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연재 시작할 만큼은 안되는듯.

매일 4000자 쓰는 근육이 안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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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하게 상대방을 파고드는 승부사! 알레르망!”

 

군중의 환호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로 목청이 터져라 울부짖는 심판이 더욱 소리를 높인다.

 

“그으으 상대는 악마를 먹는 빨간머리. 페리도트!”

 

눈앞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 소리만 가득하다.

 

고장난 텔레비전처럼 가끔씩 롱소드를 꽉 붙든 철제 건틀렛이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할 뿐이다.

 

“후우… 후우…”

 

잔뜩 긴장한 탓일까.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듯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간질거린다.

 

“시합 시작!”

 

경기장을 울리는 트럼펫 소리와 함께 대전의 막이 오른다.

 

그 시작과 함께 투박한 검을 든 판금갑옷이 거리를 좁혀온다.

 

천천히.

 

하지만 스텝을 밟으며 빈틈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상대가 한발 더 내딛는 것을 끝으로 시야가 닫힌다.

 

━ 카앙! 카가각!

 

찰나의 암전이 끝나니 검끼리 맞닿아 날카로운 금속음이 튄다.

 

페리도트가 크로스가드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계속해서 공격의 궤도가 바뀐다.

 

내려베기 다음에는 역날베기.

 

이어서 찌르기가 들어온다.

 

[정신차려 페리! 거리를 벌려!]

 

허나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한 페리의 귀에 내 말이 닿을 리가 없다.

 

그렇게 소리없는 외침이 어둠 속을 달리는 와중 묘한 감각이 짜릿한 자극을 주었다.

 

상대방이 검을 회수하며 무게중심을 바꾸는 찰나 팔다리가 있는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어?”

 

이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입이 없으니까.

 

나를 먹은 빨간머리 소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니까.

 

“방해하지마!”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영혼을 울린다.

 

그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주 짧은 순간 부분적으로 그녀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이제껏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가끔 보이는 외부를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알아서 해!”

 

페리가 허공을 향해 버럭 소리질렀다.

 

제시간에 칼을 비틀어 찌르기를 쳐낸 것에 대한 감사는 커녕 윽박지르기까지.

 

급박한 상황이라 나는 말을 아꼈다.

 

“꼬맹아. 아까부터 뭘! 그렇게 조잘대냐!”

 

이번에는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검의 동작에 맞추어 찔러온다.

 

빈틈만 노려 정확히 타격을 날리는 것을 보면 대인전에 상당히 익숙한 상대다.

 

지금 들어오는 하단베기처럼.

 

페리의 반응을 기대하다가는 점수를 내주고 만다. 실점은 고사하고 다리를 맞아서 서있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지.

 

여기서는 슈랑크훗(Schrankhut)으로 받아내고 쉴하우(Schielhauw)로 득점하자. 지금의 어중간한 자세로는 뭐도 안 된다.

 

-카각!

 

검끼리 부딪치며 나는 소리를 제끼고 검끝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하지만 상대의 판금갑옷에 닿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감각이 저릿저릿하니 페리가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서로 다른 힘이 반대로 작용하며 근육이 끊어질 듯 뻐근하다.

 

그럴 육체가 있다면 말이지만.

 

“아 진짜 좀!”

 

한 육체에 불협화음이 가득하니 자세는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페리가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내뱉은 직후.

 

━ 퍽!

 

정수리를 세게 얻어맞았다.

 

“크흑!”

[아윽!]

 

“시합 종료! 득점차로 알레르망의 승리!”

 

 

* * *

 

한국에서 멀쩡히 잘 살다가 모종의 이유로 마왕군의 잡졸이 된 나는 페리도트에게 죽었다.

 

아니, 죽었을 터였다.

 

“다 너 때문이잖아!”

 

━ 꿀꺽. 꿀꺽.

 

그녀가 벌컥벌컥 액체를 들이키는 소리가 어둠을 울린다.

 

분해서 맥주라도 퍼마시는 거겠지.

 

[내가 아니었으면 1초만에 탈락했어.]

 

“푸흣! 컼! 지랄하고 있네!”

 

사레가 들렸는지 페리는 가슴을 두들기며 쏘아붙였다.

 

 

이번에 보몽 공작령에서 열린 토너먼트는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 서방장벽을 지키는 공작령이 아닌가.

 

공작령에서는 우수한 인재를 뽑고자 매년 토너먼트를 연다고 한다.

 

아밍소드로 대결을 하는 점수제 토너먼트부터 기병창으로 상대를 낙마시켜야 하는 자우스팅(Jousting)까지 다양한 시합들이 있다.

 

상금, 기사작위, 그리고 명예.

 

저마다의 이유를 가진 실력자들이 모여들었고 우리가 싸운 승부사 알레르망 또한 그중 하나였다.

 

 

“역시 너를 먹는 선택을 하는게 아니었어.”

 

[아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흥!”

 

 

페리는 공작령 근처 마을 자경단의 막내였다.

 

보통 막둥이, 막내는 사랑받기 마련인데 페리는 그렇지 못했다.

 

흔히 진저(Ginger)라고 부르는 빨간머리카락 때문에.

 

지구촌에서도 ‘진저’하면 농담거리로 만드는 것은 예사에 차별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는가.

 

이쪽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악마의 자식이라느니 영혼이 없다느니 하는 빈정거림은 웃어넘길 정도다.

 

게다가 죽인 마물을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충격적인 광경도 한 몫 했을테고.

 

괴물이 된 괴물 사냥꾼이 인간무리 속에서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

 

내가 속해있던 마물 무리에게 페리네 마을을 습격하라는 지시가 있던 날, 나를 섭취한 그 날로 페리는 여행을 떠났다.

 

 

“콱 그냥 소화시켜버릴까.”

 

[죄송합니다. 페리도트님.]

 

그래도 소멸하는건 싫다.

 

기왕 이렇게 된거 페리도트님께 잘 보여서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알았으면 됐어. 근데, 그건 어떻게 한거야?”

 

[그거라니 뭐?]

 

“그… 내 몸. 마음대로 움직인거.”

 

육체를 공동소유하고 있다는게 부끄러운건가?

 

뜸들이며 말하는 모양새도 그렇고,

체온이 화끈 달아오른 것도 그렇고.

 

희미하긴 해도 그녀의 감정이 와 닿는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냥 힘이 들어갔어.]

 

이건 진짜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아까는 마치 없던 팔다리가 돋아난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지금 해봐.”

 

[뭐? 왜?]

 

“시합 중에 또 이런 일 생기면 곤란하잖아. 적어도 합의는 해야지.”

 

[합의?]

 

“아 아무튼 해봐 빨리.”

 

시합 때는 몸의 주도권을 가지고 팽팽하게 저항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 해보라고 종용한다?

 

그녀를 조금은 골려주고 싶은 생각에 음흉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소녀의 몸에 빙의한 한국산 30세 동정 마법사가 할 법한 발상이.

 

━ 텁. 조물조물.

 

아아. 몽글몽글하다.

 

감촉 좋네.

 

손에 딱 들어오는 것이 아담한 크기의 사과가 갬비슨 너머로 느껴진다.

 

“…”

 

잠깐의 침묵.

 

근데 별 다른 이변이 없으니 도리어 무서워진다.

 

아니, 이변은 있다.

 

분명히 그녀의 몸 속에 영혼 찌끄러기로 남아있을 텐데 점점 더위가 엄습해온다.

 

그리고 더 뜨거워진다.

 

[더워. 페리. 뜨거워.]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사막처럼.

 

“야이 미친새끼야!”

 

 

결국, 페리는 선술집 주인에게 테이블을 부순 값을 변상해야 했다.

 




페리랑 공동체가 되고 대략 한 달 정도 지난 것 같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시계도 뭣도 없으니 그저 추측할 뿐.

 

간혹 페리의 눈이 보여주는 밖의 풍경은 수시로 바뀌었다.

 

토너먼트 경기장, 공작령의 상업지구, 선술집… 사실 선술집 풍경이 압도적으로 많이 보였다.

 

페리가 보는 것들이 곧 내가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는 고장난 VR기기를 착용한 느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보이는 동안에는 뭘 했냐고?

 

상당히 변태같겠지만 페리의 숨소리를 들었다.

 

정확히는 들렸다.

 

출장가서 어쩔 수 없이 모텔에 묵었는데 옆방 소리가 들리는 상황을 아는가.

 

싫어도 듣고 있어야 한다.

 

뭔가를 마시거나 먹을 때 나는 소리도 3D 서라운드 음향으로 생생하게 들렸다.

 

시야는 공유가 끊길 때도 있지만 촉각과 청력은 아닌듯했다.

 

낮에도 밤에도 계속.

 

그래도 이제는 제법 친숙해졌다.

 

거부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다만 익숙해진 만큼 묘한 감정이 솟아날 때가 있다.

 

영혼상태로 페리 뱃속에 있어도 수면욕은 있는지 잠을 청할 때가 문제다.

 

페리는 잠꼬대가 없는 편이라 다행이긴 한데….

 

내 쪽이 문제다.

 

강제 ASMR 떄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연하의 여자와 나란히 누워 자는 것처럼 새근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간질이면 오던 잠도 싹 달아나버린다.

 

바로 지금처럼.

 

“스으… 흐으응….”

 

덕분에 페리 전용 자명종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신세냐고.

 

기왕에 전생시켜줄거면 좀 강한 마족으로 만들어 줄 것이지.

 

이 세계의 신이라는 놈도 참 악질이다.

 

상급 마족의 명령을 거역도 못하는 졸개로 만들어서 페리한테 먹히게 만든걸 생각하면 어휴….

 

“으응… 엄마…”

 

그래도 싫지는 않다.

 

페리 없이는 아무데도 못 가지만 털털한 성격 때문인지 파트너로서는 마음에 든다.

 

저쪽도 그럴지는 미지수지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겁에 질린 소녀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거미… 거미? 거미! 으아아악!”

 

[왜? 무셔운 꿍꼬또?]

 

“후우… 하아…. 닥쳐라. 다시 잔다.”

 

[네.]

 

짚단에 면포만 얹은 싸구려 숙박업소 침대라고는 해도 푹신하긴 하다.

 

하지만 편한 잠자리와 실제로 잠이 오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리라.

 

침대에 풀썩 몸을 던진 페리가 조금 뒤척이더니 돌연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이름이라….

 

영혼만 남아 감옥에 갇힌 놈에게 무슨 이름이 있으랴.

 

굳이 한국 이름을 대고 싶지도 않고 ‘마물 잡졸1’ 이런것도 싫다.

 

[없어.]

 

“뭐야 그게.”

 

[그냥 편할대로 불러. 신경 안쓰니까.]

 

대충 대답을 던지고 나니 한밤중의 침묵이 페리와의 사이에 들어찬다.

 

벌어져가는 간극이 싫어서 이번에는 내 쪽에서 질문을 던졌다.

 

[근데 페리. 너는 왜 검을 잡게 된거야? 이런거 물어봐도 되나?]

 

페리가 이불을 만지작대는 촉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과거를 떠올리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페리에게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 사락. 사락.

 

규칙적으로 들리던 소리가 멎었을 때 소녀가 아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검이 좋았어. 아빠가 기사단원이었거든. 집에 돌아오실 때마다 대련을 하고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기분 좋았어.”

 

다시 면포와 손가락을 사락사락 비벼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가 마물을 먹는 힘이 개화했었지. 뭘 얼마나 먹든 허기는 그치지 않았어. 빵을 산더미처럼 먹어도, 추수 축제날 돼지 바비큐를 들고 뜯어도, 언제나 배고팠어.”

 

[지금은?]

 

“이상하게 널 먹으니까 배불러.”

 

[신기하네.]

 

“그러게 신기하지.”

 

[그래도 술배는 어디 안가더라.]

 

평상시라면 입 닫으라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후훗’ 하고 웃어보였다.

 

“미안해. 토너먼트 때랑 선술집에 있을 때 화내서.”

 

[그럴 수도 있지. 나야말로 조심할게. 너가 다치면 나도 아프니까.]

 

“크흐흣. 뭐래….”

 

아니 진짜 아프거든.

 

페리랑 다투다가 상대의 검이 투구를 강타했을 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었다.

 

“이젠 진짜 자야겠다. 잘자.”

 

[그래. 내일 의뢰에 늦을 수는 없지.]

 

그래도 오늘은 잠이 잘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