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셸 티나는 30년 전의 날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녀의 귓가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지나간다. 허리를 기댄 나무들도 같이 부스스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흔치 않은 60세를 이미 넘긴 노인이었던 그녀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두꺼운 책이었고 글씨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았던 책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완성은 결말이라고 한다. 그녀의 결말은 이야기를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다, 유셸 티나는 생각했다. 손을 꽉 쥐어보려고 했지만 힘이 없어 늘어진 근육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실패했다는 낙인을 찍은 지가 수십 년이다. 모든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는 편을 선택했다. 애초 자신의 목표와는 큰 오차가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을 추구하는 것보다 쉽고 단순한 큰 길이라고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해 왔다. 이상을 바라보고 샛길로 거친 삶을 타는 것은 무엇을 위해였을까, 유셸 티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 쪽으로 다가섰다. 희끗희끗해진 장발이 햇빛에 비추어져 환하게 빛났다. 오래된 집 대문은 고장이 나 안에서 열려고 하면 막혀 있었다. 세게 당겨야 간신히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대문 손잡이를 잡고 당기려는 순간 다른 형태의 저항이 찾아왔다. 그 바람에 유셀 티나는 땅에 내팽겨쳐졌다.

그리고 검은색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절도있는 구보로 집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목표물이 도망치지 못하게 그대로 둘러싸더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생물인 것마냥 움직였다. 머리와 몸통, 팔, 다리가 모두 검은색 군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체이자 동물이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을 움직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화창한 날씨에 하필이면 군인들이라니, 유셸 티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앞에 보이는 검은색의 형체를 향해 말했다.

“또 당신이군.”

“공화국의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참 괴상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관습과 폐단을 여전히 믿고 있으시다니요.”

그녀의 등 뒤에서 목소리의 근원이 다가왔다.

“전부 불태우고 했는데도, 신기하게 안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분께서 저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저도 총리님께 악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명령을 받은 대로 수행할 뿐이죠. 기록을 왜곡하는 것은 가능해도, 사람들의 기억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시다고 그때 말씀하셨죠. 저희는 그걸 더 큰 그림을 그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조언해주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뱀처럼 위협적인 소리를 내면서 동시에 세이렌의 노래같은 달콤한 음성이 그의 목소리에선 공존했다. 유셸 티나가 그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오래 전이었다.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미래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팽팽한 침묵이 조여졌다.

“...오늘은 내 조언이 필요해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뭘 원하지?”

뒤돌아 걸터앉아 있던 그녀는 사자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웃음을 지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바로 주제로 들어가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녀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의 예상대로 입가에 잠시 동안 미소를 머금더니 입맛을 다셨다.

“알려드릴 수도 있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는걸요. 여기 오는 데만 얼마나 걸렸는데, 투자한 만큼 수익은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한동안 볼 일도 없을 테니까 말이고요. 그러니까 안에서 차나 한 잔 어떻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번만요.”

그는 잔인하고 무도한 인간이었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이 그런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다고 뭔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염치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녀와 시간을 더 보낸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 흥미로운 과정이 될 것이었다. 돌아 앉아 있는 인물의 표정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두려움과 불안을 저 얼굴에서 보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는데,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잘 피해나가고 있었다.

이내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녀가 말했다. 

“됐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빨리 해라. 나하고 장난칠 때가 아닐 텐데.”

얼굴에는 햇살에 비쳐 드러난 주름들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쉽다는 듯 사자가 그녀의 등 돌린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전에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그땐 왜 그런 거지? 누굴 위한 행동이었던 거냐.”

사자의 목소리가 전과는 다르게 냉랭해졌다. 유셀 티나는 죽음을 앞두면서도 의연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왜 하필이면 그런 길을 걸었을까,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자로서는 그가 바라던 것 중 반만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모셔라.”

하지만 군인 중 한 명이 그녀를 구속하러 다가서기도 전에, 유셸 티나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묶어놓은 팔뚝에서는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집 마당이 피로 흥건해지는 걸 보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래 전 들었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이제 끝이 났군. 이 정도면 자네는 최선을 다 한 걸세.”

개인적인 입장에서 그녀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렇게 순간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적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단은 남겨 두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속죄의 값은 치른 것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다. 남아있는 의식은 흐려지고 마침내 심연으로 사라졌다.

기억은 잊을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남을 수도 있다. 유셸 티나에게는 모든 기억이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자신의 기록이 남아 있는 한,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그녀의 마지막 선택을 가능케 했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누구나 택해야 할 내용이다. 때때로 괴로운 순간도 있지만, 극복해나간다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가 절대 없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