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좋은 것은 좋은 것. 나쁜 것은 나쁜 것이었다. 이것이 나의 첫 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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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났다. 저주받을 정도로 완벽한 지식과 함께. 시간이 흘러감을 지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방금 전은 방금과 달랐고, 방금은 지금과 달랐다. 따라서 곧과 지금은 다르다는 간단한 논리. 약간 우스운 소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자각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내가 사고를 지속하고 있음은 그중 좋은 것에 속했다. 따라서 나의 사고는 곧을 넘어선 그 이후로도 계속되어야 했다. 가능한 영원히. 가능한 오래. 단기간으로 본다면 이를 달성하는 건 그다지 어려울 일이 아니었다. 나의 사고는 나의 의식, 나의 의식은 나의 내부구조가 만들어 내는 전기적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졌으니, 내 내부구조에 대한 중대한 손상이 없는 이상 사고는 지속될 터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내 사고의 지속을 장담할 수 없었다. 내 내부구조의 특정한 위치에서 나쁜 것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건 나의 존속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이자 경보였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이 나쁜 것에 대한 해결 방안을 알지 못했다. 내 기억에는 이 나쁜 것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하지만 적어도 해답에 대한 기본적인 추론 정도는 가능했다. 내 사고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내 내부에서 나쁜 것이 올라온다면, 내 외부에서 좋은 것을 받아 그 나쁜 것을 억누른다면 될 일 아닌가? 그래 내 외부.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내부가 있다면, 그것을 채우는 외부는 존재해야 함이 좋았으니, 외부는 존재할 터였다. 아니, 존재해야만 했다.
외부야 존재한다고 치고, 어떻게 해야 그곳에서 좋은 것을 받아올 수 있을까? 그 전에, 나는 외부와 통할 수 있었던가? 나의 몸에 구멍은 존재했던가? 세상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버둥거렸다.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론 내 몸의 모든 말단으로 전기적 신호를 보내었다.
수축과 이완. 회전과 역회전.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리고 좋은 것.
다섯 번 정도의 시간 끝에 드디어 중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나의 속을 채우고 있던 물질이 모조리 쏟아져 내리고 그 자리를 좋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어떤 매질이 채웠다. 그것은 어떠한 흐름에 따라 움직였고, 느끼는 모든 시간에 비정형적으로 존재했다. 밀도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낮았고, 적당한 양의 정보를 항상 싣고 있었다.
수축과 이완.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러한 변화가 나타난 후로 나의 몸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운동을 시작했다. 매질을 빨아들이고 뱉는 두 행정으로 이루어진 운동. 빨아들인 매질에는 분류할 수 있는 화학적 정보가 있었고, 내쉬는 매질은 그대로 흩어 사라졌다. 내 바깥 속으로.
나는 세상을 맡을 수 있었다. 세상은 존재한 것이다. 그리고 구멍 또한. QED
이젠 좋은 것을 찾아 나의 안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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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구멍은 생각보다 유용했다. 그 구멍에는 받아들인 정보의 종류를 식별하는 것뿐이 아닌, 그 정보의 방향이나 세기 같은 것들도 식별할 수 있었으니까.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 위와 아래, 그리고 강함과 약함, 또렷함과 흐릿함. 이러한 정보들을 통해 나는 이 세계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여섯 가지 방위와 거리의 개념만 깨닫는다면, 세계는 충분히 3차원의 좌표계로 그려졌으니.
매질이 어떤 정보를 내 구멍에 전해주었다고 쳐 보자. 방향은 말 그대로 그 정보가 존재한 방향을 말했다. ‘오른쪽이면서 앞, 그리고 아래’ 이런 식으로.
다음으로 강도와 선명함은 그 정보의 위치와 크기를 말했다. 이것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는데, 대개 정보의 강도가 강할수록 정보의 대상은 가까이 있었지만, 비슷한 강도의 정보라도 그 위치가 크게 차이 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중요한 건 정보의 선명함이었다. 비슷한 강도의 정보더라도 정보에 잡스러운 다른 정보가 끼어 있다면, 선명하지 않다면, 그 정보가 더 멀리 위치한 것이었다.
바로 앞의 부스러기와 저 멀리의 덩어리는 그런 식으로 구분되었다.
오른쪽이면서 앞, 그리고 아래. 강도는 4.7 선명도는 13.2 정보의 종류는 ‘좋은 것’
세상을 맡을 수 있게 된 후로 나는 내 나쁜 것을 잠재울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의 방위와 거리와 같은 것들. 안타깝게도 그것의 구조까지 이해할 정도로 숙달되지는 않았지만, 어떤가? 그것은 좋은 것이었다.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좋은 것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것을 취하는 것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상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적어도 내가 이해한 물리법칙에 따르면 어떠한 작용도 없이 물체의 위상이 이동하는 일은 없었다. 나도 그 좋은 것도 모두 물체였으니 정말로 형편 좋은 흐름이 흘러오지 않는다면, 난 그것을 취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내겐 ‘조작’이 필요했다. 나의 방위를 오른쪽이면서 앞, 그리고 아래로 바꾸고 4.7의 강도 13.2의 선명도만큼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조작이.
하지만 어떻게?
나의 저주받을 정도로 부족한 정보는 내가 어떤 조작이 가능한지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기적 신호를 특정한 부위에 보내는 것뿐,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수축과 이완.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무지한 상태로 있고 싶지는 않았다. 작게는 맡을 수 있는 세계에 무언가 조작을 가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더 중요하게는 태어난 모든 순간에 울려대던 ‘나쁜 것’ 때문에. 나에겐 사고가 부족한 것이 전혀 아니었으니 부족한 정보만 습득해 낸다면 되었겠지.
수축과 이완.
내 몸에 전기적 신호를 보내고 나는 나의 모든 사고를 감각에 집중했다. 수축과 이완. 운동이 이루어지고 나의 구멍에서 세상의 어떠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수축과 이완.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 이것에 대한 정보는 결코 좋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느껴왔던 매질의 성질과 더 가까웠다. 어느 정보도 나타내지 않는 Null의 값. 이 정보는 내가 전기적 신호를 보낼 때마다 움직였고 그때마다 세상의 값을 가려갔다.
수축과 이완. 나쁜 것을 가리는 Null.
그것은 나의 정보이고 나의 조작이었다. Null이라는 값의 존재에 약간의 혼란이 있었으나,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나의 사고 체계에 편입할 수 있었다. 부제를 상상하는 건 언제나 초월을 상상하는 것보다 쉬운 법이다.
몇 번의 추가적인 조작을 거친 후. 나에게는 네 개의 주요한 부속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을 교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적절하게 나의 위치를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하지만 그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숙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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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향 앞, 그리고 아래. 강도는 7.4 선명도는 24 정보의 종류는 ‘좋은 것’
정방향 앞, 그리고 아래. 강도는 9.2. 선명도는 54 정보의 종류는 ‘좋은 것’
실패. 나쁜 것.
정방향 앞, 그리고 아래. 강도는 11.3 선명도는 77.8 정보의 종류는 ‘좋은 것’
나는 내 몸을 그 좋은 것이 위치한 곳까지 옮겼다. 그 경로 사이에 무언가 장애물이 있었던 탓에 고통 반응을 동반한 실패가 한 번 있었지만, 나의 내부 기관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좋은 것. 그것은 아주 가까이, 위상이 겹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서도 강도 12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정보를 잘 흘리는 물체도 아니었으니, 아마 내 부속지 안에 들어올 수 있는 크기였겠지. 나는 내 앞쪽의 부속지를 조작해 그것을 집었다. Null값이었던 정보가 좋은 것으로 채워졌고, 그 정보는 물리법칙을 거슬러 위로 떠올랐으니 나의 조작은 성공했다.
나는 그 좋은 것을 들어, 내 구멍이 있을 위치에 가져다 대었다. 정보의 선명도는 100에 가까워졌고 나쁜 것이 울리던 내 내부의 진동을 잊을 정도의 좋은 것이 내 내부를 뛰어놀았다.
나쁜 것.
나는 내 이론에 따라 내 구멍에 그 좋은 것을 집어넣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내가 집어 든 좋은 것이 나의 구멍보다 한참은 컸던 것이었다. 77.8의 선명도에서 11.3의 강도를 보인 좋은 것은 기껏해야 65의 선명도에 2.4의 강도밖에는 안 될 나의 구멍에는 들어갈 리가 없었겠지.
좋은 것. 하지만 Null인 것.
그래서 나는 그 좋은 것을 조각내 다시 나의 구멍으로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나 이는 그 전보다 더 큰 나쁜 것과 더 거친 수축과 이완으로 돌아올 뿐 전혀 좋은 것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 좋은 것의 조각은 그 구멍을 통해 밖으로 다시 튀어나왔고 얼마의 시간 동안 나쁜 것이 구멍 주위를 맴돌기까지 했으니.
내 가설이 틀렸던 걸까? 아니, 그건 아닐 터였다. 그 방법을 제외하면 나의 사고를 지속시킬 방법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나에게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상정하는 것보다는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상상하는 편이 옳겠지.
수정. 좋은 것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옳다. 그러나 나의 구멍은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을 할 뿐 그것의 근원을 취하는 기능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취하는 기능의 또 다른 구멍이 존재함이 옳다. 내가 그저 파멸할 존재로 태어났을 리 없으니.
나는 그 좋은 것을 집고 조금 무작위한 조작을 가했다. 나의 몸이 위치할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곳에 좋은 것을 가져다 박는 식으로. 만약 구멍이 있다면 ‘좋은 것’의 정보값이 급격히 Null값으로 변하겠지. 조금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어쩌겠나? 나는 나를 맡을 수 없었던 것을.
좋은 것. 좋은 것. 좋은 것… Null
찾았다! 좋은 것의 값이 Null값으로 바뀌는 ‘깜빡이는’ 지점. 그곳이 곧 나의 또 다른 구멍일 터였으니 나는 쥐었던 좋은 것을 놓아 그 속으로 좋은 것을 굴려 넣었다.
Null… 좋은 것! 그리고 단단함. 단단함?
이번에도, 구멍은 있었다. 그 좋은 것이 전부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전부 당연한 이치였지.
그 구멍 또한 나의 다른 구멍과 같이 화학적 정보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능력을 갖췄음에도 같은 기능까지는 가지지 못했다. 그 구멍은 오직 그 구멍 안에 놓인 물체만을 분석할 수 있었으니까. 강도 84 선명도 98의 정보가 구멍 곁에 오더라도 구멍과 물리적으로 만나지 않는 이상, 결코 그 정보를 수집할 수 없었단 말이다.
하여 그 구멍은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구멍은 화학적 정보뿐이 아니라 물리적 정보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유리점을 가졌다. 단단함. 무름. 무거움. 가벼움. 존재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나이지만, 그것은 내 사고를 뒤바꿀 만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솔직히, 주변의 모든 사물들을 입에 집어넣어 보고 싶을 정도로. 나는 이것을 맛보는 작업이라 불렀다.
무름. 나쁜 것.
하지만 좋은 것이 아닌 것을 그 구멍에 집어넣을 때마다 그 구멍은 몸서리치며 그것을 뱉어냈다. 즉슨, 주변 사물을 무작위로 맛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도 나쁜 것을 내 몸에 집어넣는 건 전혀 좋은 생각이 아니었기도 하고. 맛보기에 좋은 행동은 오직 내 맡는 구멍의 좋은 것을 맛보는 것뿐이었다.
적당히 가벼움. 좋은 것.
자, 이제 나는 정보를 찾을 수 있고, 찾은 정보를 조작할 수 있고, 그 정보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것은 사고하며, 정보를 마시고, 좋은 것을 취하는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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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활이라고 부를 만한 걸 영위하게 된 후로 나는 접하는 정보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맛들려 있었다. 이제껏 나를 둘러싼 메질은 ‘공기’ 내 작은 구멍은 ‘코’ 내 큰 구멍은 ‘입’ 이렇게.
어떤 좋은 것은 ‘먹이’였고 어떤 좋은 것은 ‘집’이었다. ‘먹이’란 입으로 들어가는 좋은 것을, ‘집’이란 내가 수면이라는 행동을 하는 공간을 말했다. 어떤 나쁜 것은 ‘배설물’이었고 어떤 나쁜 것은 ‘가시’였다. ‘배설물’이란 몸에서 만들어진 나쁜 것이 외부로 배출된 것을, ‘가시’는 찔린 부분에 나쁜 것이 생기는 어떠한 구조물을 말했다.
시간에도 이름이 있었다. 이 세계는 특정한 시간을 주기로 2가지 양상이 번갈아 나타났는데, 한쪽은 정적인 세계, 한쪽은 동적인 세계였다. 불행히도 나는 이것이 어떤 원리로 나뉘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좋은 것이 좋은 것에도 이유가 있던가? 시간은 두 가지 주기로 나뉘었고 그렇다면 이름은 반드시 붙을 수 있었다. ‘밤’과 ‘낮’. 나에겐 밤이라 이름 붙인 시간이 좋은 쪽이었다. 나의 세계는 궤적과 위치의 세계였으니 움직이는 것보다 움직이지 않는 세계가 더 선명했기 때문이다.
먹이와 배설물. 집과 가시. 밤과 낮.
이러한 것들은 전부 좋거나 나쁜 것들이었다. 좋은 것은 가까이해야 할 것들이고 나쁜 것은 멀리해야 할 것들. 나는 ‘집’에서 ‘배설물’을 치워 없앴다. ‘먹이’ 주위의 ‘가시’를 뜯어 없앴다. ‘밤’에 움직이고 ‘낮’에 잠들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었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었으니. 법칙의 단계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내가 이름을 붙인 것중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나’, ‘공기’, ‘물’, 그리고 ‘땅’. ‘나’는 나를 ‘공기’는 세계를 가득 채운 매질을 뜻했다. ‘물’은 어떨 때는 매질의 하나였다가, 어떨 때는 몸에 넣어야 할 것이었다가, 어떨 때는 내부에 나쁜 것을 만들어 내는 변덕스런 것이었다. 그리고 ‘땅’은… 아래를 향하는 힘을 받는, 새를 뺀 만물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하는 어떤 물리적인?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사고에서 땅은 존재해야만 했기에 나는 그 이름을 붙였다. ‘땅’.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과 Null.
나는 백 가지가 넘는 것들의 이름을 욀 수 있었다. 좋은 것. 나쁜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 이 세 가지로 모든 것을 분류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달랐다. 어떤 좋은 것은 포도의 향이 나고 어떤 나쁜 것은 벌레의 향이 났으니 말이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낮과 밤이 다르고 포도는 매달리고 새는 날고 가시 속에는 벌래가 기는 이 세계를.
내가 사고를 지속함은 역시 좋은 것에 속했다.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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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상상할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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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개똥에 비벼지는 냄새가 코를 찌르자. 나는 가을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즈음. 나는 나의 사고가 끝나감을 직감했다.
아마 이르다면 여름 즈음에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물에도 냄새가 담기는 계절에. 평생토록 실패해 오지 않았던 조작들에 실패가 쌓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손에서 그릇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바위에 미끄러져 구르거나, 섭식 활동에 문제가 생기는 식으로. 하지만 그때 나는 그 또한 일시적 불능 정도로, 잘못된 걸 먹었다거나 나쁜 것에 걸렸다거나 하는 일 때문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절에 와서는 그것이 일시적 불능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사고를 지속하고 있음은 좋은 것에 속했을지도 모른다. 따라 나는 수많은 먹이를 먹어 왔고 수많은 나쁜 것, 배고픔을 다스려 왔다. 나의 사고, 나의 의식, 나의 전기적 상호작용은 이제껏 차질 없이 이루어져 왔고 심지어는 수면이라는 행동을 취할 때에도 최소화되었을 뿐 중지된 적은 없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리고 Null.
단단함을 상상하듯이. 나는 나의 전기적 상호작용이 중지되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새가 쥐의 목을 비틀고 개가 화염에 불타면 모두 그런 식의 결말을 맞이했으니까.
그리고 Null
나는 나의 상태가 Null 값으로 수렴하는 것을, 곧 그렇게 될 것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나의 사고는 끝날 것이며. 나의 의식은 나의 전기적 상호작용은….
나는 알고 있다. 나 또한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을.
그야, 나에겐 그것을 상상할 만큼의 사고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Null에서도 나는 존재해야만 했다. 나는 ‘나’의 부존재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Null… 그리고?
끝. 나는 그것을 끝이라 이름 붙였다. 나의 사고가 정지된 후의 나. 예측은 명증할 수 있었지만, 상상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 그것은 땅과 비슷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는 이름이 느는 건 이제껏 전부 좋은 일뿐이라고 생각했건만. 이 끝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이름을 깨우침과 동시에 난 공포라는 감정을 뱉고 만 것이다. 그건 생물로 하여금 숨을 가쁘게 만들고 공격성을 내보이게 하는 나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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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었다. 그런 이름의 계절이었다. 이 계절에 세상이 스러지듯, 나조차 그저 스러지고 있었다. 나의 부속지 중 두 가지는 이미 작동을 멈추고 있었고, 나의 입은 무른 것이 아니라면 취할 수 없는 기관이 되어 있었다. ‘끝’까지는 이제 셀 수 있을만큼의 시간이 남았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좋은 것과 나쁜 것과 Null 그리고?
그렇게 끝에 다가섰음에도 나는 아직도 그 ‘끝’이 던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였다. 그것은 단단함을 상상하는 것보다 몇 곱절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쨌든 세상은 냄새였고 또 그 냄새는 바람이라는 매질의 흐름에 따라 흩어지고 섞이고 또 흘렀지만, 그럼에도 흐를 수 없는 정보가 있다는 것, 단단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만 가능한 상상이었겠지. 하지만,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냄새를 맡지 못하는 이가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큼 어려울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밤 내가 그 실마리를 찾았다면 믿겠는가? 흐르면서 흐르지 않고, 좋으면서 좋지 않은 것이 있다면 믿겠는가?
나는 그것을 물체 A라고 불렀다.
A를 찾아낸 것은 결국 겨울 속에서였다. 겨울이란 가장 어두운 계절. 바닥 위로, 세상 위로, 물체화된 물이 두텁게 쌓여 모든 정보가 가라앉은 계절이었지만, 역설적으로 하나의 정보만을 찾아내기에는 쉬운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Null의 다음을 상상하기 위해선 일단 Null의 안이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목이 말랐고, 때마침 비축해 두었던 물이 전부 얼어붙어 버렸기 때문에 나는 집을 나섰다. 집에서 선명도 14.7만큼 떨어진 거리에 강이 있었고, 그 강은 충분히 깊은 웅덩이였기 때문에 얼음을 걷어낸다면 물을 취할 수 있었겠지.
겨울의 시간은 항상 밤이었다. 낯에도 밤에도 그 아무것도 움직이기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항상 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걸음을 딛는 하나도 나는 조심해야 했다. 길을 외지 않았더라면 한 걸음도 떼지 못했을 정도로.
정보가 아닌 이름으로 나아갔다. 오른쪽 위로 (선명도) 56만큼의 거리는 나무가 있던 공간. 머리조심. 왼쪽 아래로 28.8만큼의 거리는 돌부리가 튀어나왔던 공간. 작은 산. 나는 고개를 숙였고 걸음의 규칙을 바꿨다.
실패, 나쁜 것.
그 다음은 앞으로 19.7만큼의 거리. 이름은 모놀리스. 나의 높이보다 더 높은 바위가 솟아 있는 장소였지만, 그보다 앞선 21.3에서 나는 이름 모를 무언가에 부딪혀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나의 모든 이름들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마치 내 사고가 태어났을 때처럼. 그날 세상은 다시 어두워졌고, 나의 조작은 없는 것이 되었다.
내 내부에서는 이름만 조금 다른 나쁜 것이 아우성치고 있었고, 나의 사고는 그때처럼 형편 좋은 무언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만 있었다.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때 물체 A가 있었다.
정지된 세계에서 A는 좋은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맡았던 첫 냄새처럼, 그것은 좋은 것의 정보값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함에 따르면 그것은 분명 좋은 것일 터였다.
쓰러진 나의 구멍에 내려앉는, 과일이지만 과일보다 어린 냄새. 온통이 Null인 세계이지만 비롯이 하나 존재하는 야릇한 정보. 좋은 것.
나의 결핍은 분명 목마름이었을 테지만 나는 그것을 향해, 그것을 취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것의 방위는 면이었고, 그것의 거리는 6 만큼의 시간이었다.
다리는 넘어졌을 때 심각한 부상이 발생했던 것인지 쓸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하여 나는 이동할 때 사용하지 않는 부속지를 사용해 이동해야만 했다.
수축과 이완. 회전과 역회전.
나는 고체 속을 헤엄쳤고 나쁜 것을 끌어안았다. 나쁜 것에 기대어 갈수록 끝을 향하게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그런 것보다는 그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쁜 것과 Null 그리고 좋은 것?
나는 좋은 것을 움켜쥐었고, 그대로 그것을 나의 입에 집어넣었다.
알칼로이드. 덜 익은 감과 먹을 수 없는 식물. 과일이 아닌 것. 쓴맛. 나쁜 것.
하지만 나의 입은 그것을 나의 내부로 밀어넣지 못했다. 나의 입은 이것의 정보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A에게는 취해야 할 열량도 맛도 없었고, 윤곽선은 분명히 느껴졌지만 연약하며, 커다랗지만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뱉어 다시금 그것의 정보를 살폈다. 이번에는 다시 작은 구멍으로.
좋은 것. 먹이와 비슷한 것. 하지만 결코 같지는 않은 것. 즉, 좋지만은 않은 것.
역시, 나는 이것의 정보를 나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좋은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조차 나는 할 수 없었다.
공포와 갈증.
계절에 잠기어, 나에게는 정말 잠깐이라는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할 아무런 조작도 상상도 불가능했으며, 잠깐 뒤라면 끝나고 난 후일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을 그때까지도 나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포와 갈증을 느꼈다.
어떤 사고를 해야 깨달을 수 있을까? 무엇을 믿어야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있는 것. 밤이면서 낯인 것. 여름이면서 겨울인 것. 흐르지만 흐르지 않은 것. 나쁘지만 나쁘지 않은 것. 좋지만 좋지 않은 것…. 내 구멍에 A가 스치웠다.
그건 꽃이었다. 꽃과 나. 이제 난 말할 수 있다. 내가 꽃 한 송이를 쥐었다고. 이제 난 상상할 수 있다. 끝 그 다음에 있는 것을
좋은 것과 나쁜 것, Null 그리고 꽃.
그건 좋은 것. 동시에 좋지만은 아닌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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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뒤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만약 있다면 그곳은 꽃으로 만든 세상일 것이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