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눈을 오롯이 가리고 있던 신의 손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민중들의 환호 소리에 묻힌 것인지... 신은 특별한 존재라 절단될 때의 소리가 환호와 근접한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저, 세계를 관찰하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제거된다는 심정에 들뜰 뿐이었다. 나는 마치 아이와 같아, 현실을 직시할 수 있음에 일종의 자부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허나, 어떠한 생각이 가끔 떠올랐다: 아무리 신이라고 한들, 통점(감각세포)을 소유하지 않은 것인가? 또한, 혈액은 정말이지 단 한 방울도 포착할 수 없었다. 과학의 반박에 주저앉은 신의 모습은 손으로 간접적인 묘사가 이루어진다는 상상도 해보았다. 어쨌든, 손은 점점 절단될 기미가 보였다. 환호 소리는 더더욱 열광적이었고, 구닥다리의 교인들에게 권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현실을 올바르게 보는 것을 못하는 아둔한 고집쟁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종교의 자유로 그들을 금세 용서할 수 있었다. 실제라 호소하는 가상은 간신히 완전한 절단으로 도달했다. 거대한 꿈에서 깨는 듯한 현실감이 온몸에 비수처럼 박혔고, 이성적인 사고에서의 괴리감이 소멸되어감을 실감했다. 나는 조심스레 설레는 마음을 안고 절단된 신의 손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대중들의 환호 소리에서 주체로 존중되는 개개인의 환성의 집합체로의 변환. 영광이었다. 그러나, 우주라 명명되는 암흑은 그리 환상적이지 못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범위는 '쏜살같이' 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속도의 빛도 백억년을 훌쩍 넘게 이동해도 모자라다고 할 정도의 광활함이고, 그 범위 안에서의 발광하는 별의 갯수는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저 어둠이었다. 알고 있다. 별이 그렇게 포착되지 않는 원리.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정서는 아까의 설렘에 무색했다. 단어로, 고독. 이제는 모르겠다. 이것이 좋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마녀 사냥의 시초가 합리적인 것은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방해가 궤멸된 시점부터 가까워진 우주의 이치에서의 과학의 발전은 확실히 출중했고, 응용에 따른 생활에서의 편리도 굉장히 강화됐다. 그런데... 왜? 환호는 이제 시위라 지칭되는 것의 아우성이요, 타개의 가능성은 곧장 져버리고 개인을 파괴한다. 그 파괴는 내가 신의 손을 절단하는 것을 연상시켰다. 그들은, 민중이 바라던 종교로부터의 자유처럼 자신을 초월하고 싶어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적극 실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회였다. 밀려오는 감정은 후회였다. 물론, 신은 이성적 사고로부터 큰 괴리감을 가진 가상이었지만, 나는 다시 신의 손을 글루건으로 접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역부족이었다. 글루건의 과학적 원리는 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신의 눈을 빌려 세계를 바라보던 나는 너무나도 오만했다.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생각했다. 간과했던 것은 금수가 아닌 나는 내가 스스로에게 신앙심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신이 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무신론자라 울부짖는 이들도 동의하는 것은 종교가 주장하는 사실은 현실적이지 못하나,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어떠한 것에 도달한... 숭고하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원수를 사랑하라.") 그렇다. 숭고한 개인이 되어야 했다. 타인에게 떳떳이 설파하고, 청자의 대부분이 인정하고 그들에게 모범이 되는, 신과 같은 존재. 성인이 되어야 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인간은 신의 힘에 필적하는 힘으로부터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를 파괴한다. 드디어, 이해가 됐다. 국어, 수학, 영어, 탐구로 무장한 의사로 변장한 괴물이 되기 이전에, (아니면, 이후에라도.) 성인이 아니더라도 좋으니 성인에 근접하고 숭고에 가까운 개인이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웃기게도, 신의 손을 내쳐버린 나였지만, 이성적 사고라는 말은 이제는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계몽이라 일컫는 유토피아인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현안을 보유한다는 가정 하에 어김없이 까닭을 찾아 방랑하는 어리석은 몽상가들은 이제 나에게 있어 일종의 눈엣가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