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나플거리던 눈송이들은 이내 서서히 시야가 가릴 정도로 세차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국의 중심, 차르의 겨울궁전은 눈보라를 뚫고 우뚝하게 서있었다. 그러나 겨울궁전의 주인은 그곳보다 조금 더 떨어진 페트로파블롭스 요새의 성당 안에 있었다. 


"왔는가?"


빈 성당 안에 차르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비록 가문의 뒷배가 있다지만-겨우 기수(기병소위)를 달고 임관한나 따위를 차르가 부를 일은 없다. 


"혼란스러운 표정이군."

"아닙니다!"

"아니긴. 얼굴이 완전히 굳어있네만."


누구라도 상급자 앞에 서면 그런게 당연한게 아닌가. 게다가 내가 몇 년을 군대에 있었는데. 


"조만간 나도 여기에 몸을 뉘일 듯 하네."


차르는 지나가듯 툭 내뱉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페트로파블롭스 성당은 대대로 황족들의 무덤. 그러니까 저 말은...


"이해하지 못했나? 곧 내 모가지기 잘릴 것 같다는 얘기네."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의 권위는 아직 반석 위에 있다. 그걸 흔들 일은, 아. 전쟁. 


"기수는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군. 맞네. 그놈의 전쟁이 문제지. 얼마 전에 해군성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네."


그리고 그 결과는 나를 혼란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결과는 전멸일세. 제국의 자랑스러운 함대가 모조리 바다에 처박혔어. 더 재미있는게 무언지 아나? 원숭이들도 전멸이야. 방금 주일본제국 공사관에서 들어온 정보네.


기수정도 머리가 굴러가는 사람이라면 이게 불러올 파장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걸세."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원숭이 함대에게-물론 둘 모두 그랬지만-전멸. 이 소식이 퍼진다면 그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은 순간이다. 


제국은 적이 많다. 이미 대영제국은 제국의 식랑 수출입 길목을 슬슬 건드리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간헐적 기아까지 발생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미 육전에서의 반복된 패퇴로 민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에 이 소식은 너무도 뼈아픈 치명타다.


"...허면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겨우 막 임관한, 해군도 아닌 기병대 기수에게 차르가 맡길 일은 무엇인가.


"조선으로 가게."


다소 맥락없는 명이었으나, 어쩌겠나. 군바리가 까라면 까야지. 하지만 그 다음 말은 내 정신을 시베리아 너머로 던져버렸다.


"황녀-올가를 데리고."


"...그 어인 하교십니까?"


차르는 말없이 전보 하나를 건냈다.


수신: 주대한제국러시아 공사관

발신: 러시아 제국 내무부 공안질서수호국 

공사관에서 파악한 '기현상'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대한제국의 국경을 비롯한 모든 경계에 가시거리 측정이 무의미할 정도의 안개가 발생했다. 

1-1. 해당 안개는 발생 이후 2주간 사라지지 않았다.

2. 제국 전역에서 관측이 가능한 검은 아치형 구조물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3. 해전이 발생한 바다에 인접한 해안가에서 미약한 해일이 관측되었다.

3-1. 당시는 해일이 발생할 기상도 아니었다.

3-2. 지진 역시 관측된 바 없다.


"알겠는가? 그래서 조선이네. 가장 괴이하나 또 가장 안전할 수 있는 선택지이지."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두 분 폐하와 황태자 전하, 그리고 다른 황녀 전하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다른 황녀들은 영국, 프랑스, 미국... 모두 탈출시켜야지, 어찌하겠는가? 최대한 많은 곳에 빼내야, 그래야 로마노프가 살 수 있겠지. 아마 선별된 몇 장교들도 자네와 같은 소리를 듣고 있을걸세."


무언가 이상했다. 그러면 차르와 차리나, 그리고 황태자는?


"나와 부인, 황태자는 여기 남아야지. 겨우 한 살짜리 황태자를 데리고 어디를 가겠는가."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허락하네."

"왜 저입니까? 저는 황녀 전하와 특별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리 특출난 재능도 없습니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차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친모-이정도만 말해도 알아 듣겠지. 첨언하자면, 제국 내에 오흐라나의 눈이 닫지 않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네."


자네의 부친도 곧 알게 되겠지-그런 황제의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 뿐이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이바노프- 아니, 알렉산드르 세르게여비치 리 기수가 차르의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