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장,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용납 못하겠어요. "

 우중충한 11월 중순.


 커피와 함께하는 회색빛 오후 3시.
 단장실의 정적을 깨부순 것은 다급히 들어온 부단장 엘리제였다.

 덜커덕 하고, 제법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단장실 안으로 엘리제가 들어온다. 외출용 로브를 걸친 걸로 봐서는 금방 어딘가에 다녀온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에 빨간색 단풍을 묻히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제는 머리에 내려앉은 단풍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다급한 얼굴을 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까 품 안에 기름이 흥건한 종이 봉투를 안고 있지 뭔가? 얼마 가지 못해서 엘리제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광을 낸 흑갈색 테이블이 기름기에 더럽혀지는 순간이었다. 엘리제는 그것을 본 체 만 체 마저 말을 이어갔다.

" 가을 디저트라고 한다면 당연히 붕어빵이죠. 이건 당연한 섭리라구요! 세상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결코 바뀌지 않을 진실! 그런데 단장님은 붕어빵 대신 골랐다는 게 고작 단팥빵이라니요, 성화신께서 아시면 길길이 날뛸 일이 분명해요, 이건! "

 그러든지 말든지. 너 잘났으니 계속 이야기해라. 듣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소릴 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 표정이 말한 모양이다.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 엘리제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제 본인으로써는 제법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상대방인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이 본인으로써는 꼴 받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어떡할까. 나는 그런 헛소리를 들어 줄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아닌 걸.

" 지금이 커피 따위나 마실 때에요? 이건 중대 사안이라고요! "

 이윽고 엘리제가 소리쳤다. 어찌나 목소리가 우렁찼던지, 단장실 밖에서 지나가던 다른 단원들이 열린 문 너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중대사안 이라는 말이 가장 크게 들렸을 것이니 안 엿듣고는 못 참겠지. 대신 나는 돌아가라며 엘리제 몰래 작게나마 손짓을 해주었다.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뜨여진 것은 그 즈음부터였다.


" 참.. 부단장이란 년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중대사안이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고작 단팥빵 말고 붕어빵을 두둔해달라는 것이라니. 아무래도 난 이번 기수 부하농사는 그른 것 같구만. "

 그러자 엘리제의 표정이 더욱이 우악스럽게 일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폭언에 그만 감정이 격해진 것이다.

" 뭐, 뭐라고요? 단장님. 그게 지금 저한테 할 말이에요? "
" 그래, 그렇고말고. 뇌수는 착즙기로 짜버려서 대신 채워넣은 것이 팥고물 갈아넣은 기름인 년아. 그 어떤 미친 년이 붕어빵 따위를 중대 사안이니 뭐니, 성화께서 길길이 날뛰느니 어쩌니 하느냐? 지 취향 하나 존중 못해줬다고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꼬라지가 참 보기 흐뭇하구나. "
" 이, 이, 이이익! 악! 진짜,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

 분명 계급만 없었다면 엘리제는 진작에 나를 패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얼굴을 보니 딱 그렇다. 평소에 뇌가 안 돌아가서 자랑할 거라곤 무력과 얼굴 뿐인 년이, 꼭 오크한테 흠씬 얻어맞고 억울해진 트롤마냥 마구잡이로 구겨진 것이다. 이제 피부만 딱 파란색이면 정말로 트롤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아, 엘리제. 내가 널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 이래서 머리 노란 짐승은 지능이 떨어져서 요직에 앉히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란 어째서 감정 따위로 이 정도까지 추해질 수 있는가! 지극히도 통탄스러운 사실에 짙은 한숨을 내뱉는다. 재차 커피를 홀짝이고서 말했다.

" 아가리에 바이올린을 달고 사는 년아. 평소 참새같던 네 년 목소리가 지금은 어째 잘못 연주한 바이올린 소리 같구나. 듣기 싫으니 냉큼 썩 꺼지도록. "

 그리고 말을 마쳤을 무렵이다. 엘리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걸어나간 뒤였다. 그녀가 있던 자리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엘리제, 그녀가 들고 온 붕어빵만이 테이블 앞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화가 치밀어오르다 못해 붕어빵을 챙겨가는 것 조차 까먹은 모양이지. 하지만 어쩌겠나? 단장실에 놓고 갔으면 이제부터 그건 내 물건인 것을.

" ... 호로록. "

 어쨌거나. 마저 잔을 기울이기로 했다.
 반도 채 남지 않은 커피를 모조리 입술 너머로 흘려보낸다.
 조금 미적지근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은 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