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십사각형 - 82키프〕

결과를 확인하자 아이는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실망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이 정도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게야. 너보다도 짧은 아이들이 열심히 노력한끝에 성공하는 모습을 이미몇 번이나 보았었지.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는 말려무나."

안경을 쓴 사제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하지만 사제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인지, 아이의 어깨는 작도실의 문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축 처져있었다.

사제의 눈에 담긴 연민의 시선이 채 마르기도 전에, 반대쪽 문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다음번째 아이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 그래, 들어오렴."

곧 문이 열리고, 맑은 자줏빛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이가 들어왔다.

사제가 건넸던 위로의 말이 바깥까지도 들렸던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인지, 머리카락에 비해 훨씬 탁한 색을 띈 눈동자에 불안감이 역력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제는 그저 친절히 작도기 앞 의자를 가르켰다.

아이가 의자에 앉자, 사제는 능숙한 동작으로 작도기의 높이를 아이의 키에 맞게 조절했다.

사제는 이어서 아이의 오른쪽 손목을 가르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손바닥이 위를 바라보도록 작도기에 손등을 올려보겠니?"

아이가 사제의 설명을 따라 손을 옮기자, 작도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바짝 긴장한 아이의 오른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단다. 팔에서 힘을 빼고 편안히 있으렴."

물론 작도기가 멈출 때까지 아이의 팔에서 힘이 빠지는 일은 없었다.

〔육각형 - 210키프〕

"210키프! 정말 축하한다. 어서 나가서 부모님께 알려드리렴, 분명 무척이나 기뻐하실 거야."

아이는 사제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의자에서 내려와 작도실을 뛰쳐나갔다.

문이 닫힐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았음에도, 사제는 아이의 눈동자가 그 머리 빛깔 만큼이나 맑아졌으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힘차게 달려가는 아이의 발소리가 멎은 후에도, 사제는 닫힌 문을 잠깐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사제는 허둥지둥 뒤를 돌아보았다.

작도실로 들어오는 문 앞에 짧은 청록빛 머리카락의 아이가 묘한 눈빛을 한 채 서 있었다.

"얘야, 작도실에는 먼저 들어간 아이가 작도를 마쳤는지 확인한 후에 들어와야 한단다."

아이를 타이르려는 듯 사제가 다소 엄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라, 하지만 분명 아이가 허겁지겁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던 걸요? 혹시 아직 남아있는 건가요?"

작도실 안에는 자신과 사제 둘밖에 없다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아직 아이가 남아 있느냐고 묻는 아이의 모습에서, 사제는 무엇인가를 깨닫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얘, 혹시..... 앞을 보지 못하는 거니?"

이전 차례였던 아이가 작도실을 뛰쳐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작은 아이의 체구에서 나온 발소리는 들어오는 문의 건너편까지 들릴 정도로 크지 않았다.

그리고 묘한 빛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눈을 다시 살펴보자,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흐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네! 오른쪽 눈은 태어날 때부터 멀었고, 왼쪽 눈은 2년 전에 멀었어요."

아이가 이런 물음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씩씩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중에 들어와서 죄송해요.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단다, 이전 차례였던 아이는 네가 말한 대로 이미 작도를 마치고 나갔으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나가려는 아이를 말리며 사제가 말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이는 천진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사제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바로 알아차리지 못해 미안하구나."

사제는 아이의 오른손을 가볍게 쥐었다.

"손을 놓치지 않게 조심하고, 천천히 나를 따라오렴."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도기가 아이의 가슴께에 오도록 높이를 조절한 후, 사제는 다시 아이의 오른손을 쥐고 작도기로 이끌며 말했다.

"이제 손을 올려놓으면 작도가 시작될 거란다. 준비는 되었니?"

아이는 한껏 기대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준비됐어요."

사제는 아이의 손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긴장의 기색이 보이지 않는 아이는 정말 오랜만이군'



작도기가 가동을 멈추고 결과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사제님, 제 도형은 어떤 모습인가요?"

작도기로부터 손을 거둔 아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목소리로 물었다.

"....."

"사제님.....?"

사제가 한참을 대답하지 않자 아이가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 다시 물었다.

"혹시 제가 실망할까 봐 대답을 망설이고 계신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떤 다각형이 나오더라도 절대 좌절하지 않기로 다짐했는걸요! 그러니 어서─"

사제가 아이의 말을 끊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겠니?"

"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의문 표할 새도 없이, 어리둥절한 아이만을 남겨둔 채 사제는 작도실에서 달려 나왔다.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증적실에서는 고위 사제들의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철컥.

회의를 진행하던 고위 사제 십여명의 시선이 일제히 증적실의 문으로 향했다.

철컥. 철컥철컥.

말석에 앉아 있던 한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의 잠금을 풀었다.

벌컥.

"아, 자네인가? 미안 하지만 지금은 회의가 진행 중이니 나중에 다시...."

사제는 고위 사제의 말을 무시한 채 증적실 한쪽 구석에 세워진 경전으로 향했다.

"자네, 이게 대체 뭐 하는겐가! 지금은 회의가 진행 중이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라는 말을 듣지 못한 건가?"

고위 사제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제는 가쁜 숨을 내쉬며 경전의 표지를 펼쳤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저마다 고유한 다각형을 부여받고, 작도기를 통해 자신이 가진 다각형의 둘레를 확인한다.】

사제 자격을 얻기 위해 몇백 번을 읽고 몇천 번을 필사했던 기본 교리.

그곳에는 틀림없이 '다각형'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 자네가 한 행동에 대해 제대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할걸세."

뒤따라온 고위 사제들이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벌컥.

"사제님, 돌아오셨군요! 어라....? 발소리가 왜 이렇게 많...."

아이가 내뱉은 말은 고위 사제들의 웅성임에 곧 묻혀 버렸다.


혼란에 빠진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한 사제가 아이에게 말했다.

"얘야, 지금부터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단다."


작도기에 표시된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원 - π키프〕







집필 소요시간 - 7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