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엑... 헤엑..."


뒤에 있던 여인이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게 힘들어 숨을 헐떠이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내 아내다.


젊었을 때는 이런 산을 올라가도 안 지쳤던 여자인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젊을 때는 예뻐서 사랑했는데 이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여보, 정말 아버님 묘가 여기 계신거 맞아요?"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2023년 10월 29일 추석.


나는 정말로 아버지의 묘에 벌초를 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 42년 인생 중 처음으로 아버지하고 아무런 악감정 없이 대면하게 되는 날이 오늘인건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아버지하고의 좋은 추억 같은거야 아무리 떠올리려고 노력해봐야 5살에서 8살 정도인, 걷고 말하는 걸 배우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아버지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님이셨다. 현모양처인 어머니를 두셨고 형과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자식을 두고 계셨다. 


아버지는 무조건 가업을 물려받도록 강요했던 형, 어떻게든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노력했던 누나하고는 다르게 내가 막내라서 그런가, 유독 나를 아끼면서 키웠다.


형이 매를 맞고 있을 때 나한테는 장난감 칼을 사주셨고 누나가 학교와 학원을 병행하며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웠어야 했을 때 나는 고급 이탈리안 내지 프랑스 식당에서 소고기를 썰거나 돼지고기 요리를 먹었다.


형한테 있어서 꿈이라는 것은 사치였었다. 무조건 아버지는 형이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기에 형이 무엇을 원했는지,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는 관심도 없으셨고 알았어도 별로 그런 쪽으로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누나는 꿈이라는 걸 선택할 수는 있었다. 일단은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다면 오케이였기에 문이과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셨고 꿈이라는 걸 위해 노력할 시간이 있었고 아버지의 투자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누나가 가진 자유는 그것까지, 그 외의 자유는 누나에게 있어 물고기의 숨결, 문어의 털, 고양이의 발소리처럼 개념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허황된 것이었다. 


누나는 20살이 되기 전까지 조용필이 누구인지를 몰랐으며 그 나이대 여자애들이 자주 할만한 얘기인 남자, 화장, 패션에 대한 얘기에 전혀 끼어들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해선 나는 자유로웠다. 아버지는 나한테 가업을 강요하지도, 명문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내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어머니를 찾아왔을 때 충격 받았던 것은 바로 창고가 내 물건으로 가득 채워졌던 것이었다.


거기에는 내가 6살 때즘 엄청 갖고 싶다고 했다가 며칠 안 되어서 안 쓰게 된 말라비틀어진 붓과 팔레트의 물감들, 팔 한쪽이 실종된 태권브이, 접다가 마음대로 안 되니 찢어버린 색종이들, '짱' 이나 '럭키짱' 같은 만화책들, 또 만화가가 되겠다면서 의미 없는 그림들로 남겨진 하얀 도화지들, '맑음', '기분이 좋았음', '보람찼음' 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초등학교 일기장.


내가 그리워하면서도 부끄러워지게 하는 물건으로 가득 채워진 창고였었다. 


아, 이제 왜 내가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았는지를 설명해야겠군. 확실히 이것만 보면 도대체 이렇게 다 해줬는데 왜 싫어하는지에 대해 알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을 것이고 지금 대부분이 그리 생각할 것이다.


나도 어디까지나 아버지와의 추억이 없었을 뿐이지, 딱히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을 특별히 가지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명문대는커녕 어지간한 지방사립대도 들어가지 못할 낮은 성적이었다.


그런데도 어차피 붙을 마음이 없었다고 서울대나 고려대, 연세대나 카이스트 같이 내게 터무니없이 높은 대학을 써버려 당연하다시피 6광탈과 함께 정시도 3광탈을 달성했다.


문제는 이후 아버지로부터의 모든 지원이 끊겨버렸단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의 학력만을 가진 채로 사회에 사실상 내던져졌다.


반면에 형은 아버지 기업의 부사장, 누나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대기업의 중간관리직이 되어있었는데 말이다.


마치 내가 '봐라. 내가 너희들을 억압하면서 키웠으니 잘 자란 것이지, 아니었으면 쟤처럼 되었다.' 라고 자신의 교육방식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표본으로 쓰인 것만 같았다.


이후 난 배신감을 느끼고 사이가 안 좋아졌다.


학력이 고졸이었던 난 운 좋게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맡은 역할은 청소부였다. 확실히 돈은 대기업답게 일개 청소부가 이런 큰 돈을 받아도 되나 싶은 수준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나는 그 돈의 가치가 얼마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 크나큰 실수를 하였다.


당시의 나는 그 돈을 푼돈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구역질 나는 화장실(이라곤 하지만 내가 여러 청소를 해본 결과 그나마 여기가 양호하게 쓴 것이었다.) 청소를 하면서 받을 돈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그만두었다.


미친 짓이었지만 그 당시의 나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는 날 이렇게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낸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막 살아왔다.


노가다 한번에 아버지 욕 한번

밥 먹으면서 아버지 욕 한번

식후땡으로도 아버지 욕

하다못해 여친하고 만나고 섹스할 때도 아버지 욕을 해댔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0년 후 대부분의 유산은 놀랍게도 내게 상속되었다. 형한테는 아버지의 회사가 물려졌고 누나한테는 아버지가 소유한 자동차와 서재의 많은 책들이 물려졌다. 난 아버지에게서 그 외의 모든 재산을 사실상 세금을 떼고 상속 받았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아버지가 얼마나 내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왔다. 


산소는 이미 오래전 발길이 끊겨서 숲처럼 되었다.


나는 잔디를 제외하고 민들레, 클로버, 쑥냉이와 같은 잡초들을 베고 뽑았다.


그렇게 나와 아내가 땀을 흘려서야 잡초는 어느정도 정리되었다. 이제 절을 하려는데 산소에 벌레들이 기어들오는게 눈에 보였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들었다. 아니, 그깟 벌레놈들이 아버지를 기어올라?


나는 고사에 나온 아버지의 무덤을 갉아먹던 송충이를 먹어버린 어떤 왕처럼 벌레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기어오르는 녀석들이 한방에 터뜨려지는 편안한 죽음을 바라질 않았다.


"당신! 뭐하는 짓이에요? 당장 그만둬요!"

"안 보여? 놈들이 아버지에게 기어오르고 있다고! 어떻게 자식이 그걸 보고만 있어?"


"원래 벌레라는게 그런 거에요. 제발 정신 차려요!"


순간 아내의 언행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맨날 나한테 얻어먹고 아버지를 흉볼 때 말리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고 아버지 산소에 간다니 투덜대던 아까 모습까지.


생각해보니 참을 수 없어 이 쌍년의 목을 졸랐다.

쌍년은 얼마 못 가 목이 부러진건지 팔이 축 늘어져선 안 움직였다.


벌레를 죽이는 건 계속되었다. 파도 파도 끊임없는 벌레들. 벌레들을 잡기 위해 계속 판을 내자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아버지도 이러니 평안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