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도 무거운가.”


툭, 하고 내뱉어진 무감정한 한 마디. 노인의 싸늘한 조소에도 나는 격한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쯧, 거울이라도 보여주고 싶구나. 못 볼 꼴이야. 여러모로.”


반응을 해줄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의 앞에 선 나는 언제나 감정을 죽여야 했으니.

내가 고개를 숙인 채 무릎꿇은 노인은 내 장인어른 되는 사람이었다.


“…다 제 부덕일 따름입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단 한 줌의 후회라도 비치는 순간 죄를 짓는 셈이다.

이 사람의 딸, 그러니 내 부인의 죽음은 나로부터 기인했으니.


그 선택을 내린 것은 결국 나였다.

그 뒤처리를 할 것도 결국 나였다.

그러니 적어도 이 사람 앞에서 나는 굳건해야만 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고자 했다.


“…쯧. 애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래, 그래서 날 끝까지 여기 앉혀두고 모든 일을 끝맺으니 후련하더냐?”

“장인어른도 결국은 동의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것만이..”

“아무리 그래도, 사위라는 작자가 당신 딸을 죽이겠다 선언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느냐.”

“그것조차도, 제 부덕일 따름입니다.”


아무런 후회 없이,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속죄하고자 합니다.”


열리지 않는 입술을 달싹여 씹어뱉듯 한 마디를 내뱉자, 장인어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았을 텐데, 그 얼굴에는 동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 줌의 원망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저 불쌍한 것,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이라.

웃음도 안 나오는군. 제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죄인을 동정한다라.


“속죄라. 그래. 거기까지였지. 결국 네놈은 끝까지 이기적인 놈이야.”

“….”

“결국 모든 일이 이렇게 흐를 줄 알았다면, 그날 네놈을 거두지 말 것을 그랬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극존칭은 그만하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그 뒤의 너는 나와 모르는 사이다.”


끼릭, 끼릭. 휠체어의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노인이 내게 다가왔다.

내게만 들릴 듯 이어 내뱉은 말은 내 가슴을 찌르는 비수의 형태였다.


“…죽은 자와 사랑을 이어가겠다니,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발상은 아니란 말이지.”


일부러 들리게 한 것이겠지. 내가 감정의 편린이라도 더 비추길 바랐기에.

그래서 난 더더욱 침묵했다. 노인의 한 손에 들린 스태프가 내 어깨를 툭, 하고 건드릴 때에도 그랬다.


내가 돌처럼 굳은 채 아무런 반응도 비추지 않자, 결국 노인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스태프를 다시 들어올렸다.

이어 반대편 어깨에도 툭 하고 스태프를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 서늘한 감각을 느낀 곳은 머리였다.


세 자리의 서약.

마치 기사 서임식과도 같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는 일체의 영광을 느껴서는 안 되었다.


이어 시작될 것이 그런 영광된 의식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세 자리의 의식을 빌어, 이 자리에 선 사람들은 신의 이름 아래 서약한다.”


바퀴를 다시 굴려 내게서 멀어진 노인은 누구보다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어 내뱉은 모든 말이 신의 눈, 신의 귀, 신의 자리를 빌어 진실되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옅은 탄성을 내뱉었다.

주변의 모든 공기가 날 얽죄인 까닭이다.

앞으로 내가 내뱉을 단 한 마디가 진실되어야만 했던 까닭이다.


“신의 위명 아래에, 재판을 시작하겠다.”


이어 뱉어진 말은 나를 심판대에 세울 것을 명하고 있었다.


단 둘뿐인 입회인이 곧 죄인이고 재판관이었다. 재판이라고 부를 수 없는 초라한 꼴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 재판의 결과가 서로에게 지극히 중요한 까닭이다.

굳이 그 무게를 가볍게 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부터 네놈이 지은 죄를 읊겠다.”


죄.

내게 죄라 한다면 사령술사의 길을 걸은 것밖에 없었다.


“가장 지독한 악, 가장 무거운 죄, 가장 더러운 오물과도 같은 우리에게도 지켜야 할 긍지가 있다.”


내가 해온 일이 정도에 가까운 탓에, 사령술사의 긍지와는 거리가 먼 탓이다.


“우리는 망자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망자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망자를 인간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책무가 아닌 까닭이다.”


용사라는 이름으로 망자와 가까이 지내고자 한 내가 재판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에게 망자란 언제나 도구이고, 재산이고, 힘이었다. 절대 인간과 동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쌓아 온 역사 전부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날 보며 그녀는 후회했을까.

잠시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상념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 필사적으로 생각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감히 망자와의 사랑을 노래하는 죄인이 있다.”


재판이 이어짐에 따라 그녀가 나의 치부가 될 것을 알았기에.

그녀의 고결함을 이 순간만은 마음 한켠에 묻어두고자 했다.

지금 이 순간 내게 물릴 죄가 그녀에게 튀어 묻지 않길 바랐다.


“그 망자 역시 사령술사임에, 이 자는 한 사람의 죄로 두 사람의 긍지를 더럽히고 만 것이다.”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이 역시 내 선택과 그에 말미암은 결과였다.


“따라서 네가 선언한 것은 우리에게 이단이다. 이에 처벌을 내리고자 한다.”


이를 짓씹으며 기다렸다.

재판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의식이 끝나간다. 이제 마지막, 한 마디만 내뱉으면 되었다.


“넌 오늘부터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니다. 다인 에스테르. 아니, 다인. 신의 위명 아래 처벌을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겠습니다.”


덜컥. 마지막 말을 내뱉은 순간, 혼이 달싹였다. 내게 엮인 에스테르의 이름이 사라져감을 느꼈다.

이제 나와 그녀를 피로 엮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장인어른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 미지근한 얼굴로 내게 축객을 명했다.


“에잉, 쯧. 빨리 가버려라. 이 짓도 할 짓이 못 되는군.”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과 관련된 일인데 저리 냉소적인가.

저것도 사령술사의 의무이자 긍지라고 한다면, 나는 사령술사임을 포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끼릭, 끼릭. 내게서 등을 돌린 휠체어가 멀어져감을 느끼며,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 문을 향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고향의 향취를 묻어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행선지는 성국이겠군.”


인류 최강의 네크로맨서, 다인.


“신성모독이라고 쫓겨나지나 않을까 모르겠어.”


모든 책무를 끝내고, 죽은 연인을 되살리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