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서울 2063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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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각도호텔, 지원은 객실 냉장고에 비치된 랭천사이다를 마시며 조 씨에게 물었다.


“굳이 통화로 안 하고 객실까지 부른 이유가 있어?”


조 씨는 잠시 말없이 발코니 밖의 평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마선형한테 연락이 왔어. 그것도 편지로 말이야.”


조 씨는 편지를 건넸다.


“읽어봐.”


펜으로 적은 듯한 편지는 글씨가 지나가던 사람이 주워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또박또박 써져 있어 마치 로봇이 쓴 것만 같았다.


‘평양에 온 조성환 동무, 내가 마련한 호텔은 마음에 드는가? 다름이 아니라 성환 동무와 지원 동무를 따로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남기네. 오늘 18시에 저녁 식사를 각자 방으로 보내줄 테니 챙겨서 먹고, 19시 30분까지 70층 스위트룸으로 오게. 늦지 말길 바라네. 마선형.’


지원이 말했다.


“우리 둘만?”


“그래. 마선형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자기가 머물고 있는 스위트룸에 우리만 불렀어. 뭘 원하는 건지, 뭐 때문에 부르는 건지, 모두 알 수 없어. 혹시 몰라 레나랑 알리사한테 이것저것 찾아달라고 부탁했는데, 마선형은 오늘 낮, 그러니까 우리가 막 평양에 도착했을 때 스위트룸에 자리를 잡고 우리 방을 예약했어.”


“그렇다는 건 우리를 감시하고 있던 건가?”


“아마 평양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우릴 추적하고 있었겠지. 또 뭔가 시키려는 걸까?”


“그건 만나보면 알겠지.”


지원이 방을 나가려던 그때, 조 씨가 그녀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미세스 리, 이 안에선 말 조심해. 뭔가 느낌이 안 좋아, ‘1984’ 같은 그런 기분이야.”


“주의할 게.”


몇 시간 후, 지원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조 씨와 만났다. 조 씨가 물었다.


“식사 잘 했어?”


“당연하지. 오랜만에 콩고기나 배양육 아닌 진짜 소고기를 먹었는데. 누가 사준 소고기는 재작년 결혼기념일 이후 처음이야.”


“가볼까?”


“그래.”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둘은 무거운 발걸음을 때며 엘리베이터에 타 70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특유의 전자음을 내며 위로 상승하자, 지원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뒤쪽을 바라보았다. 투명 유리 너머로 평양 북부의 불야성을 지나 저 멀리 고려그룹의 본사 건물이 특유의 삼각뿔 형태를 웅장하게 빛내고 있었다.


“저기 고려그룹 자리가 전쟁 전에 호텔이었다며?”


“그래, 저거랑 똑같이 생긴 호텔이었지. 전쟁 중에 폭격으로 때려 부쉈는데, 고려그룹이 똑같이 지은거야.”


“옛날부터 느낀건데, 저기에 LED 조명까지 달아놓으니까 뭐랄까… 마왕성 같다고 해야 하나?”


“하는 짓거리를 보면 마왕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곧 70층 도착이야.”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조용히 열리자 둘은 70층에 내렸다. 다른 층과 비슷하게 복도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지만 한 눈에 보아도 다른 층보다 훨씬 고급 카펫이었고, 조명은 평범한 LED가 아니라 정말 촛불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오른쪽에는 비상계단이 있었고, 정면에는 이 층의 유일한 문이 있어 스위트룸이 여기임을 알리고 있었다. 

조 씨가 앞장서서 문에 노크를 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문이 조용히 열렸다. 넓은 방은 전체적으로 조명이 다 꺼져 있었지만, 저 멀리서 번쩍이는 LED들이 방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곧바로 지난번에 보았던 젊은 청년이 나타나 둘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마선형 동지께선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청년의 인도를 따라 모퉁이를 돈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평양 북부를 바라보는 발코니에는 스위트룸 이용자를 위한 수영장-겨울이라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지 김이 폴폴 나고 있었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마션형은 이 수영장 안에서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린 채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이 덤덤하게 말했다.


“마선형 동지, 손님이 왔습니다.”


마선형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왔구만, 기래. 잠시만 기다리라. 유 동무, 옷 가져오라우.”


그녀가 유 동무라 부른 청년은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쏜살같이 실내로 들어가더니 수건과 옷을 챙겨 나타났다. 청년이 수건을 들자 마선형은 천천히 지원에게 등을 보인 채 수영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등의 양쪽 광배근 위치에 사이버웨어 자국이 세로로 길게 나 있었고, 나이에 안 어울리게 탱탱한 엉덩이는 물에 젖어 반짝였다. 청년은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의 온 몸을, 심지어 말하기 은밀한 곳까지 꼼꼼하게 닦아주더니 곧바로 팬티를 펼쳤다. 

마선형이 다리를 넣어 팬티를 입자 짧은 바지를, 바지를 입자 스포츠 브래지어를 입히더니 붉은 재킷을 끝으로 그는 다시 물러났다. 마선형은 자신과 비슷한 키인 청년의 턱을 잡더니 거칠게 키스를 하며 남은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가볍게 만지다가 이내 입을 땠다.


“수고했다. 방에 가서 쉬고 있으라.”


청년이 후다닥 사라지자, 마선형은 옆으로 조금 걷다가 이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붉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조 동무, 이 동무, 오랜만이야.”


조 씨가 말했다.


“무슨 일로 불렀지?”


“그보다, 우리를 왜 감시하고 있던 거지?”


“감시라… 너희는 우리가 아니더라도 감시받고 있었디.”


“무슨 소리지?”


마선형은 저 멀리 고려그룹 본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평양 안의 모든 건 고려그룹이 감시하고 있다. 평양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범죄 경력은 어떻게 되는지, 가족은 얼마나 있고 얼마를 벌며 취미는 뭔지. 아마 동무들이 랭천사이다에서 무언가를 가져갔다는 것도 알고 있을거다.”


조 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럴리가, 삼성도 대한민국 국민들을 그런 식으로 감시하진 않아. 그런데 고려그룹이 평양광역시 400만 시민을 전부 감시하고 있다고? 북한이나 할 법한 발상을…”


“하고 있지. 평양 안에서 고려그룹은 옛 수령 동지만큼이나 절대적이라. 나야 아바이가 그 돼지 새끼 바짓가랑이에 끝까지 매달려 있다가 죽었다는 거 빼고는 그 시절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동무들을 여기까지 부른 건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만은 아니지.”


마선형은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데이터 카드를 꺼내 마이크 같이 생긴 소형 녹음기에 연결했다. 잠깐 잡음이 들리더니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착했어?”


지원이 말했다.


“이 목소리! 그 녀석이잖아!”


곧바로 더욱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어떤 의뢰인지 설명해 줘.”


조 씨는 당황한 듯 한겨울에 땀을 훔쳤다.


“말도 안 돼. 내 목소리야. 그것도 오늘 아침 평양역에서 했던 대화잖아!”


“사실 거창하게 말은 했지만 별거 아닌 의뢰야. 얼마 전에 서울 구경하러 온 아줌마가 편의점에서 직원한테 갑질을 했는데, 뭔 짓을 했는지 직원이 자살했어. 이제 갓 어른이 된 꽃다운 청년이었지. 일반적인 싸움이었다면 적당히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하필 이 아줌마는 고려풍산 간부란 말이지.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처벌도 못해. 그래서 부모가 물어물어 나한테까지 와서 그 여자를 끝장내 달라고 했어. 참고로 그 여자는 고려풍산에서 잠시 ‘휴가’를 줘서 집에 있지. 위치는 첨부했어. 아, 시체까지 처분해주면 고마울거야.”


지원이 불쾌하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우리 대화를 모두 도청하고 있던 건가?”


“도청? 하!”


마선형은 코웃음을 치더니 특유의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말이 반대로 됐어. 동무들을 도청하는 게 아니라, 도청으로부터 지켜준 거라우.”


조 씨가 물었다.


“지킨다고?”


“평양의 모든 통화는 고려그룹이 듣고 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여유롭게 고려그룹 산하 자회사의 간부를 죽이겠다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죽으려고 광고를 하고 있었구만 기래. 삘리프 깁슨 동무가 동무들의 통화가 유출되지 않도록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겠나?”

둘은 아무 말도 없이 마선형을 지켜보았다.


“내가 동무들을 부른 이유 역시 같다. 무작정 그 여자를 죽이려 했다간 분명 고려그룹에게 당할 거니까. 그러니 이 마선형이 도와주겠다.”


지원은 아직까지 불신에 찬 말투로 물었다.


“돕는다고? 어떻게?”


“간단하지. 도청 방어 기능이 장착된 자동차 한 대면 되지 않겠나?”


지원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조 씨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마선형 동지. 그거면 충분하죠.”


마선형은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방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럼 됐겠지. 이제 돌아가라우. 사생활까지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지원이 불만을 표했다.


“고려그룹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동네에서, 고려그룹 쪽 간부를 죽이는데, 지원받는 게 고작 자동차 하나? 수치타산이 안 맞는 것 같은데.”


“나도 지원받는다면 더 받고 싶어. 하지만 자동차 이상 지원을 받는다면 분명 무언가를 더 요구하겠지. 지난번에 삼수군까지 가서 뭘 해야 했던 것처럼.”


지원은 바로 수긍했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그들의 숙소가 있는 25층에서 멈추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둘은 알리사가 벽에 기댄 채 허공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지원이 물었다.


“여기서 뭐해? 레나는?”


잠깐 까마득한 침묵이 흘렀다. 알리사는 특유의 초점 없는 보라색 눈동자로 지원을 바라보았다.


“방에서 쉬고 있어요.”


“너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냥,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요.”


“느낌?”


“뭐랄까… 감시받고 있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지원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지원은 잠시 조 씨를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스캔 해봤어?”


“해봤지만 이렇다 할 건 없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요? 마치 이 주변의 모든 통신망이 저희를 감시하는 기분이예요.”


지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술을 가볍게 물다가 입을 열었다.


“멀리 나와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거겠지. 내일 바로 의뢰를 수행해야 하니까 이제 들어가서 쉬어.”


“네.”


알리사는 여전히 의구심을 풀지 못한 얼굴이었다. 알리사가 방에 들어가자, 지원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도 그런 걸까?”


“모르지. 아까 미세스 리가 말한 것처럼, 우리도 이제 쉬자고. 그런 건 잠시 잊고 말이야.”


지원이 막 객실에 들어온 순간, 전화가 울렸다. 수화의 이름이 뜨자 지원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나야. 빨리 말해주려 했는데 시간이 안 났어. 그게… 혁이 상태가 많이 좋아졌거든. 모래 즈음에 퇴원할 거야.”


지원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거 다행이네. 너는? 어떻게 지냈어?”


“나야 잘 지내지. 아쉽게도 특진이라던가 포상 같은 건 없었지만, 삼성 녀석들이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사건 피해자들의 치료비를 대폭 삭감해줬어. 다행히 내 선에서 낼 수 있겠더라고. 아, 너무 내 이야기만 했네. 넌 어떻게 지냈어?”


“항상 똑같지. 의뢰받고, 총질하고. 지금 평양에 와 있어. 일 때문에.”


“항상 고생이 많네. 사실 통화한게 혁이 때문만은 아니고…”


지원은 수화가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소리를 똑바로 들을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수화가 입을 열었다.


“주말 즈음에… 영화라도 같이 보자고. 존 윅 리마스터링 BDV가 있거든.”


“좋지. 어차피 곧 돌아올 거니까. 그때 연락 줘.”


“그래, 그때 보자.”


통화가 끊기자, 지원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짙은 회색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원은 정말 오랜만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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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40대다/작품 배경이 근미래라 현실 기준 2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