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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빌딩의 꼭대기를 넘어 아침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녀의 집 문이 열린다. 젠장. 오늘은 짧은 치마를 입었잖아. 나 말고 다른 인간들이 그녀의 맨 다리를 보는 것은 정말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집 문에 옷 좀 단정히 입으라는 쪽지라도 붙여놔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건 그녀를 너무 구속하는 느낌이 들어서 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연애 신념은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연예인 것이다.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간섭은 최대한 자제해야지.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평일이니 필히 기차역으로 향하는 것 일테지. 조금 들떠 보이는 것은 어째서 일까. 그녀의 대학 일정을 떠올려보아도 딱히 짐작 가는 것이 없다. 화장이 평소보다 조금 진한 것 같은데 누구랑 만나기로 했나? 이상한 녀석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 알겠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저렇게 신난 거구나. 크크. 고작 그런 거 갖고 저렇게 기뻐하다니. 너무 귀엽잖아.


 이 시간대의 기차역은 항상 붐비기 마련이다. 오늘도 역시 엄청난 인파가 그녀를 맞이하고 있군. 여기서부터는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심열을 기울여야 한다. 그녀는 키도 155cm로 아주 작은 편이기에 잠깐 한 눈 팔면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다. 물론 목적지를 알고 있기에 놓친다 하더라도 어찌어찌 만날 수 있기는 하지만, 기차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하게 되는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선 안된다. 덤으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들이 그녀의 무방비한 모습을 보고 욕정 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해야 하기에, 그녀와 같은 기차를 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녀는 대학에 도착하면 항상 한숨을 깊게 내쉬는데, 그럴 때면 나도 엄청난 우울함에 빠진다. 물론 그녀의 시무룩한 모습도 참을 수 없이 귀여우나, 그녀가 강의실에 들어가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진다. 나의 존재 의미가 눈앞에서 사라지니 공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학 내부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여러 번 했었지만, 그때마다 쫓겨나기 일쑤였다. 날 보고 징그럽다나 뭐라나. 사랑하는 사람 얼굴 좀 보겠다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이 사회는 뭔가 잘못됐다. 낭만도 사랑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들이 넘쳐나지. 분명 먼 미래가 와도 혼자 외롭게 살다 쓸쓸하게 죽을 운명의 인간들 같으니라고. 반면에 나는 평생을 함께할 그녀가 있다. 저 멍청한 새끼들 관 달라.


 영겁과도 같았던 지옥의 시간이 끝나고 커다란 시계의 바늘이 4를 가리키면 나만의 그녀가 다시 얼굴을 비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끌어안고 싶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참도록 하자. 그녀도 너무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러는 것은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은 기본이다. 암 그렇고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선 핸드폰으로 짧은 동영상들을 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는 그녀가 너무나도 귀여운 나머지 오히려 내가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녀를 나 혼자 독차지 한다는 게 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존재는 나인걸. 지난주에 친구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여자친구라 소개했더니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곤 꿈 깨란 말을 했었다. 부러운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질투할 필요는 없었는데. 꽤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했었건만 그렇게 찌질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기차에서 내린 그녀는 집 앞 편의점에 들렀다. 필히 오늘 저녁으로 먹을 간편식품을 살 예정인 것이지. 아침에 언급했듯 지나친 간섭은 지양해야 하나, 나와 공식적으로 사귀게 된다면 이러한 부분은 간섭을 조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건강하고 바르지 못한 식습관은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녀가 뚱뚱해진다고 해도 그녀의 사랑은 변하지 않겠지만, 내 사랑은 변해버릴 수도 있다. 그럼 상처 입는 것은 그녀가 될 터이니 그건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편의점에서 나온 그녀가 평소와는 달리 무언가를 더 구입한 모양이다. 그녀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의 무게감은 고작 편의점 도시락만 들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대체 뭐지. 설마 나를 생각해서 치즈를 산건가? 




 마침내 그녀가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낡은 아파트의 환풍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크기의 환풍구이지만, 나는 들어갈 수 있다. 그녀의 집 욕실로 통하는 길 역시 눈 감고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훤하다. 이 순간만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온전히 둘만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모든 걸 공유하게 되는 이 순간을 말이다. 타이밍 좋게 그녀의 욕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렇게 환풍구 출구에 단 10발자국만을 남겨놓고 나는 재촉하던 걸음을 멈춰세웠다. 아니. 멈춰세울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아닐 거야. 에이. 아니겠지. 아니어야만 해. 그냥 어쩌다 보니 이곳에 끈끈한 무언가를 흘린 걸 거야. 그런 거여 야만 하는데… 그런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아니.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쥐덫임에 틀림없다. 편의점에서 샀던건 쥐덫이였어. 그녀가 날 속인거야. 먼저 날 유혹해놓고선. 날 원해왔으면서. 날 사랑했으면서. 참으로 비통하다. 이따위 여자에게 내 시간을 쏟고 마음을 주고 목숨까지 줘야 한다는 것이. 결국은 뼈저리게 느끼겠지 나만 한 남자가 없다는 걸. 인간이라 불리우는 자들은 모두 쓰레기라는걸. 그리곤 후회하겠지 타들어가는 담뱃재처럼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겠지! 그래.. 그녀는 그런 최후를 맞게 될 거야. 내가 없으면 그런 최후를 맞게 될 텐데… 내가 그녀 인생에 빛이 되어줄 수 있는데! 찍! 찍 찍!!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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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처절한 절규와 울음은 그저 짐승의 것으로 존재했으며 사람이 그 더러운 말의 뜻을 알아듣는 일은 영원토록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