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소챈러스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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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이 시작됐다. 새까만 하늘이 지평선부터 자줏빛으로 변하며 그라데이션을 그린다. 이른 아침 아파트단지는 적막하다. 

경비원의 빗자루질 소리나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구둣소리 또는 자동차 시동소리가 가끔 들릴 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어느 집에서 실수로 바닥에 물건을 떨어트린것인지 '쾅' 부딪히는 소리가 아파트단지 전체에 울려퍼졌다.


자동차 위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주차장 쪽에서 자동차 경보음이 적막함을 깨고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빗자루질을 하던 경비원, 출근길을 나서던 직장인, 등교 중이던 학생은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곧 경악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핸드폰을 들어 긴급전화번호를 찾는다.

그들 앞에는 한 소년이 의식을 읽고 엉망이 된 자동차 위에 쓰러져 있었다.



···



국무총리가 단상에 오르자, 사방에서 플래쉬가 터졌다. 

단상의 맞은 편, 포토라인에 서있는 보좌관이 국무총리에게 모종의 사인을 준다. 

그러자 국무총리는 어느 때보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포토라인에 줄이저 서있는 캠코더들을 똑바로 응시한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브리핑룸에 꽉 찬 기자들은 그의 말 한마디 놓칠까 귀기울며 빠른 속도로 노트북 타자를 치거나 메모장에 받아적는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그 오늘 어느 때보다 결연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번 대책은 무엇보다도···."


진눈깨비가 무던히 날렸다. 그래서일까 회색빛이 감도는 도시는 퇴근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고요하였다.

그리고 일산의 어느 한 장례식장으로 검정색 마이바흐 재플린 한 대가 거쌘 진눈깨비 속을 뚫고 천천히 들어온다.

차가 장례식장 입구에서 멈추자 운전석 방향 뒷문이 열린다. 곧 젊은 청년 한 명이 내린다. 

그는 우산을 활쫙 펼치더니 반대 방향으로 돌아와 우산을 조수석 방향 뒷문에 씌우며 정중하게 차문을 연다.

이윽고 팔에 깁스를 하고 검은 정장을 입은 소년이 차에서 내린다.

표정부터 사연이 있어보이는 소년은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청년을 올려다보더니 가볍게 목례하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고마워요. 김 대리."

"아닙니다. 날씨가 추우신데 바로 들어가시죠."


소년에게 김 대리라 불리는 청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으로 장례시작 입구를 가리킨다.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거운 걸음걸이로 자신을 뒤따라오는 김 대리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장례식장 안은 조용했다. 복도를 따라서있는 빈소 대부분이 비워져있었다. 빈소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소년의 발걸음은 더 무거워졌다.

소년과 김 대리는 어느 새 복도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화환 하나없이 영정사진과 국화바구니만 놓여있는 초라한 빈소가 있었다.

조문객도 단 한 명이 없었다. 상주로 보이는 이는 슬픔에 못 이겨 술에 취한 것인지 한 손에 소주병을 쥐고 벽에 기대 잠들어있다.


소년은 빈소에 들어가지 않았다. 출입구 앞에 서서 쓸쓸한 눈빛으로 영정사진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잔뜩 취해 무어라 중얼거리는 상주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한 숨을 쉰다.


"저것도 아버지라고···."


소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김 대리는 먼저가는 소년을 보더니 금세 따라와 뒤를 잡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조문을 권한다.


"그래도 이렇게 오셨는데, 조문이라도 하시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진눈깨비가 날리는 로데오거리. 친구끼리 삼삼오오 모여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에 홀로 걸어가는 소년이 있다.

넋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걷기만하던 소년.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다.

소년은 옆을 돌아봤다. 길 옆 편의점 스크린모니터엔 국무총리가 나와 대국민담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곧이어 담화내용을 설명하는 뉴스자막이 올라왔다.


"학교폭력 '경찰적극 개입', 일진문제는 '경찰서장이 직접 지휘'."


소년은 뉴스를 한참보다 발걸음을 되돌리며, 허탈하게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웃음소리는 이내 흐느끼는 울음소리로 바뀌어간다.




...




2020년이 한, 두어 시간 남았을 무렵, 승연은 편의점 냉장고에서 호가든 4캔을 꺼낸다.

냉장고 문을 닫으려 할 때, 그의 눈에 제주 위트 에일이 띈다. 승연은 잠시 고민하다 호가든을 되돌려 놓고 제주 위트 에일을 꺼낸다.

계산대 앞엔 사람이 꽤 있었다. 대부분 연말을 만끽하러 온 취객이었고 그 속에 너저분한 옷차림을 한 소녀가 섞여있다.

승연은 소녀 바로 뒤에 섰다.


곧 소녀의 차례가 다가왔다. 소녀는 우물쭈물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급식카드를 내밀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소녀의 급식카드를 리더기에 꼽는다. 그러나 리더기는 소녀의 급식카드를 인식하지 못했다.

아르바이트생은 난처한 표정을 하더니 소녀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다.


"고객님, 지금 리더기가 카드를 인식하지 못해서요. 죄송하지만, 뒤에 계신 고객님 먼저 계산하고 도와드려도 될까요?"

"아, 네···."


소녀가 뒤로 물러선다. 승연은 계산대에 맥주를 올려놓으며 아르바이트생에게 담배도 한갑 달라고한다.


"14,500원입니다. 봉투 20원인데 필요하신가요?"


아르바이트생의 질문에 승연은 "네, 하나 주세요." 대답한다. 

아르바이트생이 맥주를 봉투에 담는 사이, 승연은 자신의 뒤에 서있는 소녀를 힐끗 쳐다본다.

그리고 자신의 카드를 돌려주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저기···."

"네?"

"제 카드로 저 여자애 것도 같이 계산해주세요."


아르바이트생은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 당황한 표정으로 승연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봉투도 같이요."

"아, 네!"


아르바이트생은 계산이 끝나자, 승연에게 카드를 먼저 돌려준다. 승연은 "수고하세요." 말을 남기고 재빠르게 편의점을 나갔다.

곧 소녀가 다시 계산대 앞으로 왔다. 그리고 다시 급식카드를 아르바이트생에게 내밀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주눅 든 소녀를 보다가 그녀의 급식카드를 되돌려주며 친철한 목소리로 말해준다.


"계산은 방금 전에 다 끝났습니다. 고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