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나갈 태세를 마치자, 유셸 티나는 시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최대로 잡아봐야 도보로 20분 정도에, 길거리의 사람들은 모습을 드러낼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 일찍부터 일터에 들어갔을 것이다. 시골과 달리, 이곳의 주민들은 대다수가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늘 전심을 다해 정성을 바쳤고 한참 못 미치는 대가를 지불받았다. 고용주의 텃새는 영겁의 시간이 지나도 변형되지 않는 금강석만큼 견고했다.



도시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작로의 왼쪽 옆편에서, 큰 건물 한 채가 눈에 띄어왔다. 갑옷을 착용한 군인들이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좁디 좁은 다른 집들 사이의 골목길과 달리, 그곳의 골목길은 골목길이라 하기 민망할 정도로 찢어지게 넓었다. 


이목을 끌려는 의도가 다분한 배치. 황제의 직영 방직 공장이 우뚝 서 있었다. 위대한 폐하께서 비자금을 충원하기 위한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을 강구하셨다는 게 설마, 티나가 속으로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는 그녀의 고용주가 된 이상, 불필요한 잡념을 품는 것은 금기였다. 아낌없는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이 기대하는 마땅한 본보기였다. 

‘그래야 할 지는 두고 봐야겠지.’

티나의 마음 한 켠에서 머리카락 하나가 삐져나와 고개를 내밀었다. 


필요 없어, 그녀는 애써 고개를 휘저었다. 하지만 붉은색 머리카락만 살랑거렸을 뿐 정렬의 위배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분명 내면의 목소리에 속절없이 휘둘렸을 것이다. 


’집중해.’


 그리고 어느새 바로 눈 앞에 있었던 지식의 나무라고 불리는 서고는 도시 북동쪽의 대회의장 바로 옆에 조용하게 서 있었다. 그 조형물의 느낌을 표현하자면, 하루도 빠질 틈 없이 시끌벅적한 바로 옆 대회의장의 요란함을 상쇄시켜 주는 고요함이 안치되어 있다. 그렇지만 두 건물 사이에 왕래는 보기보다 드물었다. 논쟁과 공상의 장소는 서로 상극이기 때문이었을까.


티나는 굳게 닫힌 정문이 아닌, 그 옆에 있는 작고 비좁은 통로에 몸을 구겨넣었다. 사전에 통지를 받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출입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조금 큰 창문에 더 자세히 보았을 때 겨우 작은 나무 손잡이만이 여기로 드나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로는 천장이 낮아서 허리를 심하게 굽혀 들어가야 했다. 자칫하다간 골병이 들 수도 있겠어, 그녀가 몸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벽을 살펴보니 특이하게도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선대들을 찬양하는 내용이건 무엇이건 간에 빈 여백을 남겨두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진 시대였다. 하지만 지식의 나무의 벽은 화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다.

 

왜일까.


그건 차차 알아내면 돼, 티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걸어갈수록 점점 천장이 멀어지며 허리가 다시 곧게 펴지려고 하는 순간, 눈에서 별들이 쏟아졌다.


“아야.”


타격을 입은 이마 쪽을 어루만지며 갑자기 튀어나온 돌부리를 노려본다. 혹시 벽에 그림이 없었던 것도 화가의 귀찮음이 보기 좋게 발동해서 그런 거 아닐까?


“비켜.”

 

그녀의 앞에서 거친 말투의 음성이 전달되었다. 충격의 여파로 감각을 회복하지 못한 티나는 반응할 수 없었다. 그보다도, 부탁을 하고 싶다면 저런 말투로는 해봤자-


“빨리 비키라고!”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무언가에 의해서 밀쳐내는 힘으로 벽에 부딪혔다. 

더는 눈을 감고만 있을 수만을 직감적으로 자각한 건지, 그녀의 몸이 본능적으로 짧은 비명과 함께 공격자에게 극단적으로 보복했다.


졸지에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은 땅바닥에 강하게 충돌했다. 


티나는 부딪힌 곳이 찌릿하고 아파오는 것을 무시한 체 눈을 떠 자신의 앞에 떨어진 한 구의 생물을 바라보았다.

찬찬히 살펴봤지만 어떤 미동도 감지할 수 없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안 되는데. 죽으면,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굳이 책임소재를 따지고 보면, 원인은 먼저 충돌해 버린 쪽에 있어야 했다. 물론 법으로 따지고 보면, 각자가 입은 손실을 금전적으로 계산해 그에 맞게 상호가 배상해야 했지만, 그런 단계까지 가게 된다면 정말로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이 연속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또 언제 끝날지 모를 번뇌에 빠져드는 건 정말로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취해야 할 행동은 더욱 확실해졌다. 


무거운 물건을 드는 건 이전부터 해왔던 일상의 일부였기 때문에 티나는 낮설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물론 운반해야 하는 게 도구나 사물은 아니다. 자기 키보다 손바닥 반 뼘 정도 더 커보이는 사람을 등에 실어버리고 의자에다 도로 앉혀놓으면 끝이었지만, 괜히 마음 속 빨간색 실뭉치에 바늘이 푹 꽂히는 감상이 드는 게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끙끙대며 발을 힘겹게 내딛었다. 적어도 이제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와 크게 어긋난 해답이다. 그리고 몇 초 후, 기대와는 다르게 티나의 다리는 멈춰섰다. 그리고 자의가 아닌 타의의 개입에 의해서였다. 


그 사람의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희고 찬 머리카락은 물결처럼 흘러서 어깨에 닿았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그녀가 티나를 향해 고개를 들어 금 하나 없는 그 창백한 겉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입을 조용히 열었다.


“귀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라면 그 사람을 내려놓을 겁니다.” 


마주 본 눈동자에는 흰색의 배경에 조그마한 붉은색 자국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는 또렷한 말투를 뒷받침해주는 결기의 원천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산물 중 하나였을까.

     

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근시일에 경비원과 적대 관계로 맞닥뜨리는 건 악수 중에서도 최악의 악수였다.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그대로 수용해 줄 리가 없다. 분명 증언 수집에 착수하고 대질 신문을 요구할 것이다. 그렇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쉽게 굴복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경비원, 어디에 의문점이 있다는 거냐. 올바르게 직시하지 않는 것 아닌가? 나는 한 사람을 등에 지고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 행동에서 유추해내는 결론은, 적어도 내 앞길을 막아설 단 하니의 타당성도 부여하지 않는다. 어서 비켜라.”


그녀가 위엄을 가장한 말투를 가장하며 상대를 압박했다. 연습을 유한하다고 볼 수 없을 정도까지 거듭해 연마한 연기력을 작금의 상황에 사용하는 것은 용도에 부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적어도 과거의 경험과 기억에 지반을 둔다면, 실패의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하지만 희망은 눈꺼풀이 한 번 펄럭이기도 전에 박살났다.


“그렇습니다. 귀하께서는 방금 전 지식의 나무의 관원과 충돌하셨고 상대에게 신체적으로 공격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물리적으로 접촉한 건 아니셨죠. 그러므로 도의적으로 잘못된 일일지언정, 제국 법률을 위반하신 것은 아닙니다. 허나, 공직법상 위증은 엄히 다스려야 할 중죄일 터이니, 이에 대해서 저는 해명을 요구하겠습니다. 타당한 이유를 전에 언급하셨습니다. 이제 동등한 입장이 되었으니, 말씀해 주십시오. 그 관원과의 충돌에 대해서 거짓으로 증언한 타당한 이유를 말입니다.”


티나의 입가가 잠시 경화되었다.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패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위험하다, 라고 온 몸의 기관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자는 위험한 자다. 타인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라면 양심도 저버릴, 파렴치한 사냥개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을 낸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어깨가 떨리며 주저앉는 것에 더욱 근접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돌바닥에 쓰러지려고 한 순간, 무언가의 위화감을 티나는 느꼈다. 상황에 휩쓸려 혼절한 것은 아니었다. 손이 등 뒤로 향하자 그제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잠깐.”


등 뒤에 실려 있었던 그가 말했다. 언제 깨어난 거지? 티나가 의아해하며 그를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지만,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키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잘못이 있는 쪽이라면 이쪽이야. 하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있는 건 분명해. 세레나스.”


“예외 조항을 적용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까?”

세레나스라고 불린 그 경비원이 변함없는 어조로 물었다.


“부탁해. 지금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티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검은색 눈동자가 유성만큼이나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티나의 초점을 잃은 두 눈은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필사적으로 피사체를 찾기 위해 탐색할 뿐이었다. 


운명도, 진실도, 배신도. 모두 사람의 손에서 빚어진 공예품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다시 부수어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 한들 무어라 하는 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정한다. 


지식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