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나무) 


*


방학과제로 받은 일기장을, 권태감에 절여진 내가 한장씩 찢어 종이비행기로 접던 어느 날의 일이다.

구름에 난도질 당한 조각하늘 어딘가에서 검고 둥그런 무언가가 떨어졌다.

손톱만한 크기의 그것은, 본격적으로 관찰도 못한 채 우리집 마당에 묻혀버렸다.


"얘, 하루종일 마당에서 놀 거니? 숙제도 좀 하고 그러렴."


어머니의 잔소리가 날 괴롭혔기 때문이다.


"숙제는 다 해뒀어요, 엄마."

"그러면 방 청소라도 하렴. 네 방이 돼지우리다."


나는 손바닥에 올려두었던 검은 그것을 땅에 털어버렸다.

축사치곤 온건하고 무척이나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내 방은, 그러나 청소를 마치기까진 하염없이 오랜 시간을 요구했다.

지친 나는 저녁도 들지 않고 까무룩 잠에 빠졌다.

마당에 떨어뜨렸던 검은 무언가를 잊고.

다음날이었다.

주방에 한 그루의 나무가 솟아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에서, 나는 한참을 고심했지만, 끝내 그것이 어머니였던 물체라는 사실을 추측해냈다.

밖을 나가보았다.

두려울 정도로 고요한 마을 밖을 향했다.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둘러본 곳의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무로 변해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어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꿈에서 깨어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콩콩.'


이 무시무시한 형국에서 유리를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자그만 인형이 있었다.

아니, 당시엔 인형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를 깎아만든, 인간 모양의 인형.

목재의 표면을 감출 시도도 하지 않아, 오로지 고동색으로 일관된 투박한 나무 인형.

크기는 대강 내 손바닥만한.

인형이 유리 문을 노크한다는 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지식인지라 나는 놀라기보단 외려 안심하였다.


"다행이다, 역시 꿈이구나."

"꿈 아니야."

'드르륵'


인형은 스스로 유리 문을 열고 내게 다가왔다.

인형은 그러곤 겁쟁이처럼 튀어나온 내 얼굴을 뻥 차버렸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자 인형이 강조하였다.


"아프지? 꿈 아니야. 일어나 당장."


인형이 말을 하는데 꿈이 아니란다.

꿈이 아니라면 상황을 설명할 말이 많지 않았다.

나는 그중에 제일 먼저 떠오른 말을 사용하였다.


"미쳤구나."

"네 머릿속이 이렇게 창의적이라고?"

"아니, 그렇...지는 않지."

"오늘 이건 꿈이 아니야. 네가 미친 것도 아니고.
세상이 미친 거지."


그제서야 나는 세상의 사람들이 나만 두고 사라져버렸단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그 두려움을 마주보았다.

나는 내게 두려움을 인식시킨 인형을 보았다.


"너, 너... 인형 너, 누구야.
왜 인형이 말을 하는 거야.
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 거고!"

"나는 인형이 아니야.
인형이 아니니 말을 할 수 있는 거고.
나는 주인이 현실을 등지려하길래 막은 것뿐이야.
주인에게 바른 길을 안내시켜주는 것도 하인의 덕목이잖아."

"내가 네 주인이라고?
네가 내 하인이고?"

"응."


인형은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럼 우리 엄마를 원래대로 돌려줘.
엄마말고 옆집 누나도, 학교 선생님도, 편의점 형도. 전부."

"그건 못해."

"왜 못해? 네가 내 하인이라며. 나는 네 주인이라며.
하인은 주인을 위해 뭐든지 해야하는 거 아니야?
왜 못해? 왜? 왜? 왜!"


어쩐지 억울하여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엇이 억울했던 걸까 나는.

인형의 거절이?

아니면 당시의 상황이?

인형이 말했다.


"나는 그럴 힘이 없어."


어쩐지 무척이나 판타지 같은 존재이길래 부탁한 것이었다.

동화에서 나올 법한 느낌의 존재라 부탁한 것이었다.

그 판타지적 개체가 능력 밖이라고 선언하였다.

암담하였다.

고개를 내렸다.

땅을 쳐다보고 몸에 힘을 뺐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싸움에 패배한 강아지 같았다.


무엇에 패배했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러나 그날 인형이 불어넣은 한마디에 용기가 솟게 되었다.


"그러니 주인이 날 키워줘야지."

"키워...?"

"나를 강하고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줘.
그러면 주인의 바람대로 할 수 있을 테니."


여기까지 떨어져서도 빛은 있는 법이던가.

나는 절망을 떨쳐내고 인형의 손을 잡았다.

나무에 뒤덮인 세상을 구하고자.

나무에 뒤덮인 '내' 세상을 구하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