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으로 가게."


다소 맥락없는 명이었으나, 어쩌겠나. 군바리가 까라면 까야지. 아무리 원숭이들과 전쟁 중이었지만 공사관에 주재무관은 있어야하니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내 정신을 시베리아 너머로 던져버렸다.


"황녀를 데리고."


차르 니콜라이 2세의 한마디는 그렇게 내 인생을, 아니 역사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 * *
1905년, 대영제국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날이로군."


슬쩍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본 밸푸어가 말했다.


"런던 하늘이야 늘 그렇지 않습니까?"


그 대답에서 짜증을 읽어낸 밸푸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오,  오 걱정 말게 존. 이번에는 그대도 흥미있어 할 얘기니까."
"그 망할 것들이 전함 건조 계획 취소 따위를 운운했다-는 얘기는 아니길 빕니다. 안그래도 머리 아프니까."
"불곰과 원숭이의 싸움 결과네. 전멸일세."
"어디가?"


그는 내심 일본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러시아 해군이 어디로 향하는지, 전력이 어떻게 되는지, 심지어 연료 사정이 어떤지 모조리 전해주었다. 왕립해군이 직접 참전하는 것을 제외하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준 셈이다. 하지만 총리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양쪽 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입을 연 것은 피셔였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건 내가 자네에게 물어야 할 것 아닌가? 해군위원, 이게 가능한 일이기는 한가?"
"함대의 모든 전함이 동시에 발포해서 초탄이 모두 탄약고를 유폭시킨다면, 이론적으로 가능은 합니다."
"그게 확률적으로는,"
"예. 0에 수렴합니다."


허탈한듯 의자 깊숙히 몸을 파묻은 밸푸어가 허허로운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결국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거군. 바쁜데 불러서 미안하네, 해군위원."
"아닙니다 각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영제국의 심처는 침묵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