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에서 비롯된 세 가지 위험이 있다.



-



미쳤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입꼬리가 자아내는 웃음도.


미쳤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퍼지는 웃음도.


미쳤다.


쓰러진 동료를 뒤로한 채 멀어지는 웃음도.


그저 미쳤다.


뭐가 그리 웃기냐는 듯 물어본 한마디, 그리고 대답.


"아. 너는 모르겠지."


무미건조한 확답, 사라진 웃음기, 비참할 정도로 시린 얼굴들.


그리고 다시 웃음.


다른 이들이 이계인과 연관되지 말라고 한 이유를 비로소 이해했다.


그들의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



지하 13층. 수많은 사람이 스러지고, 백골만이 그들을 증거하는 최하층.


그들은 웃고 있었다.


"이 층이 막 층이었던가?"


거검을 든 남자의 낮고 스산한 웃음.


"어 맞아. 어디 보자 12시간 34분 여기까진 신기록이네."


장 지팡이를 든 여성의 길고 희미한 웃음.


"너무 편하게 온 거 아니야? 역시 마법사가 잘하니까 든든하네."


단검을 찬 남자의 높고 가벼운 웃음.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슬슬 연다?"


다시 낮고 스산한 웃음.


"그래 지금까지 실수 없이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 이제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성표를 든 남자의 얕게 퍼지는 웃음.


화기애애하게 웃는 일행의 먼발치에는 그들의 모순이 있었다.


실수가 없었다고? 2층의 장치 함정, 5층의 끊어진 다리, 9층의 낙석, 11층의 마물 무리, 9명이 내려와 5명이 남았다. 그러고는 이해했다. 아니 그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 물어볼 용기가 없어서, 나약하고 두려웠기에, 실력도 없는 주제에 미궁에 간다고 떠들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기에.


그러나 벌어진 일이다. '선택했지만 결정하지는 않았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기에는 너무 깊이 내려왔다.


드르륵.


거대한 석문이 밀리며 하나의 사념이 밀려나고 다른 하나의 사념이 밀려든다.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문, 저 문이 열리면 아마도 죽을 것이다. 그저 짐작이지만 한없이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그들은 내게 문 너머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층 중간의 기둥에 어정쩡하게 숨어있었지만 그럼에도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마치 비웃음 같았다.


드르륵.


계속되는 돌바닥이 갈리는 소리에 문득 생각난 격언.


이계인과는 친구도 동료도 연인도 될 수 없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는 용병 사이 일종의 불문율. 


지금까지는 무시로 일관하던, 비로소 이해한 격언의 의미. 


그들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그뿐이었다.


쿵.


석문이 벽과 닿았다.


침묵이 퍼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며 몸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커헉."


목에 찬 핏물이 숨을 조여온다. 뒤를 돌아보자, 서 있는 인영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있었다.


"어...째서…"


사고가 마비되어 튀어나온 의미 없는 질문.


"미안, 미안. 공략 상 제물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그래도 협회에는 너도 크게 활약했다고 전해둘게."


웃는 얼굴엔 감정 따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깻죽지까지 내려온 어둠에 눈이 멀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한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간신히 도달한 가방을 헤집는다.


물약, 어디에 넣어놨었지?


헤집은 가방 맨 위에 보이는 물약을 집고 이빨로 코르크를 뜯는다.


잔여물로 가득한 입안 너머로 비릿한 액체가 스며들며 고통이 중화된다.


"콜록! 콜록!"


목에 들어찬 피를 뱉어내자 겨우 숨이 쉬어진다.


그리고 다시 들리는 웃음소리.


"그냥 마시게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발악하는 게 재미있잖아."


간간이 들리는 말에 섞인 웃음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따끔거리는 목 주위에 남은 물약을 부어 버리고 일어선 순간 한기가 들이닥치며 내려앉은 어둠이 형상을 갖춘다.


"타이밍 좋고. 다들 어그로 끌릴 때까지만 대기 좀."


얕게 퍼지는 웃음 뒤로, 형상을 갖춘 검은 해골에서 안광이 피어오르며 손짓을 하자 끔찍한 두통이 밀려왔다.


"으아아악!"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엎드린다. 웃음소리는 사라졌고 고통만이 유일한 감각으로 남았다.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고 영혼이 검은 해골의 손과 닿는 순간 빛이 터졌다.


-캬아아아!-


영혼을 뒤흔드는, 선명한 소리 없는 비명.


다시 육신이 느껴지고 두통이 사그라들었다. 축축해진 전신이 삶을 실감시켰다.


그리고 다시 웃음.


그래. 저들은 웃고 있다. 뭐가 그리 즐겁기에.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 전신을 감싼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검은 해골의 책.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달리는 중이었다.


"뭐야 물약에 피 말고 다른 거 넣었냐?"


"아니. 죽을 거 같으니까 정신 나가서 저러는 거 아니야?"


목소리가 들릴 거리는 이미 지나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져 갔다. 웃음조차도.


턱.


땅이 가까워진다. 아니 넘어지고 있다. 그리고 머리 위를 지나가는 파공음.


넘어지지 않았으면 죽었다. 하지만 안도는 멀었고 감각의 한계치에 다다른 육체는 위기감을 무시하며 검은 해골의 책에 손을 뻗는다.


콰득.


뻗은 손은 기이한 각도로 꺾여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목적을 이루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뒤에서 끔찍한 파괴의 빛이 쇄도하고 있었으므로.


-캬아아악!-


파괴의 빛은 광명으로 공동을 채우고, 육신과 검은 해골을 관통하고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다시 웃음.


"거봐 준비만 잘하면 리치도 별거 아니라니까."


"12시간 59분! 협회는 스피드런을 기록으로 안 쳐주는 게 아쉽네."


"다들 수고했고 전리품 챙겨서 올라가자 정산해야지."


몽롱해진 정신을 손의 감각이 재차 일깨운다. 어느새 손에 들려있는 책은 게걸스럽게 영혼을 탐하는듯했다.


-Asi Mati Tevi Naur Ento-


잠식된 육신이 기이한 주문을 흘린다. 영혼이 울리고 어둠을 빨아들인다.


"뭐야 저거 살아있는데?"


"처음 보는 패턴인데 뭐지"


"아씨 이러면 귀찮은데 성수 가져온 게 있나"


"정화 마법 준비할 테니까 어그로 좀"


웃음이 희미해지고 세계의 색이 바래어 바스라진다.


끔찍하게 느려진 시간 속에 마법이 완성되며, 육신은 재구성되고 영혼은 말라간다. 그래서 눈앞의 영혼을 탐했다.


"으아아악"


"조금만 참아!"


비명, 그리고 웃음.


넷, 그리고 하나.


공동이 다시금 빛으로 충만해지며 책이 바스라진다.


파괴의 빛은 또 한 번 육신을 분쇄했다.


조각난 육신의 고동은 침묵과 공명하여 식어갔고, 희미해진 정신은 무저갱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네 개의 육체에서 피어오른 빛줄기가 하나의 영혼 적셨다.


마지막에 시야에 들어온 묵빛 바탕에 흰 글씨.



LEVEL UP


그리고 다시 웃음.



-



아홉이 들어가 하나가 나왔고 13층이 하루 만에 정복당한 사건은 순식간에 퍼졌다.


그렇게 팔사일생의 악명이 퍼져갈 무렵, 그는 그저 방에 처박혀있었다.



조각난 영혼


허공에 떠 있는 빌어먹을 이계의 저주.


벌써 몇 시간을 들여다본 건지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 살았으면 된 거지."


그보다 중요한 건 미궁을 돌파했음에도 남은 돈이 없다는 사실이다.


장비, 식량, 물약. 공략을 위해 들고 간 물건은 물론이고 층에 있던 모든 물체가 분쇄되어 가루가 되어버린 덕에 원래도 목숨을 걸어야 했을 미궁 탈출은 그보다 더한 걸 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게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미궁에서 마물을 조우하는 일 없이 무사히 탈출했지만 지나간 일을 위로해 봐야 나오는 건 없다. 게다가 눈앞에 떠 있는 이계의 저주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단 취급을 받는다.


이대로 무턱대고 왕국령에 들어갔다가 이계의 저주를 들키면 잘 쳐줘야 참수, 그렇다고 이계인의 도시로 들어갈 수 없는 게 그쪽은 이계 지식이 없으면 접근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위성 도시에서만 활동해야 한다는 건데, 혼자 살아남은 이탈자에게 등을 맡길만한 사람은 정신병자밖에 없을 것이다.


수년 동안 나약함을 자위하며 한 일이라곤 짐꾼 역할뿐이었는데, 이제 홀로 미궁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다시 웃음.


그래. 혼자는 아니다. 저 빌어먹을 이계의 저주는 여전히 눈앞에 있으니.


반투명한 창에는 얼굴이 없지만 왠지 웃고 있는 거 같아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다.


사실 이계의 저주는 잘못한 게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생명의 은인 아닌가. 그럼에도 길잃은 분노는 주먹을 올렸고 그대로 묵빛 창을 후려쳤다.


쿵.


내던져진 주먹은 어떠한 저항도 없이 묵빛 창을 통과했다.


그리고 넘어졌다.


꼴사납게 바닥과 마주하게 된 기분은 생각보다 후련했다. 그보다 자괴감이 먼저 몰려왔기에.


그렇게 돌아누워 마주한 묵빛 창은 최후의 통첩을 고했다.



조각난 영혼


현재 영혼이 조각난 상태입니다.

남은 5개의 영혼을 흡수하여 영혼을 수복하세요.


사망까지 남은 시간 : 59일



그리고 다시 웃음.


명백한 비웃음.


뇌는 그 조그마한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선택한 것은 현실 도피였다.



-



눈 밑까지 내려앉은 그림자.


살해 예고 때문이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살해 예고 때문이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살해 예고 때문이다.


사실 뭐가 이유가 됐든 술 마실 이유가 필요 했던 게 아닐까라고 자문하지만, 이 역시 '살해 예고 때문이다.'라고 중얼거리며 길바닥을 향해 도피했고, 그나마 남은 동전 한 잎마저 황혼 너머로 사라진 후에서야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너덜해진 정신 앞에 놓인 종이. 위에 쓰인 글자. 그리고 눈뜬 꿈. 깬 현실.


증인 소환장.


아홉이 내려갔는데 하나가, 그것도 지난 수년간 짐꾼이나 하던 잡일꾼 혼자 돌아왔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외면하던 어제, 아니 그제 일을 다시금 외면하며 눈뜬 현실로 지샌 밤은 생각보다 유쾌했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도착한 협회의 앞에서 시야가 뒤집어지며 생각했다.


살해 예고 때문이다.



-



두려울 거 없다. 


눈 뜨면서 본 첫 번째 천장을 보며 한 생각.


협회의 의무실은 밝고 정겨웠다.


정신을 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의 조사관이 들어왔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물어본 이름. 이름이 뭐더라.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얼버무렸다.


의무실에서 즉석으로 이루어진 미궁 공략 보고는 짧았다. 아니 길었던가. 중요한 건 살았다는 거 아닌가. 그래 그게 중요하지.


그리고 다시 웃음.


눈앞에 놓인 숫자 58. 아 살해 예고.


돌아온 현실은 참으로 유치했다. 인간이 무언가를 하기엔 돈이 필요하다. 이 의무실도 그렇다.


손에 잡힌 계산서는 마지막 이성까지 물어뜯은 후 말했다. 두려울 거 없다.


멀리 있던 행동은 따가운 눈초리와 함께 쫓겨나 길거리로 향했다.


물어뜯긴 이성을 붙잡은 건 내민 손이었다.


"그 혹시 팔사일생이라 불리시는 분 맞나요?"


화사한 웃음. 복장을 보면 아마 모험가.


"미궁에 같이 들어갔던 분들 중에 제 지인이 있던 거 같아서 그런데 시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꼬르륵.


대답은 의지와 관계없이 배에서 난 소리였다.


"아 혹시 식사 안 하셨으면 밥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어떤가요? 돈은 제가 낼게요."


거부할 수 없었다.



-



"이름은 편하게 팔사일생이라고 부를게요."


"아니 제 이름은..."


"됐고, 거주지는 어디인가요?"


"그 이름 정도는..."


"배 안 고프신가요? 이제 돈도 없지 않으신가?"


"...이번 달까지는 하층 뱀 거리, 에이벨 2단지 103호고 다음 달은 길바닥 어딘가겠네요."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쏟아진 질문의 폭포. 어딘가 호구 조사에 가까운 질문들.


"근데 이건 지인이랑 별 상관없는 질문이 아닌지..."


"밥 안 드실거에요?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립니다?"


의문을 품을 때마다 음식을 가지고 하는 협박. 덕분에 음식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흘러간, 입 여느라 칼로리만 더 소모한 거 같은 식사가 끝났다.


"밥 잘 먹었습니다. 그럼, 이만."


"저랑 미궁에 들어가지 않으실래요?"


빠르게 헤어지려는 나를 말로 붙잡은 모험가는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재차 말을 이어왔다.


"어차피 돈 벌어야 하지 않나요? 그냥 따라오세요. 5할은 챙겨드릴 테니까. 내일 바로 들어갈 거니까 준비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홀연히 사라진 모험가.


거부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경종. 평소라면 이상함을 느끼고 도망쳤겠지만, 한번 망가진 내 뇌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며칠 동안 개 같은 일의 연속이었는데 한 번쯤 좋은 일이 일어날 때도 됐지.'


그리고 다시 웃음.


시커먼 창과 글자의 나열. 보이지 않는 얼굴의 입꼬리는 전보다 올라간 거 같다. 그저 기분탓일까?


그리고 그날 밤 침공이 시작되었다.



-


문제는 그날 밤에 꾼 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검은 신전의 앞에 놓인 책.


그 웅장한 광경에 압도되어 홀린 듯이 집어 든 책에선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십 년의 연구 성과가 이런 머저리한테 이어질 줄이야.-


그 소리에 놀라 팔을 휘둘러 책을 던져보려 했지만, 책은 검은 안개가 되어 몸으로 흡수되었다.


-멍청한 짓 하지 말고. 자 외쳐라, 상태창.-


안개가 되어 사라진 책이 있던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하, 하. 이제 별꼴을 다 보네. 당신이 누군데 명령이야?"


얼빠진 정신이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내뱉은 말.


-그럼 그냥 뒤져라.-


아쉽게도 의문의 목소리는 그리 친절한 존재가 아니었다.


"뭐 잠깐! 상..."


그대로 신전의 밑바닥을 뚫고 내려가다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눈을 떴다. 침대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창밖에 보이는 검은 연기와 붉은빛.


도시가 불타고 있다.


완벽하게 잊어버린 꿈을 뒤로, 챙길 물건조차 없는 방을 떠나, 건물을 나가자 마주친 어제의 모험가.


"깨우러 올라가려 했는데 마침 알아서 나와주네."


어느새 반말하는 모험가지만 긴박한 상황에 자연스레 묻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죠?"


"미궁에서 마물이 올라오는 중이야 불은 화염술사들이 마물을 처리하다 실수해서 옮겨붙은 거고."


"근데 당신은 도망치지 않고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미궁 가야지."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팍!


순식간에 치고 들어온 단검을 든 팔. 나는 그대로 벽과 팔 사이에 목이 끼어버렸다.


"시간 없으니 단순하게 가자?"


"네, 네!"


벽을 긁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단검에 얼떨결에 대답해 버렸고, 모험가는 그 대답을 듣고는 매고 있던 짐을 던졌다.


"들어."


이제 완전히 우위에 있다는 태도.


"이걸 왜 나한테..."


"너 짐꾼이라며? 어차피 짐도 없는 거 같은데 그거나 들고 따라와."


부당한 처사에 나름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금방 진압당했다. 모험가는 투덜거리는 나를 무시하고 협회로 향했다.


검은 연기 사이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물을 나르는 사람들,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다니는 모험가 무리를 지나 간이 의료소가 만들어져 핏자국과 신음으로 가득한 협회의 앞에 도달했다.


"근데 미궁은 어떻게 들어갈 겁니까?"


"협회장한테 허가받고 미궁의 뒷문을 열 거야."


"미궁의 뒷문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만."


"그냥 그런 게 있다고 알아두기만 해."


협회의 앞에 나를 방치해두고 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 모험가는 금방 밖으로 나왔다.


"안에 사람이 없었나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모험가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허가받았으니까 따라와."


그리고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한 모험가. 사력을 다해 뛰어가지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잠깐 천천히…!"


도시를 벗어나 미궁 근처의 숲에 다다를 때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발을 멈추고 헐떡이는 숨을 다스린다.


"너 짐꾼 아니었어? 근데 체력이 왜 이리 저질이야?"


"그쪽이 떠넘긴 가방 무게를 생각해봐!"


모험가가 어이없는 듯 물어보지만, 이족도 이쪽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30kg이 넘는 가방을 던져주고 본인은 편하게 달리기만 했는데, 따져야 할 쪽은 이쪽이다.


"그게 얼마나 된다고 너도 플레이어잖아?"


"뭐?"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모험가.


"뭐 이 정도 나왔으면 이제 상관없나. 언제까지 힘순찐인척할 꺼야? 그쪽도 히든피스 노리고 미궁에 온 거잖아?"


"무슨 소리하는 거야 당신."


"아직도 모른 척이야? 몇 년 동안 짐꾼으로 위장한 것도 미궁을 조사하기 위한 거면서. 그러다 리치를 발견하고 제물로 사용할 순진한 B급 몇 명 꼬셔서 전부 죽인 다음 리치는 너 혼자 독식한 거잖아? 근데 욕심이 과했어. 우리 애들을 건들면 안 되지."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는 나를 향해 서서히 무기를 꺼내는 모험가.


"아 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난 안 속아. 그 어리숙한 얼굴로 대체 몇 명을 집어삼킨 거야? 그쪽 마법사 계열이잖아. 무기도 없고 체력도 허약한게 수인 마법 쪽인가? 이제 모른 척 그만하고 뒤지기 싫으면 리치가 남긴 히든피스 내놔."


그 말도 안 되는 논리의 비약을 해명하는 것보다 모험가가 무기를 발사하는 게 빨랐다.


탕!


권총. 빌어먹을 이계의 무기가 내 왼 손바닥을 꿰뚫었다.


그리고 다시 웃음.


"상태창!"


떠올린 꿈. 비명 대신 지른, 비명에 가까운 외침. 그러나 나타난 건 허공의 창 따위가 아닌 검은 책.


"아티펙트였나. 그래.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그리고 너도 즐기려고 따라온 거잖아?"


권총을 든 모험가의 찢어진 입꼬리 그리고 화사한 웃음.


그리고 나무 사이로 사라진 모험가의 모습.


고통을 삼키고 오른손으로 빠르게 책을 펼친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이계 지식.


"나와라."


탕!


목소리와 동시에 쏘아진 총알은 반투명한 영혼이 쥔 바닥에 박힌 거검에 막혔다.


"사령술인가. 이러면 간 볼 필요도 없겠네."


모험가가 달려들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막아!"


반투명한 영혼이 자세를 낮춘다. 낮게 휘둘러진 거검이 반원을 그리며 모험가를 향해 쇄도한다.


가가각!


땅을 긁으며 불꽃을 만들어낸 거검이 사선으로 휘둘러졌지만, 검의 궤적에 몸이 닿기 직전 모험가의 모습이 사라지고 거검은 허공을 휘둘렀다.


그리고 거검의 끝에 보이는 모험가. 그 짧은 사이 검 위에 올라탄 것이다.


"마력탄 한발이 얼마인지 알아?"


거검을 박차고 허공을 날아오는 모험가의 손에 들린 단검.


내가 몸을 앞으로 날림과 동시에 단검이 가로로 휘둘러진다.


"크흑!"


어깨에 박힌 단검. 그러나 모험가는 내 몸무게와 가방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허공에서 중심을 잃으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 위를 거검이 내려찍는다.


쾅!


민첩하게 몸을 굴려 빠져나간 모험가.


"마법사치고는 꽤 센스가 좋은데? 이거 괜히 단검 들었네."


다시 거검이 가로로 휘둘러지지만, 모험가는 여유롭게 백 텀블링으로 검의 범위를 벗어나 웃었다.


입술을 깨문다. 하나 가지고는 안된다. 하나 더 소환은 무리인가?


"보고서엔 심한 저항으로 난도질 정도면 되겠지?"


커틀러스를 꺼내든 모험가가 길게 늘어진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모험가. 사고가 늘어진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단 하나의 해결책. 판단할 시간 따윈 없다.


"해방!"


반투명한 인영이 앞으로 돌진한다.


채-앵!


커틀러스와 단검이 부딪혔다.


쿵!


수직으로 내리꽂는 거검.


또다시 길게 늘어져 거검을 회피한 모험가는 단검을 든 영혼을 향해 커틀러스를 휘둘렀다.


사아악.


커틀러스가 목을 가르지만, 반투명한 영혼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금세 복구된다.


왼손으로 괜히 시려오는 목을 쓸어내렸다.


"마나 반응이 미미한데…. 이거 대체 뭐로 만든 거야? 일반적인 사령술이 아닌 거 같은데."


거검과 단검의 합공을 여유롭게 받아치며 말하는 모험가.


반투명한 창을 힐끔거린다.



조각난 영혼


현재 영혼이 조각난 상태입니다.

남은 6개의 영혼을 흡수하여 영혼을 수복하세요.


사망까지 남은 시간 : 47일




흡수해야 하는 영혼은 늘어나고 기한은 줄어든 반투명한 창.


하지만 영혼을 해방했음에도 여전히 팽팽한, 아니 2 대 1임에도 가볍게 공방을 오가는 모험가는 상황 자체를 즐기는 듯 보였다.


"마물이 이쪽으로 몰려드는데?"


그때 손가락으로 내 뒤쪽을 가리키는 모험가. 하지만 뒤는 돌지 않는다. 저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다. 여기서 한눈팔면 죽는다.


"안 걸리네."


기이하게 늘어난 모험가의 신체가 순식간에 영혼을 따돌린다. 하지만 신체가 나타난 곳은 내가 있는 쪽이 아닌 다른 방향.


"근데 오고 있는 건 진짜거든? 너도 카르마 쌓여 있지 않아? 중앙 길드에 걸리면 가볍게는 안 끝날 거 같은데."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지껄이는 모험가.


"무슨 소리지. 뭔 카르마?"


"아직도 모른 척이야? 철면피가 따로 없네. 뭐 그런 사소한 건 됐고, 뒤진 우리 네 얼간이보다 그쪽이 더 마음에 드는데 서부 길드에 들어오지 않을래?"


갑작스러운 제안. 동료를 죽인 것으로 확신하는 사람에게 영입 제의라니 이계인의 감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아깝네."


그렇게 말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 모험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근데 이름이 뭐야?"


이제 와서 저 정신병자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팔사일생."


"치졸하네."


그렇게 말한 모험가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사라졌다.


화사한 미소를 남긴 채.


크르륵.


모험가가 사라지자 곧바로 나타난 거대 늑대를 탄 낯선 사람.


"괜찮으십니까?"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놓인다. 털썩 주저않는 나는 겨우 말을 꺼냈다.


"여기 안전한 곳이 어디인가요."


멀리서 본 도시의 불길은 더욱 거세져 있었다. 도시도 불타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미궁에 거점으로 돌아가면 됩니다만?"


기묘해지는 낯선 사람의 표정. 뭔가 이상하다.


"아 혹시 조난자이신가?"


자문자답하는 낯선 사람.


"다치신 거 같은데 일단 거점까지 데려다드릴게요."


낯선 사람은 거대 늑대에 나를 태우며 말했다.


"와 마력탄 맞으셨어요? 손바닥이 너덜너덜해지셨네. PK 범이라도 만나셨나 보네요."


"아 네..."


일단 입을 닫으며 맞장구를 친다. 감이 안좋다.


"중앙 길드의 퀘스트 지역에서 PK라니 정신 나간 사람이네요. 게다가 제한 품목인 마력탄까지..."


그렇게 끊임없는 말을 파도 속에 피로로 느슨해진 정신이 희미해진다.


마지막에 들은 소리는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