 나뿐이었다.

아니, 나뿐이 아니었다.

아직 남은 사람들이 있다.

세계 각국의 강자들. 전투의 파장을 빗겨간 무고한 일반인과 노약자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동료들.

그들의 숭고한 영혼이 악신의 손아귀에 수확당하기 전에,

내가 전원을 죽여야 한다.

"..[이퀄리브리엄 트랜스피어서]."

평형을 꿰뚫는 자. 

내 오른팔에 깃든 완전한 질서의 힘이 순백으로 빛났다.

내 왼팔에 깃든 완전한 혼돈의 힘이 칠흑으로 잠겼다.

난 이 둘을 합쳐 바닥을 향해 쏘아냈다.

"..! 잠깐! 뭐 하는 거야!"

세상이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이 땅을 넘어, 산을 넘어, 지평선을 넘어, 바다를 넘어.

이제야 온 세상이 완전한 회색이구나. 죽은 자의 색이구나.

질서의 눈을 뜬다. 온 세상의 영혼이 윤회의 고리에 안착했다.

단, 너희만 빼고.

"용사 파티!! 전투 태세!! 용사의 상태가 이상하다!! 제압한다!!!"

너희는 이번에도, 내게 무기를 겨누는구나.

대체 왜 내 뜻을 몰라 주는 거야.

대체 왜, 몇백 번을 회귀해도 전부 죽지 않는 거야.

내 사랑하는 동료들.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가족들.

사실 나는 이미 한계야. 더 이상 돌아가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

이 죽어버린 세계를 몇 번을 더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사랑했던 세계를, 몇 번 더 내 손으로 죽여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사랑했던 너희를, 몇 번 더 내 손으로 죽여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 제발, 지금 내 손에 전부 죽어줘.

"[이퀄리브리엄 트랜스피어서]!!!!!"

아, 이게 내가 낼 수 있는 최고 출력이다.

회색의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 누구도 남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래도 하면 되는구나. 모두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구나.

안 돼.

안 돼, 안 돼. 죽이고 싶지 않아.

너희를 죽이고 나만 살아있고 싶지 않아.

지금 당장, 나도 죽어야 해.

악신이 내 영혼을 가져가기 전에.

<나는 영혼을 가져가지 않는다.>

안 돼, 안 돼. 악신의 목소리야. 믿어선 안 돼. 영혼을 빼앗길 거야.

지금 당장 죽어야 해.

나는 하얀 돌멩이로 내 마빡을 쳤다.

빠각.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는데.>

[사망하였습니다]

<뭐하러 쓸모없는 회색 영혼 하나를 더 취하겠다고.>

[마지막 세이브 포인트로 회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