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서울 2063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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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깨어난 지원은 가장 먼저 조 씨에게 따뜻한 커피를 받았다. 조 씨가 말했다.


“파트마가 말하길, 꽤나 깊은 트라우마라서 잠깐 정신적 충격을 받은 거라고 했어. 그거라도 마시면서 내 이야기 좀 들어줘.”


“무슨 이야기인데?”


“신라 호텔은 일단 평범한 고급 호텔이고, 우리 같은 용병이라도 돈만 있으면 묵을 수 있는 곳이야. 하지만 크리스마스 기간은 말이 다르지. 이준형이라는 삼성의 황태자, 그리고 황제가 오는 날에는 신원 확인을 군부대마냥 철저하게 하니까. 우리 같은 용병들은 못 들어가. 그리고 어찌어찌 잘 들어간다 해도 110층 스위트룸에 침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스위트룸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있긴 한데, 지금 호텔 70층이 공사 중이라 70층부터 운행하고 허가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 당연히 회장은 비행정으로 오겠지만. 그런데, 이 엘리베이터의 보안은 호텔 75층 관리실에서 책임지고 있거든? 이 관리실을 해킹해버릴 거야.”


지원은 커피를 내려놓고 담배를 물었다.


“호오~ 대담한걸? 스파이 영화 같은 발상이야. 그래서, 관리실 해킹은 어떻게 할 건데? 레나가?”


“그래주면 고맙겠지만, 신라 호텔의 방화벽은 해커 한 명이 뚫을 수준이 아니야. 옛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AI 바이러스 할아버지가 와도 못 뚫어. 하지만, 물리적인 방식을 이용하면 가능하지.”


조 씨는 빔 프로젝트를 키더니 컴퓨터에 데이터 카드를 집어넣었다. 벽에 거미 같이 생긴 로봇이 나타나서는 온 벽을 기어다녔다.


“징그럽게도 생겼네. 저 로봇은 뭐야?”


“정보원한테 얻은 거야. 이름은 ‘SHR-2077’. 고려그룹의 자회사가 만든 프로토타입 해킹 로봇이지. 스펙에는 10dB 미만의 소음을 발생시키는 은밀함과 광학위장, 그리고 벽과 천장을 재질 상관없이 걸을 수 있다고 되어 있어. 잠입과 해킹에는 제격이지.”


“그… 기계 스펙은 잘 알았어. 그런데 그걸 어떻게 구할 거야? 아무리 돈에 눈이 먼 기업이라고 해도 우리한테 그런 물건을 팔아줄 리가 없잖아. 훔친다는 것도 힘들어 보이고.”


“누가 그냥 훔친다고 했어? 기업에게서 훔친 갱단에게서 훔친 기업에게서 훔칠거야.”


조 씨는 다른 차트를 보여주었다.


“2주일 전 이 프로토타입 로봇을 조선인민파한테 빼앗겼어. 물론 그놈들이 알고 훔친 건 아니고, 조선인민파 하위의 2사단, 그 밑에 5연대 쪽이 기업 물건이라고 트럭 채로 훔쳤는데 그 안에 있었대. 그걸 고려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가 털어버린거지. 고려그룹은 계열사 사이에도 경쟁이 심하다고 들었거든. 그러니 우리는 그 계열사의 창고를 털면 되는거지.”


“또 평양에 가서?”


“맞아. 겸사겸사 잠입용 가짜 신분도 만들어야 하고.”


“그 덩치 큰 양반 일이지?”


“평양 쪽 일거리가 있더라고. 말해줄 건 이게 끝이야. 출발은 다음주, 그러니까 12월 11일이 되겠지.”


“여유를 많이 두네?”


“위험한 일이니까. 준비할 게 많지.”


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LAD를 떠나려다, 다시 물었다.


“그러고보니 파트마 씨는?”


“집에 갔어. 정말로.”


지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조 씨, 제3자인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말이야. 그냥 파트마 씨랑 결혼해.”


조 씨는 당황했는지 놀란 얼굴로 지원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말하고 떠드는 걸 봤어. 당신도 파트마 씨도 세상 편해보이더라. 나도 결혼은 1번 밖에 안 한 몸이지만, 사별한지 18년이면… 죽은 당신의 아내도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아.”


조 씨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한번 생각해 볼 게. 잘가.”


“그래, 또 무책임하게 굴지 말고.”


차에 탄 지원은 곧바로 집에 돌아가려다 문득 방향을 꺾어 양천구 쪽으로 향했다. 잿빛 하늘이 당장이라도 겨울비가 쏟아질 듯 칙칙해더니 오래지 않아 비가 내렸다. 지원의 차는 오래된 아파트 주차장에 멈춰섰고. 차에서 내린 그녀는 당장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까지 올라갔다. 12층 1204호, 페인트가 벗겨진 틈새로 붉은 녹이 슨 문의 구식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자 특유의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을 당긴 지원은 정겨우면서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냄새를 맡았다. 집 안은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사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지원이 입을 열기 전까진.


“아버지, 저 왔어요.”


그제야 방 안쪽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얼굴 곳곳에 주름이 진 회색 머리칼의 노인은 지원과 똑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니?”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오는 거지, 연락하고 와야 하나요?”


지원은 거실과 주방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가족사진과, 명훈이 함께 있는 최신 가족사진이 모두 걸려 있는 가운데 탁자 위에는 한 여인이 화사하게 웃은 채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 또… 도지신 거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금도 살짝 왔었단다.”


그는 알약을 삼켰다.


“다리는 좀 괜찮아요?”


“아직 그때 최서방이 달아 준 그걸 쓰고 있단다. 사람 많은 곳에 다니질 못하니 무슨 쓸모가 있겠냐만은… 그래, 최서방은 잘 있지?”


지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네. 잘 있어요. 일이 바빠서 집에도 자주 못 들어오지만요.”


“그렇게 예의 바르던 녀석이 연락 한 번 없는 걸 보면 보통 바쁜 게 아닌 모양이구나.”


지원의 아버지는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미안하구나. 좀 쉬어야겠어… 편히 있다 가렴.”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가자, 지원은 거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 안 훈장을 바라보며 옛 생각에 잠겼다. 갓 남편과 결혼한 그때로…

6년 전, 집에 온 명훈은 거실에 걸린 훈장을 바라보았다.


“충무무공훈장이네. 장인어른 물건이지?”


“응. 3차 세계 대전 때 받은 거라고 했어.”


“멋진 분이시네, 장인어른은.”


“글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게 여길지도 모르지. 그런데 적어도 나랑 아버지한테는 아니야. 아버지는 운전을 못하셔, 운전대만 잡으면 발작이 일어나서. 또, 아버지는 큰소리가 나면 무너져버려. 그러니 갱들이 돌아다니는 곳도 못 가는 거지. 어렸을 땐 이런 아버지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어. 거의 항상 집에만 있고, 보이는 건 자거나 BDV를 쓰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물론, 그 이유를 알고 난 이후로는… 나도 아버지를 이해했어. 언젠가 개념 없는 기자가 전쟁 때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집요하게 아버지를 쫓아다니더라고, 아버지는 계속 피했는데, 그 옆에 카메라맨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이밀자마자 공황이 도져서는 저 소총으로 그 망할 기자를 때려 눕혀버렸어. 아마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 기자는 죽었을 거야.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랬어.”


명훈은 아무 말도 없이 훈장을 바라만 보았다.


“장인어른은… 잘 이겨오신거야. 30년이 다 되가도록 지금까지 열심히. 총은 치우자. 사고가 날지도 모르니까.”


“응. 아버지랑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안정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서 아쉽네.”


다시 현제. 지원은 방 한쪽에 세워진 아버지의 소총을 바라보았다. 올 때마다 지원이 회수했지만, 뒤돌아서면 아버지는 또 어디선가 3차 세계 대전 시절의 소총을 구한 상태였다. 지원은 낡은 K2 소총을 들고 아버지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남긴 뒤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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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의 아버지: 2000년생, 군복무 중에 3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전쟁 초기 위관급 장교들이 대거 사망하며 어쩌다보니 현지임관하고 말았다. 훈장은 연변 공격 당시 받은 것이고, 전쟁 말기 지린 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전쟁이 끝난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친구를 잃은 기억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