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꿈을 꾸는 것 같다산뜻한 바람과 화창한 햇살은 내 피부를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포근하다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인 듯했다푸른 풀밭 흩날리는 곳에서 온전히 그것을 만끽하고 있다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앞에 앉아있는 그녀는 내내 흰 바탕에 금빛 무늬가 잘 어울리는 홍차 잔을 홀짝일 뿐아무런 서두를 꺼내지 않았다곧게 뻗은 긴 생머리가 바람을 타고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지나가는 바람은 차츰 가라앉고 그녀의 머리칼도 서서히 걷히더니 그 틈 사이로 말똥말똥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떤 물체행동언어도 그 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그 찰나는 눈 깜짝할 새에 끝날 것 같기도영원토록 지속될 것 같기도 했다가만히 응시하는 눈동자 너머에는 내 모습이 비쳤다그 눈이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그 속에 존재하는 내 겉모습도 차례차례 변해갔다


 오래전 지나간 반가운 바람이 또다시 흘러들어오고황홀한 그녀의 눈동자는 그 실체를 감추었다

 

 선택하시죠.

 

 신의 목소리라도 들은 양나는 전율에 몸서리쳤다그녀는 일련의 표정 변화 없이 무감각하게 음성을 내뱉고 있었다서운하리만치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무덤덤한 그녀에게 일종의 불신 내지는 경각심이 생길 만도 하건만내 신경은 오로지 스위치 두 개에 쏠렸다


 어느샌가 목제 테이블 위에 떡하니 등장해서는 나를 현혹하고 있다언뜻 봐도 불길한 붉은색 하나기묘한 안심을 떠안겨주는 녹색 하나식은땀은 자꾸만 새어나와 턱 끝에 맺혀 있고 온몸에 퍼지는 듯 심장 소리의 리듬이 세세히 느껴졌다내심 이딴 스위치는 집어치우고 불과 몇 분 전 그 안락함 속에 빠져들길 간절히 원했지만 일절 달라지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의 협박을 인식했다


 푹 숙인 고개를 간신히 들어 녹색 스위치를 살짝 눌렀다그녀는 그것과 연결된 기계장치인 것처럼 여지껏 본 적 없는 찬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아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미소에 가슴이 쓰릴 정도로 아파왔다.


 눈을 뜨니 광활한 푸른빛이 펼쳐져 있었다정열적인 태양그 자태를 고스란히 떠받들고 있는 파도는 유리구슬을 품고 있거나 자그마한 백열전구 여러 개를 매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기러기 몇 마리가 그 사이를 온순히 지나갔다그 압도적인 광경에 나는 몇 분간 일어설 생각도 못 한 채로 무릎을 끌어 앉고는 사색에 잠겼다


 그렇게 한동안 요지부동인 나를 중심으로 온갖 생물들이 모여들었다나름의 진열을 갖춘 게 무리는 내 두 발을 힘겹게 오르내려 행보하였으며파도에 밀려들어 온 조개나 소라 따위는 내 보금자리를 한층 더 꾸며주었고유유히 떠나던 기러기는 우회하여 내 무릎에 안착해 두 눈을 응시하여 오래전 과거에 불과한 것만 같은 그녀를 상기시켜주었으며파도 틈새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바다거북은...등딱지에 두 개의 스위치를 올려둔 상태로 내 손이 닿는 곳까지 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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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냄새를 음미하며무심한 듯 섬세하게 녹색 스위치를 눌렀다.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며 엎드려있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꽤 오랜 시간이 지난 건지 허리 부근에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다습관적으로 시계가 있던 방향을 보니 12가 다 되어가는 시각…점심시간 직전 수업이었다


 노곤한 분위기가 감도는 교실은 학생 저마다의 개성을 담고 있었다정신 못 차리고 조는 놈수업엔 관심 없는 듯 낙서나 그리는 놈옆자리와 소곤소곤 잡담하는 놈당시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자그마한 특징들까지도 이제 와서는 무시 못 할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각기 다른 잠재성과 십 대 특유의 에너지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끈끈하게 묶여있는 유대감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살고 있었다


 그 경이로운 균형감을 누구도 인식하지는 못했다나는 안정적인 형평에 동조 되어몸의 긴장이 풀어짐을 실감했다옆자리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오랜만인 얼굴에 적잖이 신이 나 저도 모르게 흥분이 고조되었다동시에 목소리 또한 높아져 갔지만정신이 팔린 나는 그것을 깨닫지도조절할 수도 없었다.

 

 거기 둘.


 선생님의 호령이 떨어진 후에야 상황파악이 되었다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그에 응하였지만어째선지 선생님의 입은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맞부딪히는 우리의 시선 사이에는 이상야릇한 기미가 맴돌았다.


 선택하시죠.


 때문에 나는 책상 위에 어느새 두 개의 스위치가 나타난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고교실 모두가 입을 모아 내린 명령에 지레 겁먹고 마른침을 삼키고서는 미처 고민할 틈도 없이 녹색 스위치를 눌렀다

 

 기존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어두컴컴한 색감으로 천장의 색이 구별가지 않았고내가 누워있던 침대와 책장 하나로만 구성된 썰렁한 공간이었다


 아….


 나는 작은 탄식을 자아내고는 거추장스러운 헬멧을 벗어 던졌다갖가지 전신들이 연결되어있는 헬멧은 침대 매트리스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졌다헬멧 꼭대기에 자리한 발광다이오드 중 붉은빛이 깜빡거렸고 녹색 빛은 죽은 듯이 꺼져있었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창문을 열어 난간에 기대었다어둠이 짙게 깔린 풍경에 이곳저곳 네온사인으로 빛나고 있었다온갖 간판들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쉴 틈 없이 깜빡이고 있었다태양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흠뻑 취한 환상 속에서 봤던 태양들은 이미 과거의 잔재가 되어 있었다인위적인 밝음만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바퀴를 버린 자동차들은 아무런 소음을 내지 않고 공기를 가르며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고잔뜩 밀집된 거주건물 사이로 희미한 생명을 피워내던 잔디는 마구잡이로 밟혀 찌그러져 있었다먼 거리임에도 선명히 보이는 거대한 전광판에 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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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적인 미소를 한껏 지은 모델은 헬멧을 착용하고는 역동적으로 침대에 뛰어들더니 시체처럼 평온한 상태로 잠들었다


 담배 냄새가 콧속을 메어왔다나는 담배꽁초를 비벼 불을 끄고 돈을 챙겨 방을 나섰다가까운 가게에 여분의 배터리 재고가 쌓여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