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얀 연기가 나풀거리며 올라가고 있다. 가로등의 빛과 어우러지며 꿈결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기는 흩어지고, 그곳엔 빛줄기만 남아있다. 가역반응이다. 그 빛이 너무 부신걸까, 다시 한 번 뿌연 숨결을 뱉어낸다. 맨솔 성분이 첨가된 담배여서 - 맨솔이든 맨톨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이 있겠는가? - 목이 아려왔다. 허나 보라. 내 눈이 그것을 좋다 하지 않는가.


 점점 짧아져가는 담배. 그것을 쥐고 있는 손가락이 뜨거워진다. 마지막 한 숨을 내뱉고 남은 그것을 하수구에 버린다. 언젠가 비가 온다면, 흘러내려가겠지. 


 천사의 몫이라는 말이 있다. 위스키를 숙성할 때 자연적으로 증발하는 그것을 보고선 천사가 가져간다 생각해 붙인 말이다. 이미 흩어져버리고 없는, 저 얄미운 연기는 내 머리에 들어와 대뇌피질을 마구 헤집어놓고는 나간다. 위스키와 - 비단 위스키만은 아니겠지만, 이것 또한 상관 있겠는가? - 같다. 내가 잃는 것은 건강이고, 얻는 것은 휘발성의 감각 따위들.


 천사보단 악마에 가깝다. 쾌락을 인질삼아 몸을 부숴간다. 가증스런 것들. 아니. 애시당초 그것들이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이던가? 회의적이다. 언뜻, 이대로 죽는 것도 나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죽음 그 자체는 두렵지 않다. 오히려 포근한 느낌까지 주는게 바로 그것이다. 다만 도달하는데 동반되는 고통, 그것이 유일한 억제 장치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설계되어 있다. 번식이라는 모든 생명체의 목표, 그것을 이루기 전까진 죽을 수 없다. 새끼가 커서 자립이 가능할 때 까지 죽을 수 없다. 새끼가 장성하여 자손을 나을 때 까지 죽을 수 없다. 결국 몸을 구성하는 장치들이 닳아 없어질 때에서야 죽어 편안해진다.


 운 좋게도 이성이라는 것을 얻은 인간은 후대의 행복보단 본인의 행복을 우선시하게 됐지만, 선캄브리아 시대부터 이어져온 질리도록, 질리게도 질리도록 기나긴 악폐습은 아직도 몸에 배어 있다.


 전화기가 울리며 이런 상념은 스러진다.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