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한 번 소리 내어 보자. 입술을 굳게 닫고, 힘차게 열어야 하는 ‘ㅃ’은 발음하기 힘들다. 나에게는 아빠가 그러했다. 다가가기 힘든 아빠. 이해하기 힘든 아빠.
아빠는 건축 설계를 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빠를 자주 뵐 수 없었다. 설계 업무를 하시지만, 건설 현장을 가서 지휘해야 하니 출장이 잦았다. 건설업이 힘을 쓰는 업무가 많다 보니, 고됨을 잊기 위한 술자리가 많았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현장이 있어도, 아빠는 일찍 주무셔야 했다. 다음날도 태양보다 일찍 눈을 떠야 했으니깐. 아빠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금전적인 부분을 맡고 계셨다. 이러한 헌신 덕분에, 나는 학창 시절을 모자람 없이 보냈다.
설령 본인에게 해가 되더라도,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 나는 이것이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나에게 항상 헌신적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내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길 바라셨던 아빠는 내가 원하던 대치동의 학원, 인터넷 강의와 교재를 모두 지원해 주셨다. 군대를 전역하고 난 후, 갑작스럽게 내가 재수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 다음날 바로 재수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빠와 다투고, 너무 화가 난 내가 집을 나서고 1년 후에 돌아왔다.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나를,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다.나는 이런 아빠를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반려동물인 고양이와 같이 생활해 본 적이 있다. 과거 애완동물이라고 불렀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반려동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애완의 ‘완’은 장난감을 뜻하는 완구의 ‘완’과 같은 뜻의 한자를 사용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나의 ‘반려’였다. 반려는 ‘짝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려동물이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달라졌다. 대소변 치우기, 밥 챙겨주기, 장난감으로 놀아주기, 토하면 치우기, 사고 친 것 정리하기… 귀찮은 것도 많았고, 이상행동을 보이면 아프건 아닐까 걱정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얼굴만 보아도 행복했다. 나는 내 짝인 반려동물에게 헌신적이었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된 경험이 있음에도, 누군가에게 헌신적이었던 경험이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의 젊음을 투자해 얻은 금전을. 땀을 뻘뻘 흘려가며 얻은 금전을.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나에게 투자했다. 투자를 받았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가 아빠한테 말했다. 당신의 헌신이 부담된다고. 당신은 내게 부담 느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당신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의 아빠. 아빠의 나. 당신에게 나는 무엇인가요? 나는 언제쯤 당신을 이해할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