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의 성벽으로 감싸여 있는 지붕들은 옹기종기 서로 이어져서 마을을 이루었다. 사람의 자취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틈새는 어느 정도의 적당한 선에서 벌어졌다. 너무 좁으면 꽉 막히고, 지나치게 널찍하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속설을 의식한 나머지였을까. 마치 초기의 설계자가 강박증에 걸리고 나서야 가능한 정도로 건물 하나하나가 격자에 짜 맞추어져 있었다.

유셸 티나는 성문의 대들보를 걸어서 건너갔다. 벽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말을 타고 들어오는 것은 오직 황제만을 위한 신성한 특권이었다. 재상도, 장수도, 귀족도, 대부호도 저마다의 욕심을 내지만 유일하게 이것만은 한 사람의 것으로 남겨두었다. 남의 결핍을 자신의 우위로 삼는, 어떻게 보면 치졸한 지배 방식. 그렇지만 그 효과는 널리 입증되었다. 

수 백년간 실정과 선정이 무작위적으로 제국을 휩쓸었지만, 그 풍파에 으스러지기는 커녕 수도의 순백색 방패는 더욱 단단해졌다. 어디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밤낮으로 재촉해 가며 만들어낸 절벽은, 세금과 노역이라는 쇠붙이를 낳았다. 그 쇠붙이들이 자식들에게 말한다. 절벽 끝으로 걸어가. 조금만 걸어가면 돼. 그리고 또 다시 말한다. 조금만 더. 또.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떨어져도 돼.”

끝에서 그제야 멀어지려고, 발바삐 뛰어가보려고 하는 짓을 다 의미없게 만들까 고민하지 않던 그들은, 두 손으로 밀어뜨려서 추락시켜 버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법대로 한 것 뿐이었으니까.  

힘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권력자 입장에선 권력은 절대적이여야만 한다. 도전자를 바닥에 내팽겨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려면 상대적으로 우세한 정도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을 조건이다.

아무리 요설과 속임수가 풍부한 이라고 할 지언정 모두가 알아서 받들어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을 보면 보통은 안심하게 된다.

그들이 창조자로서 피조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문장 하나하나. 마음의 결심을 납작하게 눌러 자국만 남기게 하는 권위의 도장. 

이런 대단한 무기를 소유하는 데는 오직 태어날 때의 피의 값비쌈이 요인이었다. 그들은 남들이 평생 일한 것보다 하루에 더 적게 일한다. 하지만 남들이 평생, 아니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가지지 못할 영예를 누린다.. 아침이 되면 몸을 깨끗이 닦고, 점심이 되면 차를 마시며 서적을 탐구하고, 저녁이 되면 미식가로 둔갑한다.

티나 본인과 그녀의 아버지는 그 중에서 아주 드문, 예외 중에서도 유례가 없는 반전이었다.

전공을 세웠던 경력이 있었던 덕에 흔치 않은 인정을 받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 뒤바뀔 지 모를 황제의 비위에 맞추어 공을 세우는 데 열렬히 매달렸다. 충성을 경쟁하는 다른 이들과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고, 아무런 뒷배도 없었던 그는 중앙 정치에서 오래 견디지 못했다. 그래도 원래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진보된 결과였다.

본인은 고생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부모에게서 한사코 들어왔던 티나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정말 배후가 없다고 해서 그렇게 밑으로 떨어질 수가 있을까.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씻겨져 내려간 후의 냉정한 사고에서 우려낸 결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뒷배가 있었어도 쓰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버려질 사람이었다. 정치가로서는 유능하지 않았을 것이 유력한 상황.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뾰족한 지붕의 처마 밑에 널부러져 앉은 건지 누워있는 건지 분간이 어려운 노숙자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흙먼지를 묻힌 있는 그릇을 내밀며 무어라고 말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떨어지면 짤랑거리는 황색의 동전을 떨어뜨려 준다. 그냥 팽개치고 갈 길을 가는 광경도 이따금씩 보인다. 돈을 자비롭게 한 푼이라도 내어주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행인들은 겉모습으로만 보았을 때는 구분할 수 없엇다. 사실 귀족들의 어떤 부류는 고귀한 이들에게 극빈을 부양해 줄 것을 권장하거나, 심지어 의무라고까지 하기도 한다.

그녀의 부친은 바로 그 비정상적인 무리에 속했다.

장군이면서 동시에 유능한 관료인 인물을 다시 찾기는 어려웠겠지만, 위험한 사상을 가진 자에게 자비를 배푼 것만 해도 황제의 넓은 아량이 영향을 끼친 건 분명했다. 정말로 위험한 사람은 얼마나 자기가 위협적인지에 대해서 인지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람이라는데, 어쩌면 아버지가 아닐까, 유셸 티나는 생각했다. 가족을 출세길에 안착시키지 못한 것보다 빈민을 도와주지 못한 걸 더 부끄럽게 여겼던 그는 꽃길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러고 피랍된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접경지역 원정에 민병대 대장으로 나서더니 결국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유언은 없었고 상속 문서가 존재해 티나는 그의 집과 유산을 그대로 승계했다. 같이 보낸 시간이 자그마치 몇 년은 되었지만 제대로 이해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 수록 기억의 굴래가 더욱 꼬이며 이해하는 게 요원해졌으면 요원해졌지, 이해, 더 나가서 용서를 한다는 상상은 전혀 되지 않았다.

걸음걸이가 분노 때문에 보다 거칠어져서인지 땅을 강하게 치며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길쭉하게 이어진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거리 오른쪽 옆면에 화사한 숙소가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그 옆편의 문으로 들어갔다. 주머니가 그리 두둑하지 않았던 이상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입구 앞에서 보니 젊은 남성이 안내석 뒤쪽에서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아마    

기입 장부이겠지, 티나가 생각하며 다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만.”

남자가 목소리를 듣자 고개를 바로 치켜들더니 곧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그가 말했다. 여전히 왼쪽 손에 수첩을 움켜쥔 채였다.

“하루 정도 묵고 싶은데, 혹시 남는 방 있나요?”

처음과 달리 정중한 어투로 바꾸어 주자 남자의 긴장한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예. 저쪽으로 가시면…”

보이는 것처럼 꽤 작은 시설이다 보니 왼쪽은 3번째 방이 맨 끝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목침에 바로 드러누워 버리는 건 예상 밖의 일은 아니었다. 시골 산골짜기에서부터 도시까지 오는 것은 꽤나 큰 여독을 남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셸 티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검은색의 공백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다 볼 수 있는 것보다 오히려 나을 지도 모르겠다고도 누군가 말했던 적이 있었다. 아는 것은 고통이고 모르는 것은 안식이므로 적당한 무지 역시 행복의 기본적 조건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칠흑처럼 검은 천장을 보니 그 발언마저도 오늘따라 일리있어 보였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유셸 티나는 그렇게 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