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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독하게 제조했나? 한 병만 마시고 쓰러졌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목소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다가….

"설마 한 병 마시고 기절할 줄이야. 의외로 허약 체질 일지도?"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귀를 간지럼 태웠다. 귀여운 소녀의 목소리가. 얼굴을 보고 싶게 할 정도로. 머리 뒤통수로 느껴지는 포근함과 미약한 맥박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일단 아카데미에서 배운 대로 약을 제조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아마도."

소녀의 목소리 덕분인가? 조금씩 의식이 회복되고 있었다. 감은 눈동자가 서서히 떠질 정도로.

"아-일어났어?"

내 눈앞에 소녀가, 깨어난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등까지 내려온 핑크색의 스트레이트 머릿결의 앰버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내 이마를 이루어 만지고 있었다.

"혹시 열나는 거라도 없어? 피곤하면 더 자는 것이."

퍼억!

양손으로 소녀를 밀어낸 뒤, 뒤로 물러갔다. 그녀에게서 최대한 떨어지기 위해, 등을 벽에 최대한 붙었다.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저 여자애다. 나한테 이상한 약을 먹이고 기절 시켜버린. 분명히 무언가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기절한 틈을 타서 수술용 메스로 배를 가른 뒤, 내 몸속에 있는 간, 내장, 심장 등을 다 빼간 뒤 장기 매매자들에게 팔아먹고….

자기 외모로 유혹해서 애인 간을 뜯어가는 악질 범죄자 여고생인 게 확실하다. 궁금한 스토리 Why 에서 자주 볼수 있는.

"저기 일단 진정하고! 나는 너를 해하려고 한 게 아니니까!"
"그러시겠지! 나한테 약 먹인 뒤 내가 기절한 틈을 타서-"

한 손으로 내 입을 가렸다. 무언가의 위화감이 들었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히….

"이젠 진정돼? 내 말 알아들어?"

소녀의 말을 알아듣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방금 나한테 진정되냐고 물어보았지? 알아듣냐고도 했고."
"맞았어! 맞았어! 딱 알아들었어!"

소녀는 가방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었다. 금색으로 하프와 배가 그려진, 파란색 표지의 책을.

"이것도 혹시 읽을 수 있어?"

차르륵-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언어였다. 그것은 한글도, A,B,C,D 같은 알파벳도 아니었다. 하지만 보였었다. 지나가는 페이지마다 적힌, 문장과 단어들이. 마치 어릴 적부터 접해 왔다는 듯, 대충 쓱-훑어보기만 해도 뜻과 의미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5살도 알 수 있는 오케아나 건국 역사? 라고 책 표지에 적혀 있었지?"
"역시 읽을 수 있구나!"

반짝이는 앰버색 눈동자와 함께, 내 얼굴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서로의 얼굴이 맞댈 정도의 거리로. 어떠한 악의도 없이, 해 맑게 웃으면서 바싹 다가오니, 왠지 모를 공포감이 생겨났다. 호기심 가득 찬, 어린아이와 같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니 더욱더.

그것을 떠나서, 가까이서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쁘긴 하네…?'

평소에 머리 관리를 했는지, 핑크색 머리카락이 빛을 내고 있었다. 거울처럼 내 얼굴이 비치는 앰버색 눈동자와 분홍색과 붉은색의 입술을 가진 얼굴이 다가올수록 향기로운 향이 내 코를 찔렀다.

"이렇게 한 번에 오케아나어를 읽고, 말하고 들을 수 있다니! 이번 실험은 대성공이야!"
"뭘 어떻게 했길래알아들을 수  있게 된 거야? 단순히 듣는 거로 끝나지 않고 말할 수도, 읽을 수도 있게 되었고?"
"Lingua."

소녀의 입에서 무언가의 단어를 말함과 동시에, 그녀의 손은 푸른색 빛으로 감싸졌다. 아까 기절 하기 전 포션 안에 들어갔었던 비슷한 색과 빛이.

"이렇게 내 머릿속에 있던 오케아나 언어를 집어 넣은 마력을 포션에다 넣은 거야. 그래서 마신 순간, 단어들과 발음 하는 법이 그대로 머릿속으로 들어간 것이지. 마치 물에 탄 쥬스 원액이 몸속으로 들어간거와 비슷하다랄까."
"그래서 머리가 아파진 거야? 봤겠지만 마신 뒤 쓰러질 정도였는데."
"엄…. 두통은 말이야…. 그게…. 나도 예상 못한 부분이야."

방금 예상 못한 부분이라고 했나? 쟤 눈동자가 위로 올라간거 같기도 하고. 볼을 긁으면서.

"원래는 그냥 머리가 띵-하는 거로 끝날 텐데, 너 같은 경우는 두통이 몰려온 거야. 그것도 기절할 정도로 말이야. 안에 마법을 넣어서 그런가…."
"그러니까 안전성을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한테 포션을 마시게 한 거네. 뒷일은 예상 못 하고."
"그래서 내가 먼저 마셔본거잖아. 아무렇지도 않아서 괜찮다 생각했지."
"그건 네가 한 모금만 하지 마셔서 그런거고."

저 여자애 무슨 매드 사이언티스트인가? 처음 보는 남자애에게 이상한 약을 먹이고. 안전성을 검증하지 않은 약을 말이야. 뭔가 나를 임상시험용으로 써먹은 듯한 기분이 들고.
위험한 여자애다-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나한테 말해주고 있었다. 악의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 나름대로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는 것을.

그래도….

"나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두통이 몰려왔고. 그 뒤 의식도 흐려지기 시작해서 죽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미안!"

말해줄 건 말해야 할 거 같았다. 내가 겪었던 기분과 느낌을 설명해 주니, 소녀는 고개를 숙인 뒤 사과하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거 같아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뒷일을 전혀 생각 못 했어.. 내가 설명을 자세히 해야 했는데."
“괜찮아. 도와주려고 한 건 나도 아니까.”

두통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면서 내 입에서 거대한 숨을 내뱉었다. 긴장이 좀 풀려서인지 피로함이 몰려왔다.

“너나 나나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잖아. 서로 말이 안 통하고. 너도 절대 악의로 그런것은 아니었고.”

적어도 얘는 양심이란 것이 있네. 여기서 그래도 무사하면 된 거 아니야? 죽지 않았으면 된 거지! 라는 부류의 대답을 했다면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 부류의 애들이랑 엮이는 것은 이젠 싫증이 나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상황을 정리하자."

이쯤에서 슬슬 화제를 돌려야겠다. 괜히 도와주려고 하는 애한테 화풀이하는 기분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판인데.

"네가 말한 그 오케아나 언어를 저 포션에다가 집어넣은 뒤, 나한테 마시게 한 거다 이거지?"
"맞았습니다 귀여운 학생. 올해 시험 수석합격 감이군요."

짝짝짝!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학생이니, 시험 같은 선생님들이 쓰실만한 말투와 함께. 혹시나 해서 한글을 잊어먹은 게 아닌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머리속에 세종대왕님이 백성들을 위해 남기신 언어가 하나, 둘씩 보였다.

분명히 그녀랑 제대로 된 대화를 위해 본능적으로 오케아나 언어가 나오는 거겠지.

"이 무슨 만화도 아니고…."
"만화?"
"응 그래 만화."

풀려진 긴장감으로 인해 고개를 벽에 기대었다. 현재 기분을 표현하자면, 여러가지 짐들이 한꺼번에 나한테 덮친 듯한 기분 그 자체였다.

"딱 봐도 만화 같은 상황이잖아. 가방 속에서 테이블을 꺼내지 않나, 포션이란 것을 만들지 않나, 그리고 마법이란 것도 사용했다고 하지 않나. 누가 봐도 만화 같은 상황이라고."
"만화가 뭐야?"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코가 맞대을듯 말듯한 거리로. 앰버색 눈동자는 반짝임으로 가득찼다. 아까 전 깨어난뒤, 내 상태를 확인했을때 지었던 똑같은 표정이었다. 호기심 가득찬 순수한 소녀의 표정.

"재미있는 거야? 연금술보다? 마법과 비슷한 거야?"
"음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오케아나라는곳에는 만화가 없나? 그렇게 되면 소녀의 반응이 설명되었다. 그녀로서 완전히 새로 듣는 단어일 테니까. 판타지 세계에는 만화라는것이 없을 확률이 높겠고.

.......가만 언제부터 내가 그녀가 코스프레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거지?

"그림을 좀 더 멋있고 귀엽게 그려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거? 애들이나 어른이나 상관없이 재미있게 읽고."
"재미있는 거 맞네!"

양손의 손을 쥔 체, 소녀에게서 무언가가 나오고 있었다. 활기참으로 가득찬 오오라가. 너무나도 위압적이어서 내 몸이 뒤로 밀려갈 정도였다. 분명히 물리적인 영향이 없었음에도. 

"그 만화책 가지고 있어 지금? 당장 보고 싶어졌어!"
"없어."
"에?
"전부다 집에다 두고 와서 한 권도 없어. 미안."
"부우...시시해..."
"집에 돌아가면, 몇 권 빌려줄 테니까. 이래뵈도 모아둔게 많거든."

그 오오라는 양초에 붙인 불처럼 금세 꺼져버렸다. 실망했다는 듯 불을 부풀린 체. 저렇게 삐져 있는 표정이 은근히 귀엽네. 손가락으로 부풀어 오른 볼을 찌르고 싶을 정도로.

"뭐, 본론으로 넘어가자면."

그래도 그 소녀의 밝은 오오라 덕분인지 피로함이 풀린 느낌이었다. 돌을 올린 듯한 두통도 아주 가벼워져서, 머리가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보면, 만화에서나 볼듯한 상황이라고…."

볼에 붙여진 붕대를 만지면서 말을 이어갔다.

"약물 한 병 마셨더니 그대로 새로운 언어를 배우지 않나, 뿔 달린 토끼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나, 그리고 갑자기 불길이 일어나더니 붉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에게 끌려가지 않나…."
"이거 말하는 거야?"

소녀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붉은색 망토에 달린 후드를 짠-하면서.

"역시 너였구나? 약물 던지고, 불붙인 애가."
"후후후- 이렇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몬스터 퇴치 포션과-"

따악!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화염이 화악-하고 피어올랐다. 테니스공만 한 크기의 화염이.

"내 주특기인 화염 마법으로 토끼들을 숯불구이로 만들어주었지. 이 아름다운 소녀의 외모와 어울리는 불꽃으로 말이야."
"어떻게 내가 있는 곳까지 달려온거야? 토끼 울음소리 듣고 달려온 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그 전에 외침이 들려서. 엄-뭐라 했더라. 느구! 야아기 읎나여-(한국말로 말함)이렇게. 맞나?"

어설프게라도 내가 말한것을 그대로 말하는 소녀였다. 한글로. 딱 발음이 내가 길 가다가 만나는 외국인들과 비슷했다. 검지로 분홍빛 입술을 대면서 기억해 내는 모습에 작은 웃음을 내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은근히 귀여웠기 때문이다. 앙증 맞고.

"그렇게 된 거면 고마워."

소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여러 소동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를 도와준 그녀에게 감사함을 전해주는 것이 예의겠지.

"나를 구해줘서. 진작에 깨어나자마자 고맙다고 해야 했는데, 인제야 하네."
"으응-괜찮아. 우리 둘 다 정신없었으니까."

손가락을 튕기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떠오르던 화염의 공은 폭발했다. 뭔가 분위기가 TV에서 볼듯한 마술쇼를 보는거 같았다. 지금까지 일들을 되짚어 보면 눈속임이 아닌 실제이겠지만.

"게다가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았잖아? 고맙다고 해도 못 알아들었을걸?"
"그건 그렇네."

우리 두 사람에게서 미약한 웃음이 나왔다. 처음인듯했다. 한시내 외에외여자애랑 대화하는 것을.. 그것도 핑크 머리카락의, 판타지 복장을 한 미소녀랑. 비록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소녀와 내 사이에 벽 같은 것이 없는 느낌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사이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고. 소녀가 워낙에 허물없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 맞다!"

짝! 하고 손바닥을 치는 소녀였다.

"우리 서로 통성명을 안 했네? 너 아직 내 이름 모르지?"
"그러고 보니 그렇네."

어흠-하면소녀는 헛기침한 한 뒤,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을 두들겼다. 싱긋 미소를 지은 체.

"내 이름은 키스. 연금술사 키스 플레어필드. 이름이 뭐야 멋진 소년군?"

짧은 자기소개를 마친 그녀를 보면서,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눈앞의 아름다운 소녀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려고 하니 뭔가 쑥스럽고.

"정성운."

간신히 이름을 내뱉자, 소녀에게서 미소가 그려졌다. 얼굴이 붉혀지는 느낌이다. 어울렸다. 확실히 귀여웠다. 미소하고 너무나도 어울리는 소녀였다.

"성운이라고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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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히로인 키스의 등장입니다. 원본 주소에 있는 북커버에 나온 소녀고요.

피드백 및 소감 올려주시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