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쌀쌀합니다. 


 그래요, 눈도 내리고 있고 밤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쌀쌀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아무도 오지 않을 놀이터에서 벌써 한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미 코 끝이 빨갛게 변했고 몸은 식을대로 식어버려서 더 이상은 입김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냥만 있었다면 안데르센 동화의 주인공마냥 그어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이 추운곳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리는 남자,

참 여러모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글쎄, 요즘세상에 서른이 넘도록 연애 경험조차도 없다지 않겠어요?
하는 일마다 사고만치고, 말투도 어수룩하고, 자기 관리도 좀처럼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긴, 저런 사람이니 모태솔로 대마법사인 것이겠지만요.


 사람을 기다린다는 건 여러모로 힘에 부치는 일 입니다.

특히나 상대가 멋대로 통보하듯이 약속을 잡아놓고 자기 멋대로 늦어버리는 그런 한심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멀리서 그가 보입니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빨간 목도리. 

모두 제가 골라준 것들입니다.


 저것 보세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한심하네요. 
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다가 표지판에 머리를 박고 나자빠진다니,

대체 어디까지 떨어지려는 걸까요 이 남자.


저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저는 화가 나 있으니까요. 


"늦어서 미안해요, 오는 길에 사고가 좀 있었어요."


여자 앞에서 숨 몰아쉬지 말아 주실래요?
이마에 땀도 좀 닦구요. 
왜 그렇게 실수가 잦아요? 
조심 좀 해주세요.
어차피 늦은 거 조심해서 올 수도 있었잖아요.

주머니를 뒤지다가 손수건을 찾지 못했는지 한참이나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이 내 너털웃음을 흘리며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냅니다.

"시작할까요?"


네 그러세요, 준비해 온 거 해보세요.


"일단 꽃부터 받으시구요."


제가 당신한테 왜 꽃을 받아야 하는데요? 그것도 가지가 다 꺾인 꽃을.


"아... 그, 그러네요. 그 잘 모르겠지만 이런 거 할 때 꽃 같은 거라도 주고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초조한듯 입술을 핥으며 남자는 말을 이어갑니다.


"우리 알고 지낸지 참 오래 되었잖아요, 수미씨. 그래서 만약 수미씨께 그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 조금 더 돈독한 관계 아 그 별거 아니구 막 부담갖고 그러실 필요 없구요, 당장 그 어떻게 하겠다는 뭐 그런 거 아니구요. 그냥 아는 사이 말고 친구 합시다. 남자친구 여자친구."


이런 사람입니다.


벌써 28번째. 
28번이나 온갖 장소에서 이 남자를 기다려 
28번이나 무드도 말주변도 없는 고백에 어울려 주고 있습니다.


이 남자, 

대체 저한테 왜 이러는 걸까요?


고백을 한다면서 약속시간에 늦는 건 무슨 경우인가요?

꽃다발은 부담스러워요. 차라리 한 송이를 준비하던가 초콜릿 같은 게 좋을 것 같아요.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왜 그렇게 남자가 숫기가 없어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그런 사람을 상대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구요.


얼어붙은 손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이 멍청한 사람을 어째야 하나요.

다른 여자한테 고백연습을 도와 달라는 건 또 어떻구요. 

제 앞에서 제발 좀 사라져 줬으면 좋겠네요. 

무엇보다 제 이름은 수미가 아니라 미정인데요.


왜 제 앞에서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르는 거에요.

왜 매번 자기 일도 똑바로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건데요 

왜 새벽에 전화해도 싫은 기색 없이 다 받아주는 건데요. 


왜 어째서 내가 아닌 건데요.


빵점이에요 빵점. 다시 생각해서, 다시 연습해서 다음에 다시 하세요.

이 따위로 고백하면 백퍼 차여요.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나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요.


그리고 다음엔 좀 따뜻한 데서 해요. 추워 죽는줄 알았네.


"네, 그럴게요. 그렇게해요, 미정씨. 이 후에 약속 없으면 제가 커피라도 한잔 살까요?"


다가오지 마요. 

따뜻한 거 나한테 건내주지마요.


"집에 갈거에요, 내일봬요."

"네. 내일."


정말로 울어 저 남자 앞에서 울어버릴것만 같아서 급하게 돌아섭니다.

알아요. 

안다구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가장 한심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아무말도 하지마요.


아주 잠시, 아주 잠깐. 저 사람이 내 사람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을 그리고 있다고

그리 납득할 시간이 필요한 거. 그것 뿐이니까요.


사람을 기다리는 건 참으로 힘든 일 입니다.

특히나 약속도 없이 나에게 올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건 더더욱 힘듭니다.

너무 힘에 부치네요, 


하얀 입김이 밤하늘 가득 번져갑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